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도덕과 복음의 경계 /조광호신부

주혜1 2026. 3. 7. 00:16

도덕과 복음의 경계

      — 무엇을 사랑이라,
      자비라 해야 하는가

1.
내 인생의 맨토가 되셨던 구상 선생님께 존경과 칭찬을 드리면  선생님은 늘 웃으시면서 *이보게
우리, 서로 쳐다 보며 칭찬 하면 바보가 되네.하고 농을 건네 셨다.

존경과 칭찬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서로를 향해 칭찬 만을 주고받는 관계는 진실을 말하지 않는 침묵의 자기 기만이나. 모의가 될 수 도 있다.

오늘 우리는 서로 만을 쳐다 보는 짝지은 이기심을 사랑이라
착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위로이기 이전에 서로를 더 큰 진리로 부르는 용기다.
서로의 눈에만 갇힌 사랑은
하느님을 잃은 사랑이다.

그것은 타자를 초월로 열어 두지 못하고 서로를 우상으로 만든다.

우상이 된 사랑은 결국 자기 자신을 숭배하게 된다. 결국 그 숭배는 자기 자신을 감옥으로 가두게 된다

참된 사랑은
서로를 향해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더 높은 선(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사랑이 우리를 더 넓은 책임과
더 깊은 진리로 이끌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의 이름을 한 자기애에 불과하다.

2.
탈무드는 황새를 ‘하시다’라 부른다. 경건한 자라는 뜻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제 식구를 극진히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라는 그 황새를 부정한 새로 분류한다. 이유도 단순하다. 제 식구만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 황새에게 사과를 청한다
황새여,미안하다
괜히 상처받지 말라.
너는 너 답게 살았다.

다만 이 우화는
너를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울타리를 사랑*이라 부르는
인간을 위한 이야기다.

황새야 너는 둥지를 지킨다. 그러나
인간은 둥지를 넘어설 때 만이
참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탈무드와 토라에 나오는
이 짧은 역설은 오늘 우리 시대를 겨눈다.

경건은 무엇인가.
신앙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랑은 어디까지 가야 사랑이라 불릴 수 있는가.
사랑은 본능에서 시작된다. 가족을 보호하고, 혈연을 지키고, 자기 진영을 방어한다. 생존의 차원에서는 자연스럽다.

3.
확장되지 못한 사랑은 본능이다.
본능은 죄가 아니지만, 그것이 곧 사랑의 완성은 아니다.

그래서 성서는사랑이 경계를 넘는가, 아니면 경계를 강화하는가를 묻는다.
황새는 따뜻하다. 그러나 닫혀 있다.
그의 사랑은 울타리 안에서만 순환한다.
울타리 바깥의 타자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다.
그 순간 사랑은 덕이 아니라 배타가 된다.
히브리어 ḥesed—자비, 신실함, 언약적 사랑—은 선택된 집단 안에서만 머무르는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성품을 닮은 확장성이다. 하느님의 자비는 의인과 악인에게 동시에 비를 내리신다. 태양은 편을 가리지 않는다.
경건은 정서가 아니라 방향이다.

사랑이 어디로 향하는가,
누구까지 포함하는가,

거기에서 경건의 진위가 드러난다.
오늘 정치의 언어는 사랑을 말한다.

“국민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 국민은 늘 특정한 국민이다.
자기 지지층, 자기 이념, 자기 진영.
보수는 자기 전통을 사랑하고,
진보는 자기 정의를 사랑한다.

그러나 서로를 향한 자비는 없다.

사랑이 진영 내부의 결속으로만 작동할 때, 정의는 선택적으로 적용된다.
타자의 고통은 침묵 속으로 밀려난다.

사랑과 자비란 말이 넘쳐나는 종교라도
끼리끼리 서로 쳐다보는 사랑은
황새처럼 경건해 보이지만,
자기 울타리 만을 신성화하고 있는
종교는 세상에 위험한 집단이 될 수있다.

설령 어느교회공동체가 자기교인 만을 사랑하고, 공동체는 내부를 돌보고
헌금과 봉사, 연대와 기도는 울타리 안에서만 뜨겁고. 교회 밖의 타자를 향해 열려 있지 않다면,
그 경건은 집단 이기심과 다름이 없는 것이 되고
그것이 도가넘치면 교회도 다른 간판을 단 악덕 기업이 될 수도 있다.

예수는 경계를 넘었다.

사마리아인과 식탁을 나누고,
로마의 백부장을 칭찬하며,
십자가 위에서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했다.
십자가는 내부 결속의 상징이 아니다.
끊임없이
경계를 해체하는 사건이다.

케노시스(자기 비움)는
자기 편을 강화하는 힘이 아니라
자기 울타리를 허무는 용기다.

참된 윤리는 보편성의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칸트의 정언명령은 묻는다.
“네가 따르려는 원칙이 모두에게 적용되어도 괜찮은가?”

모두가 자기 편만 위한다면,
세계는 분열의 총합이 된다.
트럼프의 MAGA가 위험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사랑은 확장될 때만 윤리가 된다.

확장되지 않은사랑은 철옹성
이기심이 될수있다.

오늘 우리는 불안의 시대를 산다.
AI가 일자리를 대체하고,
경제는 양극화되고,
전쟁과 기후 위기가 세계를 흔든다.
불안이 클수록 인간은 더 작은 울타리로 숨는다.

이 현상이 이시대의 최대 난관이 될것이 분명하다

가족, 민족, 교회, 이념으로자기들 끼리 끼리
편가르는 독점 이기심은 참혹한 화를 불러 올 수
잇다. 그러기에 역설적으로
불안의 시대일수록 사랑은 더 넓어져야 한다.

경건은 안전을 지키는 기술이 아니라
자기 경계를 허무는 모험이다.

황새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그러나 그 질문은 잔혹할 만큼 정직하다.

나는 누구를 사랑하는가?
그리고 나는 누구를 사랑하지 않는가?
내 사랑의 반경은 어디까지인가.

울타리를 넘지 못하는 사랑은 도덕일 수는 있어도
복음은 아니다.

복음은 경계를 넘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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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각은  성성진 신부님의 작품이다.그는 조각을 한번도 배워보지 못했지만 타고난 조형감각으로 열린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