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사랑
-임을 부르는 물소리, 그 물소리
김주혜
오세영님의 17번째 시집 “임을 부르는 물소리, 그 물소리” (랜덤하우스)가 새롭게 선보였다. 시인은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에서의 인간 존재의 고뇌를 철학적으로 노래한 기존의 시의 틀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눈으로 우리 국토 곳곳을 훑어 내려가며 독립운동을 하듯 어루만지고 있다.
여행이 취미인 오시인은 국내에 가보지 않은 곳이 드물 정도이다. 이번 시집은 ‘아메리카 시편’(1997), ‘시간의 쪽배(2005)’ 이후 남의 땅을 살펴보며 내 국토사랑에 대한 열정을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될 사명감으로 쓰고 있다. 공간시집으로는 세 번째가 되는 이번 시집 ‘임을 부르는 물소리, 그 물소리’를 펴내면서 시인은 “내 오욕의 한 생을 너그럽게 받아줄 국토에게 내 이제 할 수 있는 한 아름답고 순결한 모국어를 바칠 것”이며, “이 땅에 보답할 일은 바로 성스럽게 노래해 바치는 것뿐”이라고 겸손하게 그러나 장엄하고도 단호하게 소감을 밝힌 바 있다.
그 강렬한 변이 각인되어서인지 시집 첫 장을 펼쳐 ’서시‘를 읽는 순간 가슴부터 뛰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지난날 그 어려웠던 시절, 남의 땅이 된 내 나라 국토를 지키려 우리네 피 끓는 시인들은 그 얼마나 많은 시어들을 쏟아냈던가. 남의 땅이 된 국토의 恨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며 독립의 의지에 목숨 걸었으며, 급기야는 절필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가 꽃을 부르면 꽃이 되고/ 그가 구름을 부르면 구름이 되고/그가 인간을 부르면 인간이/사랑을 부르면 또 사랑이 되었나니/ 수 천 년 /이 신성한 땅의 주인들은...(노래하리라)’
서시를 읽으니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 버린다.....” 의 시구가 절로 연상되면서 마치 윤동주님을 만난 듯, 박두진님, 이상화님이 살아난 듯 국토사랑으로 덩달아 가슴이 떨려온다.
‘너는/ 하늘로 흐르는 강./ 이 땅엔 더 이상 물길이 없어,.../ 아, 이제는 땅을 빼앗겨/물조차 빼앗기겠네./ 잃어버린 국토를 두고/ 누굴 찾아 어디로 가란 말이냐. (두만강)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그렇게 지켜낸 내 국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지켜오고 있는가? 산과 강은 또 잘 있는가? 사적지, 유적지는? 그 분들이 지켜낸 본래의 모습을 지닌 산과 강은 아닌 것 같다. 온통 부스러지고 깎여지고 오염되고, 길이 되고 건물이 들어서고……. 새삼 부끄럽고 미안하다. 아마도 시인은 그러한 모습들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그래서 서둘렀을 것이다.
‘분단 60년,/나무, 바위조차 등을 돌린 휴전선에/ 봄이 오다니...../ 오로지 남북을 오가는 너 하나/ 민족의 양심으로 흐르는/ 예지의 강아.(임진강)
‘산은 산이고/물은 물이되 인간은/인간이 아니로다./ 자연에 기대 살며/자연에 맞선 인간의 그 표리부동이 /얼마나 가증스럽다 하겠는가.(소록도)’
그동안 국토에 대한 기행적 형식의 시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 시집은 최소한 이 땅에 태어난 시인들에게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가를 일깨우는 계기가 되며, 시인으로서의 자긍심마저 들게 한다.
‘한국인이 한국의 자연은 왜 시로 노래하지 않느냐’ 라는 의문이 생겨 ‘시로 써 보자’ 라는 의지로 쓴 오 시인은 시인협회장 일을 보면서 “시의 날(11월 1일) 하루 만이라도 주요 건물과 가정에서 오방색의 시 깃발 달기”를 제안한 것을 보더라도 오시인의 애국심과 시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알 수 있다.
오 시인은 이 시집에서 백두산을 필두로 강, 섬, 구릉, 사적지며 유적지 등을 두루 섭렵하면서 마치 도를 닦듯 노래하며 모든 산하를 일으켜 세워, 잊혀져가는 골짜기도 깨어나 기지개를 펴는 듯하고, 오염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던 강들도 생기를 얻어 흐를 것만 같다.
‘출가한 납자처럼 / 이 풍진 세상을 등지고 홀로/ 의연히 순결을 지키는 삶이여/ 하늘을 사모하는 마음이/ .../몸은 항상 흰 구름을 데불고 있구나/(한라산)
‘아름다움의 궁극엔 황홀이, 황홀의 궁극엔/ 열반이 있을지니...../ 참선하는 수좌의 얼굴을 본다/ 능단금강반야바라밀경이던가/ 마하연을 거스르는 물소리..(금강산)
모두 108편의 산하를 노래하였는데 왜 하필 108편일까? 우연일까? 아닐 것이다. 시인은 108배 아니, 팔만사천 배 하는 심정으로 편 편마다 보시의 품을 판 것이다. 시인이 세상 108곳을 돌아다니며 어디 즐거움만 있었으랴.
‘...사는 길이 막막하다고/ 가는 길이 외롭고 고단하다고/ 걱정하지 마라..../하늘 아래 태백이 있거늘/무엇이 답답하고 또 두려우랴.(태백산)
108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거늘 108번뇌를 뜻하는 숫자를 택하여 참회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라 하면 안 될까? 참회란 얼마나 무서운 결심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인지 시인은 잘 알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번뇌의 개념인 108이라는 숫자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6가지 감각기관 眼, 耳, 鼻, 舌, 身, 意(눈, 귀, 코, 혀, 몸, 마음)로 설명된다. 이 6근과 만나는 대상이 6경 色, 聲, 香, 味, 觸, 法(색깔, 소리, 향기, 맛, 촉감, 원리)이라 하며 이 6근과 6경의 36가지 번뇌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걸쳐 모두 108가지의 번뇌를 일으킨다는 것이 간단한 백팔 번뇌 내용이다. 어디 번뇌가 108개뿐이겠는가. 물론 숫자는 상징적 표현이겠지만, 번뇌는 우리들 마음의 표현으로 겉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대개 마음속에 잠재하고 남아 있다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드러난다는 것이 팔만사천 번뇌라고 하지 않던가.
‘휘적휘적 대관령 올라/ 흐르는 흰 구름 바라보나니/지난 한 생이 욕되고 부끄럽구나./ 풀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어찌/ 티 없이 살지를 못했던가.(대관령)
흙이 되기 위해 깨지는 모순의 그릇처럼 한 생을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점(정년퇴임)에 흙(그릇)을 노래하듯 국토를 그리며 이 세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일깨우고 있다. 곁에 있는 귀한 자연을 돌아보고 지나온 삶을, 앞으로 올 삶을 위해 영혼을 맑게 하고자 오염된 산하를 안타까워한다.
‘부끄러워라/ 오염된 강물 위를 떠도는 네/아름다운 죽음이여./ 나 오늘 을숙도에 너를 묻으며 / 병든 지구를 위해 한 줄기/ 눈물을 쏟는다.(을숙도)
시인은 일찍이 깨진 그릇을 시작이요, 끝이라 하지 않았던가. ‘시작의 눈뜸이 바로 끝의 깨짐과 한몸을 이룬다.’ 는 그 공간과 허공의 자리에서 내 나라 국토를 장엄하게 노래하며 이미 산과 강의 경지를 넘어섰다. 자신에게 이익 되는 일은 삼가고 오직 無貪의 경지, 無瞋의 자비, 無痴의 지혜로 가벼워지고 있다. 무릇 사람이 한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지은 적이 없고, 악의로 비평한 적이 없으며, 업신여긴 적도 없으며, 영문도 모르고 모욕을 당하거나 헐뜯기고 손해를 입고 산 적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어찌 되었건 간에 사람의 근본적인 마음으로 들어가 번뇌의 부추김에 가벼워질 수만 있다면 몸과 마음이 모두 평온해질 것 아닌가.
‘나 자신을 버려/ 존재가 가장 가벼워진 사람들/....몸과 마음이 바람보다 더 가벼워진 까닭에 / 새처럼 하늘을 날면서 산다.(청학동)
‘죽으면 내 육신 땅에 묻지 말고 ...../ 어머니께 효도 한 번 한 적이 없나니/ 이 죄 많은 육신 그대로 풀섶에 내던져 방치해 다오./(사량도)
정년을 뒤로 한 60대 중반을 넘어선 시인은 국토 예찬의 시로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모든 사람들의 눈을 자연으로 되돌리며 단순한 기행시가 아닌 도시의 소음에 찌든 영혼들에게 외경의 마음으로 다가가 아름답고 순결한 우리의 언어로 접근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귀향본능이 있다. 결국 고향에 대한 동경을 우리 국토에 대비하여 서경적 제시에 주관적 해석을 담아 국토사랑의 욕구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번 시집은 시인을 한평생 시인으로 길러준 국토이며, 죽어서 다시 돌아가야 할 국토에 바치는 헌사이며 앞으로 이런 시집을 2-3권 더 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번 시집으로 하여 더욱 선명해진 우리의 산하며 역사적 사적들이 시인의 다음 시집에는 건강하게 선보였으면 하는 바램이며, 시인의 제안처럼 시청 앞 거대한 시벽이 마련되어 이 땅의 시인들이 노래한 우리 국토사랑 노래가 나부끼게 될 날을 기다려 본다. -08 문학과 창작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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