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혜 1 시집 [때때로 산이 되어]
삶을 감싸 안기 그리고 하나 되기
신덕룡 (문학평론가, 광주대 교수)
1.
시인이 한 해에 한 권의 시집을 내는 예는 매우 드물다. 한 해에 시집 한 권 분량의 시를 쓰기도 힘들거니와, 대부분의 시집이 기왕에 발표되었던 시를 중심으로 엮어진 것임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이는 한 권의 시집이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적 여유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 시간적 거리는 시인에게 있어 정신적 변화과정의 한 단계를 포함한다. 새삼스럽게 시간적 여우를 운운하는 것은 신인의 첫 시집의 의미를 생각해 보기 위함이다. 신인에게 있어서 첫 시집은 변화과정이 아닌 앞으로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는 데 의미가 있다. 데뷔 이후 첫 시집 사이의 시간적 거리는 시인으로서의 그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기간에 해당된다. 우리는 여기서 데뷔 이후 그간의 작업결과를 평가하고, 시의 방향을 예견할 구체적인 단서를 찾게 된다. 이런 점에서 김주혜의 첫 시집[때때로 산이 되어]은 시인 자신에게 있어서나 독자인 우리에게 있어 상당한 설렘으로 다가온다. 이 설렘은 새로운 시 앞에서의 흥분으로 인한 즐거운 떨림이다. 더욱이 90년[민족과 문학] 가을호에 [스트레스로 등단한 그가 데뷔한 지 1년 정도 지나 다시 한 권의 시집을 우리에게 내놓는다는 것은 시에 대한 녹록지 않은 자세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주혜 시의 가장 큰 특징은 그가 대지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시세계를 열어간다는 것과 극히 일상적인 하찮은 일에서 발견하는 삶의 진실을 탁월하게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자의 경우는 <때때로 산이 되어>가 도시적 삶에 바탕을 둔 시나, 민중적 삶을 노래하는 시와는 달리 전통적인 서정에 바탕을 두고 시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삶에 대한 내성적 관찰에 집중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후자의 경우는 그의 시가 구체적 현실에 뿌리를 내린 견고한 구조를 바탕으로 전개될 것임을 예견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이 두 가지 측면을 중심으로 그의 시를 살펴보자.
2.
<때때로 산이 되어>에 수록된 많은 시편들은 자연과의 교감이나 자연의 일부로서의 삶이 주는 기쁨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여름이 간다
빗물에 흔들리는 가지
가지 끝에 하늘이 모인다
하늘은 날개를 달고
긴 침묵으로 기다리고 있다
종이 되고 싶었다
땅속 깊숙이 흩어진
숨겨진 불씨의 이야기
뿌리마다 털어내어
까만 눈빛으로 알알이 박힌
소리하지 않는 악기가 된다
닿는 대로 휘어잡는 가지 추스르며
허리 굽은 가지 사이
흐르는 향기로 남는다.
-열매 전문
위의 시는 자연의 오묘한 섭리 속에서 빚어지는 생명현상을 놀라운 이미지의 변용을 통해 노래한다. 이 생명현상은 [빗물에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일어난다. 가지 끝은 하늘이 모이는 공간이며 침묵 속엔 [종이 되로 싶었던] 소망과 [땅속 깊숙이 흩어진/ 숨겨진 불씨의 이야기]가 내포되어 있다. 내적 성숙의 계기로서의 침묵이고 잉태된 생명이 결실로 다가가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거쳐 [소리 나지 않는 악기]가 되고 향기로 전환된다. 여기서 시인의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단적으로 나타난다. 시인은 자연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속에 들어가 생명의 변화과정에 참여하고자 한다.
자연과 나 사이에 어떠한 틈새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일체를 향한 그의 시심은 다음과 같은 일체감의 세계를 보여준다.
(ㄱ). 그때 나는 그의 눈빛 저 너머로 자줏빛 불기둥을 보았다.
그 빛이 부챗살처럼 퍼지며 나의 온몸을 불태웠다.
나는 내 타버린 살점들을 그의 가슴에 묻으며
오랫동안 닫혀 있던 결빙의 문을 열었다
초록으로
< 때때로 산이 되어 바라보는 까닭> 10-15행
(ㄴ) 나는 왠지 자꾸 허기가 졌다.
목이 말랐다. 목마른 사과나무가 되어
그늘진 빛 사이 바람의 숨결을 듣는다
피리소리도 들려왔다
손가락 마디마다 푸르른 즙액이 튀었다
목소리, 작은 목소리들이 들렸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가을, 사과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6-12행
(ㄱ) 시에서 보듯 겨울은 더 이상 죽음의 계절이 아니다. 얼음과 추위와 눈보라로 모든 생명의 죽음을 보여주고 있던 겨울은 계절의 겉모습일 뿐이다. 오히려 겨울은 봄을 준비하는 계절이고, 얼음 속 깊숙이 생명의 씨앗을 틔우는 계절이다. 시인이 [눈빛 저 너머]에 존재하는 생명의 큰 움직임을 보고, [결빙의 문을] 여는 것은 자연의 숨겨진 이치를 밝혀냄으로써 가능하다. 자연의 이법에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노력은 한걸음 나아가 자연과 나의 일체화로 나타나기도 한다.
(ㄴ)의 시가 자연과 나의 일체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편이다. 여기서 시인은 자연과의 교감 속에 얻어지는 생의 기쁨을 보여준다. 이 기쁨은 자연의 풍요로움에서 온다. 어머니인 대지의 품에서 성장에의 욕구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갈증은 자연의 생명력을 받아들이려는 욕구이기도 하다. 여기서 화자는 돌연 한 그루의 사과나무가 된다. 나와 사과나무와의 동화현상은 생명이 지님 온갖 비밀을 스스로 체험하는 관점이 된다. 이 신비 체험의 순간은 [아무도 없었다]라는 절대적 상황으로, [바람의 숨결]과 [피리소리]를 듣는 고요에서, 또 스스로 [프르른 즙액]을 지닌 나무가 되어 있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따라서 완전한 일치를 통한 환희는 성숙의 기쁨으로 나아간다. 나와 바다와 하늘..... 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고, 이 움직임의 결실로서의 사과가 새로운 존재로 눈앞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요즘과 같은 혼탁한 세상에 자연을 자연으로 바라보기도 힘들다. 맑은 햇살과 흘러가는 구름,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빛, 숲 속을 가로지르는 청량한 바람 그리고 결빙의 상태에서 시작되는 생명의 신비로운 변화..... 이를 바라보고 자연과의 교감을 맛보는 일조차 먼 과거의 기억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김주혜는 이를 바라보고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는 데서 나아가 [담 넘어 내미는 덩굴의 손](봄을 위한 교향시)을 잡으면서 스스로 자연의 이루가 되어 신비로운 생명현상의 비밀을 맛보려 한다.
3.
김주혜 시의 또 다른 특징으로 우리는 일상에서 얻는 삶의 진실을 탁월하게 형상화하는 그의 노력이다. 일상적인 삶의 조각에서 숨겨진 진실을 발견해 내는 능력도 능력이거니와 그의 장점은 구체적인 사물이나 삶 속에 들어가 펼쳐내는 상상력의 놀라운 힘에 있다. 그의 대표적인 시를 보자
섬진강산 물고기 한 마리를 욕조에 풀어놓았다
놈은 낚싯바늘을 입에 꽂고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튕겨져 나온 회색빛 눈망울을 굴리며
부르튼 입술로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놈은 함성을 지르고 싶은 것을 참고 있음이 분명했다
비틀거리면서도 내 손을 거칠게 뿌리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내버려 둔다( 제깐 놈이 별 수 있으려고?)
놈은 미친 듯이 속력을 낸다
내 눈은 똑같은 속도로 따라간다
놈은 마치 꺾을 수 없는 냉정함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것 같다
내가 다가가자 놈은 다시 사나운 기세로 몸을 떨며
물밖으로 튀어 오른다
완전히 지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다(너와 나 모두)
[스트레스 전문]
대부분의 물고기는 추울 때를 제외하고 넓은 물속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살아간다. 물고기에 세 있어 물과 그 속에서의 유영은 필수적인 삶의 조건이다. 이 조건이 마련되지 않는 한 물고기의 자유는 없다. 낚시에 걸려 욕조 속에 갇힌 [섬진강산 물고기] 역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물고기의 자유를 향한 몸부림은 [비틀거리며 내 손을 뿌리치고] [미친 듯이 속력을] 내기도 한 절망적 몸짓이다. 사실 자유의 의미는 자신이 자유롭다는 것을 위식 하는데서보다는 자유를 얻는 과정 속에 있다. 문제는 [내버려 둔다](제깐 놈이 별수 있으려고?)와 [기다리기로 한다(너와 나 모두) 사이의 심리적 변화이다. 이 변화의 과정엔 절망이 도사리고 있다. 물고기를 내 맘대로 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닫힌 세계를 인식하고, 결코,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으로 인한 체념이다. 거부하고 극복하려는 움직임조차 불가능한 [완전히 지칠 때]의 절망은 현실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향한 최소한의 행위도 불가능한 순간의 절망, 이는 물고기에서 발견하는 인간 적 삶의 모습일 터이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물고기의 자유를 향한 몸부림을 인간적인 삶의 하나로 변화시키는 것에서 나타난다.(너와 나 모두)가 닫혀 있는 세계 속에 존재한다는 세계인식이 그것이다.
사물에서 인간적 의미를 찾아내고자 하는 시인의 애정은 사물에 존재의미를 부여하는 것에서 또, 하찮은 일 속에 숨은 삶의 진실을 밝혀내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나는 외면하리라
차라리 튀어 오르리라
입술에 조소를 띄우며
평생 지워지지 않을 거드름으로
내 오만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뜯어내리라
결코, 스스로는 열지 않던 단단하고 매끄러운
내 위선의 껍질을 깨보이리라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거든
뭄전체를 열어, 온몸의 수액을
거품처럼 쏟아 굳히리라
<팝콘>10-19행
한쪽 귀가 풀어진 챙
마름질은 끝나 있었다
풀어진 귀속으로 어제가 꿰이고
그곳은 매듭을 만들면서 한 땀 한 땀 떠가는
내 앞에 빈터를 연다
몸속에 자리하고 있을 잠들지 않은 꿈
말없이 감추며
한올의 흩어짐도 허용치 않는 걸음 위로
아이의 눈썹 같은 길이 눕는다
매듭이 생기기 전에 떠나야 했다
실꼬리에 걸려 넘어지며 다가서는 기억들
이제 , 머리 끄덕이며 감싸자
기다리지 않아도 지나가는 바람
돌아보면, 다진만큼 곧고 반듯한 길로
내 아이들이 달려오고 있다.
<바늘이 만드는 길> 전문
위의 시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으로 사물에의 인격부여가 될 것이다. 인격부여는 생명이입이다. 이로써 팝콘은 새의 의지를 지닌 존재가 된다. 팝콘에서 생명체로의 전환- 이는 극한 상화에 처해 있는 존재의 생존의지로 나타난다. 주어진 조건에서 절망하기보다는 시련을 이기고 스스로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겠다는 의지는 극기의 정신으로 확대된다. 수동적이기보다 자기를 버림으로써 자신을 지키겠다는 태도로 구체와 되는 것이다. [몸 전체를 열어, 온몸의 수액을/ 거품처럼 쏟아 굳히리라]는 존재의 자기실현이란 모든 생명체의 공통된 소망이리라. 그 소망은 극기와 시련을 통해서 얻어진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아래의 시는 일상적 삶의 행위에서 발견되는 삶의 진실을 보여준다. 주부에게 있어 바느질이란 평범한 일상의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바느질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바늘이 한 올 한 올 떠갈 때마다 거기엔 삶의 의미가 깃들어 있다. 지난날의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잠들지 않은 꿈]을 확인하는 작업이 되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념들을 거쳐 이루어내는 삶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다. [다진만큼 곧고 반듯한 길로/ 내 아이들이 달려오고] 있음을 확인하는 삶에 대한 새로운 의미가 그것이다.
이와 같은 시편들은 단순하면서도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서 상상력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 이러한 행위들이 엮어내는 삶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보여준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평범하고 단순한 행위에서 범상치 않은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이러한 시편들은 김주혜의 시편들에서 보이는 또 다른 특색이기도 하다.
4.
김주혜의 시는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그 개성은 자연을 자연 그대로 바라보고 삶의 의미를 자연과의 교감에서 찾을 수 있는 깨끗한 영혼과 삶에 대한 진한 애정에서 온다. 이 두 가지 요소는 호 탁한 세상을 스스로 정화해 가면서 삶의 의미를 만들어가려는 그의 노력에 기본적인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시는 밝고 건강하다. 밝고 건강한 시의 표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삶에 희망과 기쁨의 부분이 넓고 깊게 자리한다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이러한 믿음 위에서 삶의 의미를 탐색해 가는 그의 시는 언제나 활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물론 그의 시 몇몇 편에서 감상적인 부분이라던가 긴장이 풀어진 모습 자기도취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편들 중 가장 빛나는 부분 대지적 상상력에 뿌리를 둔 자연과의 교감 그리고 삶을 감싸안는 그의 태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울러 [기다림을 멈추고/ 눈을 들어/ 가까운 것들을 사랑하리라](근시)는 그의 말고 같이 좀 더 가깝고 구체적인 삶에서부터 멀리 퍼져가는 그의 시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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