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글라라의 묵주

주혜1 2006. 11. 21. 10:09

글라라의 묵주

                                                                      김 주 혜 비비안나



내 주머니 속에는 팔각형으로 깍아 만든 하얀 상아 묵주가 늘 들어있다. 영세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레지오 입단을 권유하며 최 글라라 자매가 선물로 준 묵주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내게 왜 줄까? 잠시 생각했으나 누구에게나 주기 좋아하는 그녀였기에 무심히 받아 서랍 속에 넣고는 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갑자기 하느님 곁으로 떠날 채비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해 까마득히 잊고 있던 그 묵주를 꺼내 성모상 앞에 놓았다. 워낙 믿음이 굳건하였고, 그녀 만큼 하느님 사업에 적극적이며 열성적으로 동참한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기 에 곧 일어날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했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도 쉽게 하느님 곁으로 갔다. 죽음은 남의 일이 되면 그렇게 쉽게 잊혀지는지 젊은 나이에 죽은 그녀가 안 됐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을 뿐이고, 묵주는 여전히 성모상 앞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한밤중이었다. 옆에서 자고 있는 남편의 신음 소리에 잠이 깬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남편은 가슴을 움켜쥐고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손과 발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서둘러 응급실에 눕혀 놓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신을 찾는 일 뿐이었다. 검사하는 의사들의 표정을 살핀 나는 두려움에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이 사람을 위해 무엇을 했던가. 하루 세 끼 밥해 주고 빨래해 준 것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살기 위해서도 해야 할 일 아니었던가. 평소에도 건강하지 못한 그를 위해 나는 아무 것도 해준 것 같지가 않았다. 마음조차도 편하게 해주지 못했다. 툭하면 화내고 투정부리고 짜증을 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를 쓰면서도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속에서 오만하게 살았다는 생각으로 부끄러움이 앞을 가렸다. 이 사람이 쓰러지면 나는 어떻게 될까 생각하니 아득했다. 집이며 마당, 어느 공간 하나도 그 의미를 잃고 있었다. 나라는 존재조차도 의미가 바래가고 있었다. 기둥이며 하늘이라는 낱말의 의미만 크게 부각되었다.

 

 어느 말도 어느 누구의 손길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가 없는 공간이란 마치 무덤 속처럼 고요할 뿐이었다. 나는 평소에 남편만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왔다고 믿었었기에 더욱 기가 막혔다. 서로의 인격을 믿으며 부딪치는 일은 될수록 피하면서 각자 자신의 카테고리를 만들어가며 사는 것을 긍지로 삼았었는데 그것이 모두 잘못된 일이며, 그를 이렇게 아프게 한 원인이 된 것 같아 한없이 가엾고 불쌍해서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지난 세월 동안 나는 무엇을 위해 달려왔는가, 무엇을 위해 그토록 나의 길이라는 것에 집착했는가. 후회되지 않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울고 있는 나를 꼭 안아주는 아들에게서도 위로를 얻지 못했고, 그 아들들도 짐으로 느껴져 무거웠다.

 

 왜 그때 글라라가 생각났을까? " 형님 주려고 성지에 가서 사왔어." 그래, 54일 기도를 드리자. 글라라가 준 묵주를 집어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성껏 묵주알을 돌렸다.

그러나 남편의 검사는 길어져만 갔다. 연이은 금식과 주사바늘은 남편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하여 그는 차츰 모든 걸 포기하려 했다. 짜증을 부리고 자신을 학대하였다. 심지어는 보조침대에 누워 새우잠 자는 나까지 미워하였다. 내가 두려워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내 일생에서 이루어지는 이 모든 일들이 하나의 법칙처럼 느껴져 암담해 왔다. 기도도 떠있는 것처럼 무력할 뿐이었다. 생활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극과 극을 향해 치달았다. 한없는 고독과 연민, 그리고 긴장된 시간의 연속....... 그러다, 갑자기 증발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난 아무것도 누리고 살지 못한 것 같았다. 내 또래 친구들 중 가장 비참하게 살아온 것 같고, 남편이 나를 위해 해 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만 같았다. 마음 고생, 몸 고생은 얼마나 했으며 따뜻한 말 한 마디 들어본 것 같지 않았다. 남들은 돈 한 푼 벌지 않고도 압구정동에서 옷만 잘 해 입더라. 그러나 그런 것 하나도 부러워하지 않았고, 열심히 살다 보면 박수받을 날 있겠지 하며 개미처럼 일하며 올바르게 살아왔는데 이제 살 만하니까 아파서 병수발까지 시키다니, 내가 좀 편한 꼴을 못 봐요 못 봐. 어이구 내 팔자야. 설움이 북받쳐오르고 미움이 쏟아졌다.


그러나, 진통제를 두세 번 놓아도 남편의 진통은 멈추지 않았고, 열도 떨어지지 않는 날이 계속되자 나는 다시 불안해졌다. 슬그머니 남편의 목에 묵주를 걸어주었다. 눈도 뜨지 못하며 괴로워하던 그가 얼마만에 일어나 목에 걸린 묵주를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당장 빼버릴 줄 알았는데 의외다 싶었다.

 

 그 날 문병 온 동료들에게 남편은 목에 걸린 묵주를 보여 주며 어떻게 아픈지 눈도 뜰 수 없을 정도였는데 고통이 사라져 일어나 보니 목에 묵주가 걸려 있더라는 말을 농담처럼 하며 웃었다. 그 웃음을 보는 순간 나의 행복은 저 사람의 웃음 속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신비롭게도 그는 건강을 되찾아 가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하여도 나는 내 주머니 속에 있는 묵주의 힘을 믿고, 나의 행복을 믿는다.

 

 수도자들이 기도로서 살 듯, 그러한 방법들을 이용해 살아갈 것이다. 지난 시간들을 보상하기에는 나의 덕이 너무 적었다. 겹겹이 쌓여 소리없이 흐르고 있는 마음의 찌꺼기들이 새로운 갈망을 잉태하며 휴식의 시간을 가져다 준 것이라 생각하자.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위선을 하였나. 내 시 속에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현명한 체, 행복한 체, 그리고 깨끗한 체.......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가 나는. 결국 내 자신을 속이며 더 많은 욕망을 원하다 가소롭게도 죽음 앞에서, 그 죽음이 두려워 결국 신을 찾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내가 내 자신으로 있는 것 그것이 고향이고, 행복이라 하지 않았던가. 아무튼 나는 신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작은 행복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가톨릭 다이제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