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볼과 골고타
ㅡ예수 생애의 두 상징
1
동검도 채플 앞에는 두 산이 마주 서 있습니다.
높고 장엄한 마니산과, 풀로 덮인 낮은 초피산입니다.
하나는 빛을 먼저 받으며 하늘을 향해 솟아 있고,
다른 하나는 조용히 땅을 감싸 안으며 향기를 품고 있습니다.
마니산이 영광과 선언의 상징이라면,
초피산은 겸손과 스며듦의 상징입니다.
특히 초피는 작고 눈에 띄지 않지만,
그 향은 강렬하여 한 번 스치면 오래 남습니다.
보이지 않으나 공간을 바꾸고,
소박하나 깊이 스며들어 사람을 깨웁니다. 향기 강한 산초나무 열매의 껍질,초피(椒皮)를 이름으로 한
이산은 바로 그런 영적 힘을 지닌 산입니다.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지배하고,
소리치지 않으면서도 흔드는 힘.
겉은 낮지만 내면은 강한 존재.
이 두 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문득 복음서의 두 산이 떠오릅니다.
2
타볼과 골고타.
예수의 생애에 이 두 산이 있습니다.
이 두 산이 지니는 의미는 단순하지가않습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뼈대이며, 영혼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순례의 지도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각자의 삶이 이미 이 두 산 사이 어딘가를 걷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타볼 — 빛이 터지는 자리
타볼 산 위에서 빛이 터졌습니다.
설명이 불가능한 빛이었습니다. 어떤 개념도, 어떤 신학도 그 빛을 담아내기에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고, 그분의 옷은 빛 자체가 되었으며, 하늘의 음성이 고요한 대기를 가르며 울렸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그의 말을 들어라."
그 한 마디는 모든 의심을 증발시키는 말이었습니다. 망설일 이유가 없고, 두려워할 근거가 없으며, 하느님이 여기 계신다는 것이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로 느껴지는 —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신앙이 지식이 아니라 체험이 되는 순간, 믿음이 의지가 아니라 확신이 되는 순간.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새벽 기도 중에 문득 찾아온 설명할 수 없는 고요함. 예배 중에 이유도 모르게 흘러내린 눈물. 가장 깊은 절망의 끝에서 손처럼 내밀어진 말씀 한 구절. 혹은 그냥 — 어느 오후, 햇살이 창문을 통해 쏟아지던 그 순간, 아무 이유 없이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되던 그 순간.
그것이 타볼입니다.
하느님이 당신의 언어로, 당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당신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순간.
신학자들은 이것을 신현(神顯, theophany)이라 부르지만,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사실은 그 단어가 얼마나 빈약한지 압니다.
베드로는 그 순간 솔직했습니다.
"주님,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지읍시다."
이 말은 탐욕이 아니었습니다. 부끄러운 말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사랑이었습니다 — 좋은 것을 잃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것 앞에서 멈추고 싶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지극히 정직한 사랑. 우리는 모두 베드로입니다. 은총의 순간을 붙들고 싶고, 확신의 감각을 보존하고 싶고, 하느님이 가깝다는 그 느낌을 영원히 품고 싶습니다.
그 마음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은 하느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초막을 짓지 않으셨습니다.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내려오셨습니다.
3.
예수는
왜 제자들 청을 들어 그곳에. 머무르지 않으셨을까요. 왜 그 빛 안에 제자들을 두지 않으셨을까요. 왜 하느님은 황홀의 순간을 허락하시고는, 이내 다시 일상의 먼지 속으로 우리를 돌려보내실까요.
그러나 바로 이 불편함 안에 복음의 역설이 있습니다.
타볼의 빛은 소유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따라가라고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보았다는 체험은 도착점이 아닙니다. 그것은 출발점입니다. 빛은 우리를 정지시키기 위해 오지 않습니다. 빛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 옵니다.
빌립보서의 고백이 울립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형체이셨지만, 하느님과 동등함을 기어이 붙들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문법입니다. 높아짐이 아니라 낮아짐. 집중이 아니라 흘러감. 소유가 아니라 내어줌.
그리고 예수는 그 문법을 말씀으로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몸으로, 발로, 피로 써 내려 가셨습니다.
그는 골고타로 향하셨습니다.
4
골고타 — 하느님이 인간 세상,가장 깊이 내려가신 자리였습니다
그곳에는 빛나는 옷이 없었습니다.
찬사도 없었습니다. 확인도, 하늘의 음성도 없었습니다. 있는 것이라고는 — 조롱이 있었고, 침묵이 있었으며, 피와 땀과 버림받은 자의 절규가 있었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 외침을 우리는 어떻게 들어야 합니까.
신앙의 붕괴처럼 들립니다. 불신앙의 비명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외침은 시편 22편에서 온 말입니다. 포기의 언어가 아니라, 전통 안에서 드리는 기도의 언어입니다. 하느님이 느껴지지 않는 그 자리에서도, 하느님을 향해 부르짖는 것
정제되지 않고, 가공되지 않은, 영혼의 가장 솔직한 자리.
골고타는 하느님이 부재하신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가장 깊이 현존하신 자리였습니다. 다만 그 현존은 우리가 기대하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권능으로 내려오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함께 버림받으시는 하느님. 고통을 제거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고통 안으로 걸어 들어오시는 하느님. 이것이 십자가 신학의 심장입니다
빛이 꺼진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빛이 땅속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간 자리였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기도가 살아 있고, 말씀이 움직이며, 하느님이 가까이 느껴지는 타볼의 자리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감사하십시오.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감사하십시오.
그 빛을 충분히 받으십시오. 그 체험을 부끄러워하지도, 의심하지도 마십시오. 하느님이 당신에게 당신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 그곳에 초막을 짓지는 마십시오.
그 빛은 당신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을 통해, 당신 밖으로, 당신이 아직 가보지 않은 어두운 골목으로 흘러가야 할 빛입니다.
은사는 은총의 증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명의 시작입니다. 체험은 도착이 아니라 파송(派送)입니다.
아니면 지금 골고타의 자리에 서 있습니까.
기도가 공허하고, 침묵만 돌아오며, 하느님이 먼 곳에 계신 것 같거나, 혹은 아예 계시지 않는 것 같은 — 그 자리. 믿음이 의심스럽고, 삶이 무너지는 것 같고,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이 모두 빠져나가는 것 같은 — 그 자리.
그렇다면 바로 그 자리가 예수가 먼저 걸어가신 자리라는 것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신보다 앞서, 당신이 느끼는 그 어둠을 먼저 통과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거기 계십니다.
당신이 느끼지 못하더라도, 그분이 거기 계십니다. 느낌은 진실의 척도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우리의 감각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그 어둠 안에서 아직 부르짖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신앙 안에 있는 것입니다. 부르짖음 자체가 믿음입니다. 대답이 없는 기도를 계속하는 것, 그것이 신앙의 가장 용감한 형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5.
오늘 그리스도교는 너무 많은 초막을 짓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체험을, 자신의 확신을, 자신의 공동체를 벽 삼아 세웁니다. 타볼의 빛을 소유하고, 분류하고, 지키려 합니다.
"우리만이 옳다"고, "우리만이 하느님을 제대로 안다"고, "우리의 신앙만이 진짜다"고 — 그 초막 안에 머물며 세상을 향해 문을 닫습니다.
그러나 빛은 갇히면 사라집니다. 빛은 흘러야 삽니다.
예수가 보여주신 영광의 방식은 우리의 것과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그분의 영광은 높아짐이 아니라 낮아짐이었습니다. 지배가 아니라 섬김이었습니다. 축적이 아니라 비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움 — 케노시스 — 의 끝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새벽이 열렸습니다.
상처가 증거가 되다
부활은 골고타를 지워버리지 않았고 부활은 골고타가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시작되는 새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활의 몸에는 여전히 못 자국이 있었습니다. 창에 찔린 옆구리가 있었습니다. 토마스는 그 상처에 손을 넣어야 했고, 그 상처를 만지고서야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상처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상처가 증거가 되었습니다.
고통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고통이 사랑의 깊이를 드러내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 상처의 흔적은 당신이 사는 역사일 수 있고, 당신이 도저히 자신을 수용할 수 없는 당신의 죄와 당신의 허약함이 노출된 당신의 실존적 체험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역설입니다. 가장 깊은 상처가 가장 강력한 증언이 됩니다. 가장 어두운 자리가 가장 찬란한 빛의 근거가 됩니다.
당신이 지나온 상처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숨겨야 할 수치가 아닙니다. 지워야 할 흔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그 안에서 일하셨다는 흔적입니다. 당신의 골고타가 있었기에, 당신의 부활은 깊이를 가집니다. 골고타 없는 부활은 값싼 희망입니다.
그러나 골고타를 통과한 부활은 —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생명입니다.
당신은
타볼에서 받은 빛을 붙드십시오.
그러나 그 빛 안에 머물지는 마십시오.
그 빛을 들고 내려가십시오. 눈물이 있는 자리로, 상처가 있는 자리로, 혼자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사람 곁으로. 그 사람이 당신의 가족일 수도 있고, 이웃일 수도 있고, 거울 속 당신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빛은 머무는 것이 아니라 흘러야 합니다.
사랑은 안전한 곳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확신은 보호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통과해야 하고, 생명은 보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어야 완성됩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 자체로 남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 그 말씀이 타볼에서 골고타로 향하는 길의 이름입니다.
그렇습니다,
타볼에서 골고타로.
골고타를 지나 부활로.
이것이 예수의 길이었고, 이것이 우리가 초대받은 길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저는 타볼산예수 곁에 초막을 짓고 그 빛속에
살고 싶어 사제의길을 선택 했습니다. 그러나 초막은 지어지지 않았고 , 그 산에서 ,나는 내려와야 했습니다.
그분의 섭리를 저는 너무나 늦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이끄심은
강요가 아니였습니다. 초대였 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이 길로 끌고 가시는 분이 아니라, 이 길을 먼저 걸으시고 — 돌아서서 — 손을 내밀어 부르시는 분이셨습니다.
그 길 위에 하느님의 심장이 지금도 뛰고 있습니다.
당신과 나를 위해.
당신 안에서. 내 안에서
당신과 함께. 나와 함께
영원히 뛰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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