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10여년 만에 다시 교단에 선 내가 느낀 교실풍경은 마치 낯선 곳에 온 듯한 충격을 받았다. 예비종, 시작종이 울리고 난 후 선생이 교실에 들어와 섰는데도 아이들은 자리에 앉지 않고 큰소리고 떠들고 몰려있다. 기다리면 한이 없을 것 같아 드디어 자리에 앉으라고 말한다. 한두 마디 해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교탁을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면 그제서야 마지못해 자리에 앉는다. 더욱 한심한 것은 점심시간 이후의 교실바닥이다. 그야말로 환경오염의 현장을 방불케 한다.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휴지, 빵봉지, 반찬, 밥풀덩어리...심지어는 침까지 뱉는 아이도 있다. 주번을 불러 대충 청소를 시킨 후에 수업에 들어가면 족히 20분은 지난다. 알차게 나머지 수업을 한다고 해도 25분밖에 안 되는데 잡담하거나 장난하는 아이, 이런저런 주의를 주고나면 정작 수업시간은 얼마 안 된다.
아이들은 한시도 입을 다물지 않으려 한다. 아마도 열린교육이 아이들의 입부터 열어놓았나 보다. 예전 아이들은 대답하는 소리 좀 들으려면 속이 터졌는데 지금 아이들은 한 마디 하라면 열 마디 스무 마디를 한다. 그만 하라고 하기 전까지 쉴 새 없이 하는 아이도 있다.
바닥에 떨어진 휴지를 주우라고 하면 점수 주냐고 반문한다. 아니라고 하면 자기가 버리지 않았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머리통 한 대 쥐어 박히고 나서 마지못해 투덜대며 줍기는 하나 눈을 찢어져라 흘기고 가버린다.
이건 교육이 아니라 순전히 전쟁이다. 그러니 교재 연구보다 어떻게 하면 흥미있는 수업을 할까? 졸지 않고, 잡담 안 하는 신나는 수업이 될까? 하는 구상이 교재연구보다 더 힘들다.
수행평가 점수내기란 또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다. 많게는 50%나 반영하는 수행평가 점수는 대부분 책읽기가 차지한다. 확실한 자기 재산이 될 수 있기에 강제성을 띄면서까지 읽히고 있으나 글자가 많은 글은 통 읽으려 들지 않는다. 이미 초등학교 시절에 읽었어야 할 책들도 안 읽은 아이들이 수두룩하다.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과 구리 료헤이의 '우동 한 그릇'은 내가 아이들에게 제일 먼저 선정해 주는 교과서적인 소설이다.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으며 손쉽게 읽히는 것이기에 읽기를 권하면 순순히 듣는 아이는 불과 2,3 명뿐이다. 매일 채근을 해도 전체 삼분의 일 정도밖에 안 된다. 급기야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한다. 상을 준다, 점수를 깎는다. 담임선생님께 알린다. 부모님께 전화한다..별별 방법을 다 써보아도 배짱 좋은 놈은 안 하고 만다. 선생이 지치기를 기다리는 아이들 같다.
꿈과 미래에 대한 설계를 글로 쓰게 하면 천편일률적으로 황금색 융단을 깔거나 아니면 미래는 설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되는 대로 살아가는 거라고 자포자기식이다. 무슨 짓을 해도 돈만 많이 버는 것이 최고란다. 나이트크럽 사장이 꿈이고,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변덕스런 사회에서 힘들게 살아간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학교에 다니는 것도 비전이 있어서가 아니라 대학에 가기 위한 요식 행위란다. 대학도 부모님이 가야 한다니까 간단다.
우리 아이들이 왜 이렇게 병이 들었을까? 한 반에 6,70 명이었던 예전의 아이들은 선생님의 말씀이라면 이의를 달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따랐다. 35명으로 줄여서 학습 효과를 극대화시킨 요즘의 교육현실이 과연 그 효과를 거두고 있는지.....허기야 요즘 아이들을 6,70명씩 지도한다는 것은 힘에 부치는 일일 것이다.
사회가 너무 시끄러운 것도 한 원인이라고 보겠다. 자극적인 얘기들, 충동적인 사건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매체들, 온갖 유혹들이 산재해 있는데,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며 책 읽는 시간을 요구하는 자체가 잘못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차근차근 쌓아올리는 탑이 아닌 하루아침에 불쑥 올라가는 아파트시세만큼이나 빠르게 변하는 현실 앞에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라는 것이 과연 먹혀 들어갈 리가 있을까? 미래라는 막연한 사실보다 눈에 보이는 확실한 현실에서 더 빠른 결론을 내리려는 것은 아닐까?
이런저런 원인을 분석해 봐도 정답은 나오지 않는다. 물질적인 뒷바라지만이 최선의 답으로 알고 있는 부모, 그들의 생활도 버겁다. 생활비에, 아이들 학원비에, 용돈까지 충당하려면 부모들도 여간 바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에게 정신적인 뒷바라지까지 운운하며 바란다면 지쳐 쓰러지고 말 것이다. 정신적 뒷바라지라는 거야 자식들이 부모들의 삶을 바라보는 그 자체이지 특별히 어떤 것을 해 주어야 하느냐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열심히 사는 것만이 자식들에게 본이 되지 않겠느냐는 거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고서야 잘못 살았다는 후회와 누굴 위해 힘든 삶을 살아야 했나 하는 허탈감에 빠져 급기야는 우울증에 걸리는 주부들도 있다고 한다. 이렇듯 물질이 가져다 준 공허감은 응집력을 잃고 모래알처럼 겉돌기만 한다.
물론, 모든 아이들이 다 그렇다면 우리의 미래는 암담하겠지만, 그래도 순수성을 잃지 않은 아이들이 있어 우리 교사들은 일당백이라는 심정으로 심혈을 기우려 가르치려 한다.
다행히 지금 아이들에겐 자신과 용기 그리고 활달함이 넘친다. 그 점이 사랑스럽다. 공부에는 관심이 없어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는 목숨을 걸 자세다. 특히 연예인들 얘기가 나오면 그보다 더 박사가 없다는 식의 해박(?)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공부를 그렇게 하면 일류대학을 왜 못 가겠는가? 그러나 그런 모습이 귀엽다. 든든하기까지 하다. 무엇에라도 살아있는 정신이 있다는 것만으로...
해서, 내 수업 방법도 그 보조에 맞추기로 했다. 그래, 너희들이 반짝하고 눈 떠 있는 상대를 이용하자. 꿈을 길로 바꾸고 g.o.d의 '길'과 장나라의 '고백' 가사를 프린트해 나눠주고 함께 노래 부르며, 가사에 나온 내용의 문제점을 토론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길에 대해, 자신의 사랑에 대해 적어보자고 했다. 자기의 길이 무언지도 모르고 방황하지 말고, 자신의 꿈이 이루어질는지 불안해하지도 말고, 진실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용기있게 고백 할 수 있는, 솔직하고 진지한 인생을 설계해 보라는 주문에 많은 아이들이 향상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아이들의 태도에도 자신이 붙었다. 구태의연한 교습방법만을 고집한 내가 어리석었음을 느꼈다. 덕분에 나는 신세대 선생이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요즘도 아주 가끔씩 나를 찾아오는 옛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다. 그들은 그 시절 내가 읽힌 책이 인생의 전부라는 말을 하면서 왜 그 때 더 많은 책을 읽히지 않으셨냐고 곱게 눈을 흘긴다. 그럴 때마다 나는 교사로서 참 잘 살았구나 하는 보람에 젖곤 한다.(용곡중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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