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혜 시평

일탈된 감흥을 즐기는 언어의 집 /주경림

주혜1 2006. 11. 29. 22:01
10년 동안 자리 잡힐 대로 잡힌 봉분을 파헤치기로 했다. 背山臨水 左靑龍 右白虎 누가 봐도 명당자리에 아버지집을 짓고, 잊을 만하면 들러 술 석 잔 뿌리고는 효녀인 양 살다가 죽을 듯이 삶에 지칠 즈음 아무래도 이 팔자가 꼬인 것은 명당값도 못하는 조상탓인 것 같아 아버지집을 허물기로 했다. 한 삽 한 삽 퍼올리는 동안 시간의 켜를 허물고 나는 아버지를 따라가겠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10년 동안 아무도 몰래 흘린 눈물로 온몸이 흠뻑 젖은 채 오들오들 떨고 계신 아버지를 붙들고.
―김주혜, 「億丈」

‘억장’(億丈)은 사전적 의미로 ‘매우 높음’의 뜻으로 억장지성(億丈之城)의 준말이라고 한다. ‘억장이 무너지다’라고 흔히 쓰는 표현은 몹시 분하거나 슬픈 일이 있어 가슴이 무너지는 듯하다는 뜻으로 그렇게 애써서 쌓은 성이 무너졌으니 공들여 해온 일이 쓸모가 없어져 몹시 허무한 상황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김주혜 시인의 「億丈」에서 언어는 시에서 표현 이상의 의미를 지님으로써 독자의 영혼을 뒤흔드는 듯한 파장이 긴 여운을 오래도록 남긴다.
명당값도 못하는 조상탓에 아버지 봉분을 파헤치기로 했다는 시 작품의 동기가 옛속담에 ‘잘 되면 제탓, 못 되면 조상탓’ 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정서에 큰 호소력을 지닌다. 또한 ‘잊을 만하면 들러 술 석 잔 뿌리고는 효녀인 양 살다가’ 라는 자기 고백에는 아픈 데라도 찔린듯 공감하게 된다. 진정으로 돌아가신 이를 위함이라기보다 다분히 허례허식적인 우리의 삶의 실상이기 때문이다. 다음 구절인 ‘이 팔자가 꼬인 것은 명당값도 못하는 조상탓인 것 같아 아버지집을 허물기로 했다.’에 이르면 좀 지나치지않나 하는 생각과 함께 봉분을 파헤치는 데 공범자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시, 「億丈」의 매력은 바로 자기 합리화를 적당히 시키가면서 시의 제단에 자신을 희생양으로 받쳐 솔직한 언어로 독자들을 차츰 자기쪽으로 끌어들이는 데 있다. ‘한 삽 한 삽 퍼올리는 동안 시간의 켜를 허물고’에서는 극단으로 치닫던 화자의 생각도 무너진다. 세속적인 욕망은 힘들고 지치게 하는 고통의 시간 속에서 인간의 내면에 교묘하게 감추어진 이중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아버지를 따라가겠다는 발버둥에서 시는 절정에 오른다. 자기 합리화가 얼마나 그릇된 것인가 하는 반성은 감정이 격해지면서 발버둥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10년 동안 아무도 몰래 흘린 눈물로 온몸이 흠뻑 젖은 채 오들오들 떨고 계신 아버지’의 모습은 또한 얼마나 무죄(無罪)한가. 이승을 떠났어도 도움을 주려고 했던 아버지의 사랑도 어쩔 수 없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힘 같은 것이 느껴진다. 아버지를 붙들고 발버둥치는 화자의 모습은 비극적인 만남이지만 가장 밑바닥까지 간 절망 너머의 삶을 뜨겁게 끌어안았으니 다시 일어서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져보아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