그 해 겨울ㅡ숨겨진 이야기/ 조광호신부
군대 시절, 저는 신학생 신분으로 특수부대에 징발되었습니다. 키가 크고 신체 조건이 좋으며 사상이 건전? 하다는 이유였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군기와 규율이 엄하다고 소문난 헌병교도대 훈련조교로 선발된 것입니다.
김신조 청와대 습격 사건이 있었던 그해 겨울, 헌병교육 특수코스는 산악 침투 훈련이었습니다.
얼어붙은 야산을 기어 오르는 그 훈련은 육체를 넘어 정신까지 시험하는 험난한 시간이었습니다.
겨울 산은 차갑고 매정하였고, 공기는 날카로웠으며 숨은 거칠었습니다. 훈련은 엄격하였고 분위기는 늘 팽팽한 긴장 속에 있었습니다.
훈련병들이 조교들의 군화에 밟히는 일은 예사로운 광경이었습니다. 요령을 피우거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사병이 있으면, 고참은 여러 차례 강조하며 말했습니다.
"무조건 밟아라."
그 말은 거칠지도, 격앙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 끔찍하게 들렸습니다.
그는 그것을 엄격한 훈련을 위한 하나의 절차처럼 여겼을 뿐이었습니다. 폭력은 분노의 얼굴이 아니라 규율의 얼굴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그 명령은 단순한 지시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발로 밟는다는 일은 저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누군가를 밟는다는 것은 단지 몸을 누르는 행위가 아니라, 그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저는 훈련의 강도보다 그 명령의 의미가 더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존심에 상처난 고참은 자기가 보는 앞에서 내가
훈련병들을 밟게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부당한 그의 명령을 침묵으로 버티어냈습니다.
그러자 그는 저녁마다 나를 본격적으로 괴롭혔습니다.
말로는 차마 다 할 수없는 죽음의 수용소 같은 잔인한 고문기합으로
온 몸이 상처로. 멍들었습니다
급기야 멏명 대원은 불구가되고
자살과 탈영병이 생겨났습니다
지금도 그 때 받은 휴유증이 몸에 스며있습니다.
몸은 고단하였고 시간은 길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시절을 매를 맞으며 견디어 냈습니다.
그 선택을 특별한 용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제 마음이 허락하지 않은 일을, 저 스스로에게 허락할 수 없었을 뿐이었습니다.
지난 12·3 계엄 선포 당시, 무장 군인들을 보며 저는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부당한 명령에 아무 생각 없이 따랐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명령은 짧고 단순하지만, 그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 저는 한나 아렌트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녀는 예루살렘 법정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을 바라보며, 인간이 아무 의심 없이 악에 동참하는 현상을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 이라 불렀습니다.
역사상 가장 끔찍한 학살은 광기에 사로잡힌 괴물이 아니라, 서류를 처리하던 평범한 관료의 손에서 완성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괴물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규칙을 따랐고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바로 그 평범함 속에서 악은 거대한 규모로 자라났습니다.
악은 괴물의 얼굴로 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규칙을 따르는 평범한 사람의 얼굴로, 합리화된 언어와 무감각한 태도로, 조용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나의 안전과 입장을 위해 불의를 눈감고 동참하는 유혹에 끌려 갈 때, 우리는 무서운 죄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가책도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가장 두려운 일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겨울은 저를 단련했다기보다, 제 한계를 보여 준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대단한 결단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제 안에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지점을 넘지 않으려 했을 뿐입니다.
저는 그 일을 자랑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기억으로 간직합니다.
그때의 추위와, 그때의 망설임과, 얼어붙은 산비탈 위에 멈추어 서 있던 그 순간이 지금도 제 삶을 조용히 붙들어 줍니다.
그리고 저는 오늘도 기도합니다.
주여, 제가 두려움 앞에서 편리한 쪽을 택하지 않게 하소서.
규율의 이름으로 포장된 불의 앞에서 멈추어 설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하소서.
그리고 그 어떠한 경우라도
사람을 사람으로 볼 수 있는 눈을, 끝까지 잃지 않게 하소서.
그 겨울의 차가운 산바람이 그것을 제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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