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공방일기-부모님 / 리디아 수녀

주혜1 2008. 4. 7. 20:42
공방일기-부모님(1)
리디아 04-04 11:42 | HIT :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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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부모님(1)
하루는 술이 잔뜩 취한 혜진, 혜수 아빠가 전화를 합니다.
“야, 이 시발년아, 애들이 공부방 다니는데 왜 집을 나가?
개같은 년, 어떠케 가르쳤길래 말이야, 엉?“
혜진이가 또 출가를 하셨나 봅니다.
“죄송해요, 제가 잘 못가르쳐서 그런가 봐요.
그런데 집을 나가면 안된다고는 했어요.
나가더라도 빨리 들어와야 된다고 했죠오...
쫌만 기다려 보세요. 들어오겠지요. 아참, 그 녀석이 왜 또 그랬을까?“
그러게 공부방을 다닌지가 꽤 오래 되었는데도 습관처럼 집을 나가곤 합니다.
오죽 속상했으면 꼭지가 돌도록 술을 마시고 나에게 욕을 해댈까
5학년 딸이 그리 일찌기 자주 출가를 하면 누구에게 하소연을 해야하나
참으로 가슴이 팍팍하고 답답할 일입니다.

혜진이는 공부방 생기기 전에는 공부방에 있을 시간에 늘상 밖에서 지냈습니다.
동생 혜수와 진석이, 진희, 서희 등 여러 명이 전철을 타고
경마장도 가고 찜질방도 가고 돈이 없으면 전철에서 벌어 쓰곤 했습니다.
집에 있으면 술마시는 아빠와 글모르는 엄마가 시키는 일을 합니다.
설거지, 빨래, 술-담배-라면 온갖 심부름....
그 어린 나이에 따뜻한 물도 안나오는 쪽방에서
설거지와 빨래를 하는 혜진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래서 공부방에 오면 공부한다는 핑계로 집에 늦게 들어가라고 시킵니다.
집에 가면 얼마나 괴로울지 상상이 갑니다.
혜진이에게는 집보다 밖이 더 편하고 더 자유로울 것입니다.
그런데 초등생 5학년이 출가한다면 아직은 좀 너무 이른 것 같습니다.

혜수가 아무리 욕을 하고 혜진이가 아무리 집을 나가도
나는 이 아이들 속에 살아있는 친절과 슬픔을 보았기에 결코 실망이 없습니다.
내가 공부방을 나가고 스무날이 지나 2002년 새해가 되었습니다.
서춘배 신부님이 계시던 해방촌 성당에서 세배를 하자고
교사들이 모이기로 했습니다.
공부방을 들러 갈려고 동자동으로 갔더니
해는 저물고 살갗이 떨어져 나가도록 추운 공원 앞에서
장갑도 안낀 진석이와 혜수가 얇은 잠바차림으로 고물자전거를 타고 있습니다.
너무 추우니 집에 가자고 달래서 공부방 길 건너편 쪽방 혜수네 집으로 갔습니다.
집에는 아무도 없고 방안에는 이불과 옷가지가 깔려서 앉을 틈이 없었습니다.
방 한 칸에 가구라는 것은 일체 찾아볼 수가 없고
부엌살림까지 가득차 있었습니다.
여기서 4식구가 산다고 하니 먼저 어떻게 누워야 할 지가 궁금해지고
이 많은 물건들 속에서 4식구가 살아갈 생활공간 면적의 계산이 안나왔습니다.
그 속에서 1학년인 혜수가 커피를 타준다며
컵 중에서 제일 괜찮은 컵을 골라 밖에 공동수도에 나가 씻어오더니
꼬마가스렌지에 물을 끓여 봉지커피를 타주었습니다.
안동 하회탈처럼 천진스럽게 웃던 혜수의 친절을 감격스럽게 바라만 보았습니다.
참 아름다운 손님 접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맛있게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아무도 오지 않아
혜수집을 나서는 내 가슴 속에는 서글픔과 훈훈함이 가득하여
흐르는 시린 눈물이 추위에 얼어 붙지만 발걸음은 가벼웠습니다.

어느 날부턴가 공부를 마치고 노래부르는 시간을 만들었습니다.
‘내가 살고 싶은 곳’ ‘내가 좋아하는 것’ ‘해바라기 노래’를 배워 불렀습니다.
그리고 내 슬픔에 겨워 ‘제비꽃이 핀 언덕에’라는 노래를 불러 주겠다며
들어보라 했습니다.

“제비꽃이 핀 언덕에 햇볕 따스히 모일 때
제비꽃 맑은 이슬에 어머니 눈빛이 맴도네
제비꽃이 핀 언덕에 바람 얌전히 고울 때
제비꽃 가는 손목에 어머니 목소리 감기네
다소곳 크지않은 무덤 비켜간 세월도 누워
하늘로 바치는 제비꽃 하늘이 언덕에 내리네
제비꽃이 핀 언덕에 햇볕 따스히 모일 때
제비꽃 맑은 이슬에 어머니 눈빛이 맴도네“

여러 아이들이 함께 다 듣고 나더니 혜진이가 그럽니다.
“노래가 너무 좋아요. 그런데 슬퍼요.”
어린 혜진이 가슴 속에 담긴 정서가 전해옵니다.
‘나는 사는 게 힘들어요. 그래서 슬픈 노래가 좋아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천국의 아이들’이란 영화를 보고도 슬프다고 울던 아이들입니다.

며칠 지난 후 엄청 더운 날
혜진이 아빠는 수박 한 통을 사들고 낑낑거리며 5층 계단을 올라 옵니다.
그리고 좁은 거실마루에 무릎을 꿇더니
“수녀님, 죄송합니다. 제가 술이 좀 많이 취했어요. 수녀님, 사랑합니다!”
“아아~ 알고 계셨어요? 괜찮아요. 고마워요, 개같은 년을 사랑해 주셔서....
ㅎㅎㅎㅎ 미안해요. 글고 담부턴 집 안나가게 잘 가르칠께요.“

혜진이 아빠가 내게 했던 욕은 나에게 한 것이 아니라
내가 들은 것이라 여깁니다.
차라리 세상을 향한 욕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에 대한 미움이 사랑으로 바뀌어서 천만다행입니다.
혜진이 아빠의 분노와 인생의 답답함이
이렇게 서서히 사랑과 여유로 바뀌면 좋겠습니다.
정말 그렇게 되면 좋겠습니다.
일기 끝   200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