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혜
처녀좌를 출발하여 사파이어
그 푸른 빛의 사슬을 따라갔다
좀생이별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새순처럼 돋아나고 있는 별무리들을
한점 한점 획을 그으며 따라갔다
사다리꼴의 별들이 자리를 떠나고
꼬리별이 어둠을 가로지른 지 얼마되지 않아
황금색의 일등성 별 하나가
사자후를 터뜨리며 멈추었다
멈춘 거기,
거꾸로 매달린 채 떠 있는 별자리가 있었다
긴 사슬에 얽혀 불목하니로 살아가는 내 별자리
나를 자꾸 뒤돌아보게 하며
떨며, 서성이게 하는
유난히 추워보이는 저 별이
언제쯤 저 사슬을 끊고
먼 과거로부터의 굴레를 떠나
푸른 별숲의 함성을 껴안을 수 있을까
오늘밤도 나는 별여행을 떠난다.
그를 위한 속죄의 삶
살아 있다는 것은 가슴을 부서지게 하는 과정이고, 부서질수록 가슴은 커져서 더 큰 우주를 안을 수 있는 가슴을 만들어 간다고 한다. 빗물, 강물, 눈물 그리고 삶 등 모든 흐르는 것들은 아름답다. 그러나 늑골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아침에 일어나 얼굴을 만지면 손바닥 가득 눈물이 묻어나는 삶을 결코 아름답다고 하지는 못하리라.
세월이 가면 잊혀진다는 그 거짓말을 믿고 싶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그리움은 가슴에 쌓여 더욱 두껍게 자리를 잡고, 건드리기만 해도 뜨겁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콸콸콸 흘러 온몸을 적신다.
인생을 다른 무엇과 조금씩 바꾸어 나갈 때 인생의 참의미를 갖는다면 나는 이 커다란 상실과 과연 무엇을 바꾸었을까. 매일 매일이 그와 바꾼 삶, 그러나 이미 의미를 상실한 시간의 흐름인 것을…. 사람들은 이제 그만 기억 속의 그를 지우라고 한다. 그러나 내 가슴에는 이미 지울 수 없는 파일로 그가 남아, 그와 함께 지낸 추억들을 반추하는 힘으로 남은 생을 살고 있음을 어쩌랴.
붉은 와인을 마시면 사랑을 하고 싶다. 그리움의 정점에서 지적 허영심과 애정결핍증을 풀어줄 사내를 만나 붉은 열애에 빠져 익사하고 싶다. 종교까지 같으면 하느님이 보내주신 위로자임이 분명하니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근사할 것 같다. 무책임하게 떠난 그에게는 보기 좋게 복수하는 것이 되니까. 외로움이 바이러스처럼 잠복해 몸부림치기 직전에 숙명적으로 만나, 마치 사랑으로써만 내 상실을 치유할 수 있는 것처럼 나는 열광할 것이니 그 사내는 분명 행운아일 것이다. 차디찬 이성이여, 칼날 같은 맥을 끊고 나를 펄펄 끓게 만들어다오. 내일은 없고, 오직 오늘만 있는 내게, 흘러간 세월 이상의 붉은 기운으로 그대의 심장을 녹여주리니…
그러나, 이 무슨 아이러니일까. 그가 있을 때는 남의 남자들이 더 크게 보였다. 멋진 연애하는 시도 썼다. 내 가슴을 가리키며, “이 속에 들어 있는 누군가가 궁금해” 라고 말할 정도로 리얼한 불륜의 시, 바람난 여편네 시를 신나게 써댔다. 무관심한 우리 남자에게 여봐라는 듯이 시위도 할 겸. 그러나 웬걸, 그는 “시는 시일 뿐, 시로만 볼 뿐이야” 하며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뭐, 이런 오만이?"
그러던 중 「오늘밤도 별여행을 떠난다」란 시가 그 해 좋은 시로 선정되었다. 나름 뻐기며 자랑하자, 무관심으로 일관해 오던 그가 뜻밖에도 자기가 보기에도 그 시가 제일 잘 썼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미련하게도 그의 손바닥 안에서 팔팔 뛰고 있었던 나를 발견하고는 그 앞에서 더 작아질 수밖에 없는 나를 발견하고는 허탈했었다.
그러나, 모두 내숭이다. 슬프다, 외롭다, 아프다 하면서도 해를 넘기며 잘 살아 있는 걸 보면 내 아픔은 순전히 내숭이 아니고 무엇이랴. 죽을 듯이 보고 싶을 때면, 눈물 뿌리며 달려가 무덤 앞에 선다. 펑펑 울다가 지치면 욕바가지를 쏟아붓는다.
“나 잘하고 있지?”
지금 그는 어둠 속에서 그가 제일 좋아하던 나의 시 「오늘밤도 나는 별여행을 떠난다」을 떠올리며 밤하늘을 바라보리라. 그리하여 곧 이승에서의 불목하니 사슬을 끊고, 황금성의 사자후를 터뜨리며 어둠을 가로질러 편안한 안식을 취하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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