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혜 시평

신작시 조명-자아통합에 대한 열망/ 고명수

주혜1 2026. 2. 25. 22:21

우리는 어릴 때 초초 양육자와의 2차 관계 속에서 전능성을 경험하며 행복한 시간을 가진다. 그러나 젖을 떼면서 탯줄을 잘린 이후 두 번째 상실을 경험한다 냉혹한 현실 속으로 들어가면서 최초의 행복한 시간을 깨어지고 지속적인 상실을 경험하면서 인간은 성장해 간다. [애도와 우울증]이라는 논문에서 프로이트는 상실로 인한 슬픔을 애도하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고통이 우울증이라 하고 그것은 모든 에너지를 내면에서 소진하게 만든다고 했다. 

상실을 경험하며 유년기의 전능환상은 대부분 깨어진다. 냉엄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내면의 공백을 확보할 때 우리는 조금씩 자유를 얻게 된다. 언어라는 상징계 안으로 들어오며 겪게 되는 거세는 빈 공간을 만드는 하나의 기제이므로, 거세로 인한 좌절이 현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내면의 공백을 마련할 수 있다. 이러한 심리적 가상공간은 인간을 사물 그 자체의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게 해 준다.

 

물도 곳에 다라 몸을 바꾸니

그리 녹록한 삶은 아닐 터

그래서 무지개로 변신하듯

나도 때때로 몸을 바꾸고 싶다

무지개가 되고 싶다

 

물속에 얼굴을 파묻고 소통을 시도한다

숨이 차오른다. 몸이 바뀌는 중인가

이명耳鳴이 요란하다

-[때때로 물이 되어 흐르리] 부분

 

위의 시에서 화자는 수도꼭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바라보며 "물처럼 살고 싶다"라고 새로운 삶을 희구한다. 이는 화자의 삶이 무언가 막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막혀 있는 현실은 딱딱하고 굳어 있다. 화자의 "얼굴"이 굳어 있다고 인식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화자가 바라는 바는 흐를수록 부드러워지는 유연한 물줄기와 같은 삶이다. 화자가 그 물줄기를 만지고 그 흐름에 얼굴을 맡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화자의 삶이 이렇게 딱딱하게 굳어 잇고 막혀 잇는 것은 생각이 많고 소통이 어렵기 때문이다 물이 '생각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듯이 화자도 생각을 멈추고 '곳에 따라 몸을 바꾸'는 물처럼 유연하게 살고 싶다.. 하지만 물이 '무지개로 변신하듯' 몸을 바꾸는 일, 즉 존재를 전환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숨이 차오르고 이명이 요란하다.  이번 소시집에 발표하는 시에 유난히 자주 등장하는 표상이 이명이라는 하나의 증상이다. 이러한 증상은 욕망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타협의 산물, 즉 타협형성물인 동시에,  실재가 상징계에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증상에는 좋은 증상과 나쁜 증상이 있다. 예술가에게 이러한 증상은 문화적인 창조행위와 연결되기 때문에 좋은 증상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마음의 빈 공간을 경이롭게 사용하여 자신만의 이야기를 창조해 내는 것이 예술가의 사명이다. 시인에게 그것은 표상으로 나타난다.

 

흰 붓끝이 되어 눈부시게 흔들린다

막 가라앉기 시작하는 검은 시간들이

붓끝으로 몽땅 끌어올려져 하얀 시간이 되어 

검은 캔버스에 쌓인다

어두운 내 시간도 꺼내 그의 붓끝으로 던져버렸다

하얗게 채워지는 희망의 숫자들

하얀 나비 떼가 검은 캔버스에 가라앉자

하얗게 드러나는  숫자, 숫자들

마침내 그가 붓을 놓는다

비로소 완성되는 다가오는 시간.

                     -[시간을 그리는 남자] 부분

 

사람은 자신의 시간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시인은 온전한 자신만의 시간을 창조하기 위해 시를 쓴다. 항상 타인의 시간 속을 방황하던 햄릿이 마침내 " 나는 덴마크의 왕자 햄릿이다"라는 자각에 이를 때 비로소 참된 자신의 시간에 살 수 있었다. 위의 시에서 화자는 " 검은 시간"에서 " 하얀 시간" 으로의 변신을 꿈꾸고 있다." 무한소멸"을 그린 화가인 로만 오팔카를 매개로 하여 화자는 자신의 "어두운 시간"을 "그의 붓끝으로 던져" 버린다. 흑과 백의 시각적 효과가 두드러지는 위의 시는 예술 작품과의 동화를 통하여 희망과 통합의 시간을 꿈꾸는 화자의 내면을 잘 드러내고 있다. 시의 이미지들은 상처의 흔적을 재구성한다. 상실의 장소에서 반복적으로 생산되는 보상으로서의 희열은 '고통스러운 쾌락' 혹은 영원히 만족시킬 수 엇은 욕망을 추구하는 데서 발견되는 역설적인 만족이다.

 

글렌굴드가 연주하는 파르티타 6번

어둡고 염세적인 분위기가 흐르는 납골당에서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하고 간 이들에게

'나자로야 일어나라 '했던 예수처럼

그들을 불러 깨우고 싶다

...중략...

이미 생의 지도에서 점점이 사라진

그들 운명의 표지를

이제와 눈물로 바꾸려 하는 나를,

신이 더 이상 허락하지 않은 나를,

글렌굴드의 애절한 선율이 다듬어준다.

        -[파르티타 6번] 부분

 

인간의 삶은 상실의 연속이다. 부친을 잃은 햄릿은 긴 애도의 시간을 거치고 나서 자신의 시간을 되찾고 자신의 이야기를 했을 때 비로소 성숙한 자아에 도달할 수 있었다. 햄릿이 간절하고도 절실한 독백을 통해서 자신을 애도해 나갔듯이 시인들이 시를 쓰는 행위 또한 삶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상실의 슬픔에 대한 애도의 행위로 볼 수 있다. 앞의 시에서 로만 오팔카의 그림을 매개로 했다면, 위의 시에서는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파르티타라는 음악을 매개로 하여 필멸(必滅)의 존재인 인간의 운명과 상실에 대한 절절한 애도의 감정을 서술하고 있다." 그리움으로 무너진 가슴뼈를 보여주며" 슬퍼하는 화자를 위무해 주는 것은 음악이라는 예술이다. 문학과 음악과 미술을 망라하는 예술이라는 지식은 오랜 기간 동안 인류가 창조해 온 '대타자의 주이상스'이며, 대부분은 '주인기표의 개입'에 의해 이루어진 것들이다. 시인의 폭넓은 인문학적 소양에 의해 인간의 보편적인 꿈과 슬픔에 대한 애도는 보다 풍요로운 이야기를 창조해내고 있다.

 

다이어리를 작성하다

컴퓨터 앞을 잠시 떠나면

물방울들이 급히 몰려와 경호를 한다

색색의 물방울이 부딪쳐도 소리하지 않고

산란産卵의 구슬로, 사랑의 눈망울로

흐르는 강물소리 가득하다

그 모습에 우쭐한 나는

종종 작업을 멈추고

김창열 화백의 시그니처 뒤로 숨는다

구시화문口是禍門, 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

공空은 색色, 색色은 공空으로

방울방울 점 하나하나 

나를 꿰둟고 지나간다.

 -[물방울] 전문

 

"바위나리처럼 숨어' 울던 화자는 이제 '색색의 물방울이 부딪쳐도 소리하지 않"는 시간, "산란産卵의 구슬"로, "사랑의 눈망울로 흐르는 강물소리 가득"한 행복과 평화의 시간에 도달한다. 색과 공이 둘이 아닌 완전한 원의 형상을 한 물방울의 시간, 그것은 곧 상실을 털어내고 부질없는 허상을 떨쳐내고 마음속의  거리와 공백에 도달하는 시간, 온 천지에는 진정한 나, 즉 '참나' 밖에 없는 궁극적 실재의 시간, 진공묘유(眞空妙有)와 진아(true self)의 시간일 것이다. 이제 화자는 내면의 시간에서 벗어나 바깥으로 걸어 나온다.

 

그대 있음에

나 향기로워지네

햇살도 기운을 차려

동동동 굴러다니고

나뭇가지 사이

바람도 산책을 나와 

새들에게 길을 열어주네

나그네처럼 그 길을 걸어

구름이 말을 걸어오네

그대 있음에 나 가벼워지네

맑아지네 작은 새처럼

종종종 노래 부르고 싶네.

     -[이팝나무 아래에서] 전문

 

위의 시에서 화자는 자신만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즉자(卽自)의 세계에서 비로소 의식적 존재자가 자기 안에 대상적 존재를 간직하여 그것에 관계하는 대자(對自)의 세게로 나아감을 확인할 수 있다. 물아일체와 상즉상입(相卽相人)의 시간, 자연의 희열로 인해 생명이 약동하는 세계. 베르그송이 [창조적 지니화]에서 언급한 바처럼 생명은 전체로서 하나의 거대한 물결과도 같은 시간에 이른 화자의 진솔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대 있음"으로 인해 내가 "가벼워지"고, "맑아"지는 치유와 구원의 시간에 도달하여 노래 부르고 있는 화자를 발견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시인의 언어 표상을 분석함으로써 그의 영혼과 내면 풍경을 파악해졸 수 있었고 시인의 꿈과 무의식적 소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