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혜 시평

물이 되어 다시 만나기/ 이창화

주혜1 2006. 11. 29. 21:55
김주혜는 비밀처럼 구원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혼자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흉칙스런 동물에게서도 구원 요청받는 것을 거부할 수 없어하고 심지어는 금방 회를 쳐 먹어야 하는 물고기에게도 살아날 구멍을 찾아주고 싶은 열정을 버리지 못한다. 그러다가 자신의 손목에 추를 달고 모든 동작을 멈추게 하는 어떤 강력한 힘 앞에 도전하게 된다. 그 앞에서 그는 자신의 미약함을 깨닫고 눈을 지그시 감는다.
시 「푸코의 추」에서 조금은 어렵게 만난 푸코는 그 앞에 절대자로 나타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그에게 나쁜 것을 가져다 주었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모든 것을 초월하기 위한 연습이라고 여기면 어떤 역경도 달갑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시인은 그와의 만남이 짧은 시간이었음에 감사한다. 그러나 그것을 참아내고 난 뒤에 오는 기쁨 또한 아주 잠깐인지도 모른다고 조금은 섭섭해한다.

쥐어뜯고 할퀴어서 상처투성이가 된 나무
옹이마다 각각 다른 곳을 응시하며
칵칵 비명을 토해내는 나무
부들부들 다리를 저는 나무
우왁우왁 소리를 질러대는 나무
-「속죄양」

이렇게 나무들은 비밀처럼 자신들의 고통을 호소하고 있고 어떤 빛은 그 안을 들여다보며 그 나무마다의 아픔을 치료해 주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장 먼 길로 돌아서 가야하는 자신의 길을 힘겹게 들여다본다.
이 땅은 어쩌면 시인이 바라는 갈망을 쉬이 줄 수 없다고 버티는 심술쟁이들로 가득 차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비우고 비워도 이미 오염된, 감염된 정신의 소유자들 속에서 자신만이 전혀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해도 혼자서는 갈 수 없는 어떤 목적지를 향해 시인은 먼 길을 택한다. 「지구가 아프다는데」에서처럼 시인이 바라는 것은 아주 작은 애정의 표시다. 계속 그런 아쉬움과 섭섭함이 쌓이는 사회적 통념을 돌이켜보는 것도 때로는 우리가 너무 쉽게 인간의 존엄성을 외면하는 게 아닐까 하는 반성이 아쉬운 세상에 살고 있지나 않은지. 너무 급하게 지름길만을 찾는 사람들과는 달리 먼 길을 택하는 시인의 담담한 내면을 들여다볼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