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먹고 사는 것은 자유이다. 그 자유 Nomade는 정신적인 어떤 틀을 깨부수는 것에서 출발한다. 평범해서는 결코 얻어낼 수 없는 것이 노마드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자신을 견고하게 가두고 있는 관념에서 벗어나 마침내 자유로워지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서 어떠한 경우에도 <상투>에서 과감하게 뛰쳐나와야 한다. 그래야 시인이다.
오늘날 우리의 기성 시 무대를 보면 무엇인가 아쉽다.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시적인 것>에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매달려 있다는 느낌이다. <시>와 <시적인 것>은 확연하게 구분되어야만 한다. <시적인 것>에 무게중심이 가 있다는 것은 <시>를 수고하지 않고 약게 쓰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약삭빠르게 또는 그럴듯하게 쓴다는 것은 <시>를 하나의 틀에서 꺼내어 또 다른 틀에 가두는 행위에 불과하며 그렇게 쓰는 것이 <시>가 될 수도, 또 <시>로 읽혀져서도 아니 될 것이다. 소위 <시 정신>을 사물화 시키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그와 같은 일련의 양태는 모태와 아기를 동일시하는 것으로 그야말로 덧없는 혼돈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 아직 학생의 신분으로써 꽤 긴 시간을 오로지 묵직하게 <시> 쓰는 일에 힘을 쏟는 집현전의 문학영재들이 그동안의 작품을 엮어 <문필봉에 기대어 글 쓰는 아이들>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내놓는다. 그 열정들이 기성 시투에 물들지 않아서 하나같이 다 상쾌하다. 상쾌하고 신선한 그만큼 이 아이들이 자라서 떠맡을 우리의 시단이 더 풍요해질 것이다. 그래서 오늘 학생들과 함께 어울려 공부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치 마냥 행복하다.
바다를 오래 지켜보다가
발걸음 돌리려는데
갈매기 울음도 아닌 것이
해초 너울대는 것도 아닌 것이
떠 있다
잘 들어보니 파도소리인데
들을 때마다 마음 한 곳 무거워
다시 보니
죽은 물고기와
살아 숨 쉬는 기름띠가
같이 출렁인다
바다가 검게 출렁인다
헛것이 보이고 헛것이 들리는 듯
애써 아닌 듯
발걸음 돌리려는데
기름을 뒤집어써서
고개가 꺾인 갈매기 한 마리
까만 눈동자만 굴린다
나도 고개를 꺾고
그 자리에 오래 선다
-강지원(혜화여고1)/<바다> 전문
시는 시일뿐이다. 그러므로 그 단순명쾌한 명사 앞에 그 어떤 무엇을 가져와 형용할 까닭도, 그럴 필요도 없다. 시를 쓰고자 하는 이들이 스스로를 돌아다보고 각성해야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혜화여고 강지원의 시 <바다>는 그런 면에서 참 순진하다. 힘을 쏙 빼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가만히 응시한다. 서해 기름유출이라는 지난 해 그 엄청난 환경재앙의 현장을 앞에 두고 그냥 시선을 던져놓고 오래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다. 그렇다. 바로 그 점이 강지원으로 하여금 앞길이 창창한 문학영재이게 만드는 힘이다.
강지원은 오염된 바다를 굳이 이렇다 저렇다 설명하려 하지 않으면서, 더 나아가 그것을 객체화 하려하지도 않으면서 다만 <지켜보다>가 <고개를 꺾고/그 자리에 오래> 서 있는 것, 그 이상의 웅변이 어디 따로 있겠는가? 아직 고교생으로써 이 정도의 시적 완성도를 지니고 있는 것이 놀랍다.
창문틈새로
가을바람이 기어들었다
하늘거리는 커튼 위로
바람 타고 날아오르는
민들레 홀씨
창밖 어두운 골목
여름날 잠깐 보았던
그 민들레의 씨일까
보송보송한 몸을 손으로
붙잡았다
행여
부서질까봐
조심조심
어디에서건 엄마를 닮은
노오란 민들레로
꼭 살아나라고
다시 가을바람에 날린다
-박보람(배화여고1)/<민들레 홀씨> 전문
시인은 지극히 섬세해야 한다. 섬세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다보아야 하고 그 세상의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배화여고 박보람은 그럼 점에서 안심할 수 있다. 시 <민들레 홀씨>에서 닫힌 <창문틈새>로 들어오는 바람 한 줄에 반응하기 시작한 섬세한 감성이 그 <바람 타고 날아오르는/민들레 홀씨>까지 거머쥐고 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그 민들레 홀씨의 행보에 간섭하고 동참한다. 그러다가 그런 것이 온당하지 않다는 것을 꺼내고 도로 바람에게 놓아주고 있다. 다시 살아나라는 소망을 끼워 넣고 바람에 맡기는 일단의 행위가 박보람으로 하여금 시인의 눈을 가겼다는 것을 검증하고 있다.
이처럼 섬세하게 짧은 순간의 것들을 놓치지 않고 일일이 포획하고 담담하게 펼쳐놓는 것이 결국 시를 시답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박보람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어디서 떨어졌는지
도요새가 알을 낳고 지나갔는지
오징어잡이 배 눈부신 등빛인지
휙휙 돌아가는 쥐불인지
누가 앉아주기를 바라는 방석인지
제주도에서 온 감귤인지
튼실한 호박인지
아침상에 올라온 계란 부침인지
반딧불이인지
형광펜인지
잘 여문 달 잡기에
여념이 없다
-박세희(영신여고1)/<잘 여문 달 잡기> 전문
우리는 누구나 다 달을 본다. 그 누구나 다 올려다보는 달을 두고 시를 쓴다는 일이 처음부터 만만하지가 않았을 성 싶다. 영신여고 박세희는 그 달을 보면서 예사롭지 않게 치고 나간다. <잘 여문 달 잡기>라는 제목부터가 심상하지가 않다. 느닷없이 떠오른 달을 두고 <떨어졌다>고 묘사해내는 폼이 여간 아니다. 가상과 현실을 판별하고 완충해내는 감수성이 아직 고교생이라는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 야무지며 그만큼 우수하다.
박세희는 달을 <도요새의 알><오징어잡이 배의 등빛><쥐불><방석><감귤><호박><계란 부침><반딧불이><형광펜>으로 과감하게 치환해버린다. 그 모든 것들이 실제로 화자 앞에 놓인 것들인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또 꼭 확인할 까닭도 없지만 단호하게 제시함으로써 그것들이 모두 둥근 보름달이며 환하게 빛을 내고 있음을 너끈하게 암시하고 있다.
<잘 여문 달>이라는 한 마디로 가상과 현실을 오가는 통로를 너르게 터놓고 <달 잡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 달을 보고 느끼는 박세희만의 아주 특별한 느낌인 것이다. 달이 어떠하다고 지루하게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가뿐하게 떨어져 앉은 달을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느끼는 그대로 정직하게 제시할 것을 가려서 제시하는 것이 노련하기까지 하다.
1. 현상
갑자기 하늘이 어두어졌다
오소소 소름 돋은 지금이
유일하게 달이 해와 대면하는 시간이라고 했다
해에서는 빛이 뭉클뭉클 쏟아져 나왔다
2. 관측
그냥 길가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인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태양의 표면온도는 육천 도
태양에 눈물이 없는 것은
눈물을 흘리자마자 증발하기 때문이다
3. 의미
일식은 황도와 백도의 교점 때문에 일어난다는데
정말 그럴까?
개소리다
4. 사로스 주기
6585일이 지나면
나도 맨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으려나
강산이 스무 번도 더 변했을 텐데
5. 달그림자
그림자는 만남의 정 반대편에 드리워진다
언제나 달이 움직여서가 아니라
그림자가 움직여서 싱겁게 일식이
끝나버렸다
6. 신화
수탉의 벼슬이 중국에 가면 단번에
해가 매일 아침 돌아오겠다는 기호가 된다
벼슬보다 더 붉게 핏발 세우며 부른 그는
올 생각조차 않는다
7 다음 주기
약속은 했지만 당분간 만나지는 않는다는 전언
그러니까 내가 여기 길 복판에
아직 누워있는 거다
-변혜지(정의여고1)/<일식> 전문
시는 언어의 부림이다. 시인은 언어를 누구보다도 능숙하게 부리는 사람이다. 그 절대불변의 진리를 정의여고 변혜지는 직시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서 한 발짝도 비켜나지 않고 맞선다. 그렇다. 맞서기 때문에 변혜지는 시인이다. 그러나 그 막중한 자질 <말 부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시를 쓰는 정신이다. 무엇을 어떻게 쓰겠는가? 시 형태에 관한 한 시인이라면 남들이 다 하는 현태를 거부해야 마땅하다.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새로운 것을 제시함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새로운 시각을 열게 만드는 것은 어떻게 보면 시인만이 갖는 의무이다. 비록 아직 그런 낯설게 하기에 익숙하지 않고 서툴지만 그러나 변혜지는 물러서지 않고 도망치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시 정신이 펄펄 살아 있는 것이다.
<일식> 예보를 접하고 그 <일식>의 진행을 <누워서>지켜보고 그런 일련의 행위를 일곱 단계로 구분해내고 노래하고 있다. <오소소 소름 돋>는 것을 시작으로 <태양>의 눈물과 <황도와 백도의 교점>을 유쾌하게 부인하고 <사로스 주기>로 사뿐하게 건너간다. 그리고는 <달>과 <그림자>의 역할을 바꿔버리고 <신화>를 들먹이다가 <다음 주기>를 거론하면서 그 모든 것들의 당위를 각각에 매기고 있다. 보여 지는 그대로가 아니라 비틀어 쥐어짬으로써 일곱 가지의 맛을 가진 액즙을 만들어 내는 것이 시를 옹골차게 만들고 있다.
밤늦게 배가 출출한 것이
뭐라도 먹어야 풀릴 성 싶어
집 앞 김밥천국으로 갔다
구석에 자리를 잡아
된장찌개를 시켰다
이내 뚝배기에 부글부글
식탁에 놓인 찌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것을
손짓 바람으로 날리는데
입구에서
김밥을 싸고 있는 아주머니가
오롯이 보인다
괜스레
가슴 한 쪽이 뚝배기로 들어가
부글부글 끓는다
-송혁준(장충고1)/<김밥천국> 전문
시인은 시대를 막론하고 삶의 근원을 찾는 자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근원을 캐어내는 자이다. 캐어낸 그것들을 최적의 언어로 표현하는 자이다. 언어로 표현해내기 위해서 말이 먼저인가, 글이 먼저인가는 자명한 것으로 당연히 시인은 글보다는 말을 찾는 일에 부단 천착해야한다. 말은 무엇인가? 소리이다. 소리는 또 무엇인가? 소리는 높낮이이다. 높낮이기 때문에 말에는 리듬이 저절로 살아있다. 그러므로 시에 빌려올 수밖에 없는 글이 그냥 글이 아니라 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밝혀줄 때서야 시는 비로소 맥박을 움직이며 살아있게 된다. 죽은 것이 아니라 펄펄 살아 요동치는 언어의 운동력을 보여주는 것이 시이며 그래야만 새로운 느낌을 온전하게 읽는 이에게 전이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장충고 송혁준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현실을 직시하여 알맞게 재단하고 그것을 형상화하려 살려내는 소중한 솜씨를 지니고 있다. 조용히 꺼내고 조심스럽게 다루다가 마지막에 가서 한꺼번에 터트린다. <가슴 한 쪽이 뚝배기로 들어가/부글부글 끓는> 격동을 보여준다. 송혁준이 현실과 삶을 껴안지 않고서는 도무지 꺼낼 수 없는 능수능란한 클라이맥스다. 이미 상당한 지경에 이른 송혁준에게 거는 믿음과 기대가 그래서 더 크다.
나 죽거든 태워주세요
남은 재 싹싹 긁어서 바다에 뿌리세요
이왕이면 그곳이 좋겠어요
정동진, 그 곳에서 바람에 얹히세요
내 가슴이
생전 처음 뜨거워지게
나도 딱 한번은
뜨겁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게
화르르 태워주셔야 돼요
-정우리(염광고1)/<유언> 전문
시인은 무엇을 간절하게 찾고자 할 때에만 진정성을 확보한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 오로지 어떤 것을 애타게 찾고 있다면 그는 시인인 것이다. 시인은 시도하는 자이므로 그 시도는 숭고한 것이며 누구든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무릇 새로운 것을 찾는 시도는 이왕의 흔적들을 뭉개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염광고 정우리는 무엇인가 끊임없이 시도한다. 그래서 정우리는 영재다운 문학영재다.
시 <유언>에서 <내 가슴이/생전 처음 뜨거워지게> <화르르 태워>달라고 소망하는 것이 예사롭지 않은 감성의 소유자임을 웅변하고 있다. 그렇다. 정우리는 그렇게 뜨거워지는 것을 갈망하면서 멈추지 않고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하고 있다. <뜨겁다>는 것은 열정을 의미한다. 단 한번만이라도 제대로 뜨거워지고 싶다는 그 열정이 아름답다.
창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소리가
방안을 얼렸다
아기는
울며 엄마를 찾았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아기는
한기가 서려있는 바닥을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뎠다
문이 열리고
강바람이 아기를
휘둘러 안는다
아기를 안았던 바람이 지나는
길섶에서
들꽃들이 터졌다
-강수지(성신여중3)/<아, 따뜻하다> 전문
시는 눈앞의 사물을 두고 그것을 다 표현하지 않고 안으로 움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로 굳이 붙잡아매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읽는 이로 하여금 어떤 형상에 가 닿게 하는 것이 시이다. 언어로 적시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더 많은 것들을 풀어낸다는 것은 시 말고는 없다. 시에 쓰이는 언어는 궁극적으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뿐 사물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막강한 여백의 메타포를 성신여중 강수지는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시 <아, 따뜻하다>에서 보면 누군가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자아가 <아기>로 환치되고 있다. 그리고는 <찬바람>과 <창><바닥><길섶>이 장치의 전부다. 어쩌면 단촐 하기까지 한 장치 속에서 의미망이 강하게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망을 받쳐주는 것이 바로 여백이다.
엉덩이 움찔하던 아이들이 목을 뺀다
설거지하던 큰어머니의 말씀 '나가 놀아라'
밖 바람이 차다
색동 입은 도령이나 댕기 묶은 아이들이나
장독만한 것들이 장독 위에 오르려 애 쓰다가
한 손에 연 들고 풀밭 위로 달려간다
얼레를 뱅글뱅글
술술 연실이 풀린다
1번 연은 실이 짧아 머리 위에서 뱅글뱅글 돌고
2번 연은 실이 길어 구름이 연을 삼키고
3번 연은 나무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고
4번 연은 실이 끊어져 아이의 넋을 싣고 달린다
손자들 틈에 낀 할아버지 연의
연실이 제일 질기다
-김하늘(종암중3)/<연 날리기> 전문
시는 어떤 경우에도 여린 감상이 아니며 다만 시인의 경험에서 비롯된 독특한 느낌이다. 그러므로 매우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시인은 그런 자기만의 독특한 경험의 세계를 바탕으로 하여 걸러낸 낱말들을 보편화 시켜야 한다. 시 쓰기가 어렵다면 바로 그런 일련의 과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하여야 시인인 <나>를 넘어선 <나>를 풀어낼 수 있는 것인가? 종암중 김하늘은 그런 과정을 확실하게 놓치지 않고 밟아나가고 있다. 시 <연 날리기>에서 김하늘은 자신의 기억을 오롯이 풀어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철저하게 절제한다. 그 결과 어느 한 낱말도 <연 날리기>와 무관하지 않다. 그래야 필연이 성립되며 시적 긴장이 살아난다. 그러면서 <아이들>과 <얼레>와 <연실>을 자연스럽게 의인화하고 있다.
사물의 의인화가 곧 메타포로 연결된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이야기를 <손자들 틈에 낀 할아버지의 연의/연실이 제일 질기다>라는 결구를 넣어 멋지게 여미는 것으로 미루어 김하늘의 시심이 얼마나 깊고 치밀한 것인지 잘 말해주고 있다.
가지에 걸터앉은
나뭇잎이 흔들린다
바람 한 줄 가볍고
햇살 한 줌 따갑다
설렘 가득 안고
사뿐히 떠오르는
민들레 홀씨
부풀어 오른 꿈
머리끝에 이고
소풍 나서더니
이내
빈 몸으로 내려온다
골목어귀
가난한 마당마다
여기저기 민들레꽃이
한창이다
-이민지(휘경중3)/<소풍> 전문
시에 기교가 있다면 무위의 기교야말로 으뜸일 것이다. 작위적인 것이 하나도 없이 그저 담담하게 풀어내는 것이야말로 사실이 저절로 어떤 각성에 이르게 하는 올바른 서정인 것이다. 그래야만 시인과 시를 읽는 이들이 어느 한쪽이 우세하지 않고 서로 평등해진다. 휘경중 이민지는 시 <소풍>에서 그러한 평등을 우리에게 아주 모범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과연 이민지는 문학영재다.
구구절절한 지루함을 싹 걷어내고 꼭 필요한 것만 꼭 필요할 때 드러낸다는 일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시 <소풍>으로 미루어 이민지가 그동안 얼마나 많이 시를 써왔는지 넉넉히 짐작할 수가 있다. <소풍>이 지니는 조금은 들뜬 이미지를 <민들레 홀씨> 하나에 집중하여 착착 짚는 솜씨가 예사롭지가 않다. <민들레 홀씨>가 그냥 민들레 홀씨가 아니게 만들고 있는 것도 빼어난 상징이다.
할아버지 다리 한 짝
굽은 등 이미 하얗게
색이 바랬다
평생 절뚝거리는 것 말고
다른 일은 엄두도 못 냈을
다리 한 짝
군살 다 빠지고 참 야위었다
병실 침상에 기대어
할아버지가 쿨럭일 때마다
저도 들썩인다
-이하연(신연중3)/<의족> 전문
말라르메는 이렇게 노래했다. <바람이 분다/살아야겠다> 이 짧은 단 두 행에는 많은 경고가 들어앉아 도사린다. 그것은 <의미 있게 침묵하라>이다. 그것은 <낮아지라>이다. 그것은 <인간적이어라>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시는 넋두리가 아니다>이다. 이 모든 것들이 시인이 가장 빠지기 쉬운 함정들이다. 의미 있게 침묵하는 것들이 많을수록 시의 완성도는 그만큼 높아진다. 신연중 이하연은 시 <의족>에서 <군살 다 빠지고 참 야윈>의족을 해체하고 더운 심장을 그 안에 박는 천재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이하연은 천재다.
이제 이하연은 시가 궁극적으로 바탕하고 추구하는 것이 노마드라는 것을 깨달아서 거머쥐고 생각하는 것들이 발칙한 지경에 이르기만 하면 이하연은 우리에게 빼어난 시들을 잇달아 토해낼 것이다. 그런 믿음이 이하연을 가만히 주목하게 만들고 있으며 그 기다림이 즐거운 이유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집현전의 시 쓰는 아이들의 시편들이 하나같이 우수한 것이 평소 시를 대하는 태도가 올바르며 사뭇 진지해서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렇다. 나는 이 아이들에게 열정을 알려주고 싶은 거다. 열정 이전에 집중을, 집중 이전에 시에 대한 바른 자세를 기억하게 하고 싶은 거다. 그런 소망에 기꺼이 함께해준 아이들이 많이 고맙다.
-김재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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