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나의 시 이렇게 고쳤다.

주혜1 2008. 3. 23. 00:19
<나의 시 이렇게 고쳤다>

벼랑 끝에 서서

김 주 혜

한편의 시와 만날 때 나는 그것이 <정서의 자발적인 흘러 넘침>만이 아닌 비유와 암시성, 그리고 다의성이 투명하게 전달되어 올 때 즐겁다. 더욱이 내가 쓴 시가 다른 이에게 그렇게 전달된다고 생각하면 그 행복감은 어디에 비할 건가!
시작과정에 들어서면 언어와의 전쟁은 시작된다. 그러나 처음 마음 먹은 대로 시가 흘러 주는 것은 아니다. 내 의도와 시의 흐름과의 괴리가 생기면 생길수록 시는 관념적, 추상적으로 불투명해지고 그 전달력은 점점 잃고 만다.
마음에 드는 한 편의 시가 어디 그리 쉽게 얻어지랴. 연유로 퇴고라는 그 고통의 과정을 거쳐야 하지 않겠는가.
벼랑 끝에 선 기분! 두드려 맞은 시를 앞에 놓고 어떻게 일으켜 세울까 고심하며 시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의 내 심경이 바로 그렇다. 시와 내가 한몸이 되지 않았을 때의 그 막막함이라니, 차라리 귀찮은 몸, 벼랑 아래로 던져 버리 듯 시를 던져 버리고 자유롭고 싶다. 그만큼 퇴고가 어려운 일이며, 숫제 다시 쓰는 게 훨씬 쉬운 일이라는 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러기에 난 아예 시의 소재를 발견하면, 펜을 잡기 전에 얼마동안을 머리 속에서 굴리는 습관이 있다. 이러한 내 습관을, 한 친구는 과작이라고 좋게 말해 주지만 실은, 퇴고하기 싫어서 손쉽게 쓰여질 것만을 골라 쓰는 나쁜 습관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 시의 대부분은 퇴고의 노력없이 한두 번에 나온 것이라 시의 완성도가 그만큼 떨어진다고 하겠다. 그러기에 '나의 시 이렇게 고쳤다' 이 란을 쓸 만큼 기발하게 고쳐 쓴 작품도 없고, 초고 역시 남아있는 게 없어 미뤄오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벼랑 끝에 서서야 쓴다.
생활 속에 갇혀 나를 잊고 사는 날이 허다한 어느 날 우연히 과학 실험 실습 책을 뒤지다가 현미경으로 양달개비 속의 염색체 수며 세포의 모양까지 샅샅이 들여다 보는 눈을 보고 시로 만들어 보고 싶은 유혹을 받았다. 프레파라트 안에 갇힌 양달개비는 나로 보였다. -양달개비의 어린 꽃봉오리를 핀셋으로 헤치고 - 를 첫줄로 하여 어렵지 않게 한 편의 시를 얻었다.

양달개비를 위해

양달개비의 어린 꽃봉오리를
핀셋으로 헤치고
그 안의 꽃밥을 조심스레 따냈어...................①
슬라이드 글라스 위에
작은 꽃밥의 이마며 입술이며
목에 와 닿는 바람의 감촉까지
조용히 애무하듯 몸을 뉘었지.........................②
그 때부터 나는 작아지기 시작했어
이미 진드기,톡토기,털진디 들에게..................③
내 살과 피, 그리고 뿌리까지
모두 내주었었지
그것도 모자란지 지난 늦봄
날카로운 해부침으로 터뜨려
프레파라트 안에 가두어 놓고는
그 속의 작은 염색체 수까지
헤아리는 거였어.................................................④
처음, 마이크로미터를 소중히
다루는 손동작에 감동해
한생애를 맡긴 내 믿음에
문제가 있었던 거였지
드디어
노랗고 불투명한 내 이성이
폭발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한 번도 퇴고하지 않은 채 급하게 동인지에 실렸다. 그러나 득의만만하던 나는 후에 활자화되어 나온 시를 보고 구성상의 미흡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 부분 부분 언어화하는 과정에 많은 미스를 발견하였고 뒤늦게 성형수술의 메스를 들었다.
첫째, ①행과 ②행에 주체의 혼돈을 들 수 있겠다. 두 행은 서로 다른 주체이나 구별이 애매하여 마치 두 행이 다 시적화자인 것처럼 읽히고 있다.
양달개비는 내 정신의 복제이니 시적화자는 관망하는 구조로 시작해야 할 것이었다. 드러나 있지 않은 '그' 를 밖으로 끌어내어 첫머리에 놓았다.

-그는 양달개비의 어린 꽃봉오리를
핀셋으로 헤치고
그 안의 꽃밥을 조심스레 따냈어.

이렇게 하고 보니 좀더 구체적이면서 생생한 현장감이 있어 선명해진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내친 김에 감정이 너무 노출된 흥분상태도 완만하게 하고, 함축적이지 못한 점도 보완하는 의미를 고려하여 리듬을 타기로 하였다. 연을 가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임은 부연할 필요가 없겠다. 하여, 위 3행을 첫연으로 하였다.
그리고 둘째 연 시적 화자의 능동상태(몸을 뉘었지)를 피동상태 (몸을 눕히더군)로 바꾸었다.

- 조용히 애무하듯 몸을 눕히더군.

그런데 이것봐라, 묘하게도 야한 냄새가 풍기는 게 아닌가. 이왕지사 분위기까지 연출해 보리라 마음먹고 3연 마지막 부분에 몸동작을 적어 보았다.

- 그 때부터 나는 작아지기 시작했어
내 살과 피, 그리고 뿌리까지
샅샅이 더듬어대고 쓰다듬더군.

둘째, 쓸데없는 전문용어 (해부침, 프레파라트, 마이크로미터)의 남발이다. 유식(?)을 과시하려다 오히려 시의 질을 저하시키므로 모두 삭제하였다.
이대로 시가 진행되면 역시 싱거워지고 말겠지? 이쯤해서 전환의 장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시키는 대로 가만히 순응하고 있던 시적화자가 시니칼하게 등장하고, 급기야 그는 <갇힌 걸 깨우치고> 반항하는 것으로 시의 절정을 이루어 놓았다. 반항할 때 수다스러우면 역효과! 지나치게 설명적이며 쓸데없는 구절들도 버리기로 한다.

급기야
나는 내가 갇힌 걸 깨우쳤어
내 안의 작은 염색체 수까지 헤아리는
눈빛에 나는 질리고 말았어

셋째, 설명적이며 감정의 무절제로 깔끔하지 않은 부분(진드기 톡토기, 모두 내주었었지, 그것도 모자란지 등)도 모두 삭제하였다. (③행과 ④행 사이) 그리고는 <내 믿음에 문제가 있었던 거였지> 하고 과거를 회상하며 자조적인 미소까지 띄운다. 아까워 끌어안고 있던 행들을 과감히 빼버리니 절제된 미인을 본 것 같아 개운했다.
넷째, 공감적이지 못한 마지막 서술부분 (노랗고 불투명한 내 이성)의 부정확성이다. 내 딴에는 꽃밥이나 꽃가루의 날림 등등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었으나 그것은 나만의 생각에 그치는 의미 전달의 무리였다. 뒤늦게 철이 든 양달개비가 큰 소리로 외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였다. <나는 내가 아니야. 나는 갇혔어! > 마지막으로 제목 바꾸는 것은 당연한 일. [갇힘에 관하여].

갇힘에 관하여

그는 양달개비의 어린 꽃봉오리를
핀셋으로 헤치고
그 안의 꽃밥을 조심스레 따냈어.

슬라이드 글라스 위에
작은 꽃밥의 이마며 입술이며
목에 와 닿는 바람의 감촉까지
조용히 애무하듯 몸을 눕히더군.

그 때부터 나는 작아지기 시작했어
내 살과 피, 그리고 뿌리까지
샅샅이 더듬어대고 쓰다듬더군.

급기야
나는 내가 갇힌 걸 깨우쳤어
내 안의 작은 염색체 수까지 헤아리는
눈빛에 나는 질리고 말았어.

처음, 너무도 소중히 다루는 데 감동해
한생애를 맡긴 내 믿음에
문제가 있었던 거였지.

나는 더 이상 양달개비꽃이 아니었어
나는 내가 아니었어.

나는
갇혔어.


이렇게 한바탕 피비린내 나는 수술을 끝내고 위와 같이 정리해 보고 나니 와!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게 아닌가.
좋은 작품이 반드시 좋은 의도에서 나온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끊임없이 소재를 찾아 메모를 하고 또 돌아다니기도 하지만 감지한 사실을 어떻게 인식해서 제 3자에게 전달하는가 하는 것은 그 시인만의 독자적인 권리라고 하겠다. 여기에 해석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어쩌면 의도적인 요식행위가 아닐까. 그럼에도 그 해석적 의미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하루에도 여러 번 죽었다 깨어났다 하니 아직도 습작기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자신의 느낌을 짧고 함축적인 언어로 어떻게 구체화하느냐, 그 구조적 결합을 어떻게 연관시키며, 수사의 한계는 또 어떻게 정하느냐 하는 일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내가 쓴 시임에도 어떻게 쓰여졌으며 왜, 어떻게 고쳤는지 분석하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마치 수학문제 답을 거꾸로 검산하는 느낌이다. 왜 답을 얻게 되었는지 알아내지 못하면 컨닝한 것밖에 되지 않겠는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시씀네 하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역시 글쓰기란 확실한 것까지 의심해 보는 작업의 하나임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문학아카데미 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