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동무와 연인

주혜1 2008. 10. 13. 07:39

[동무와연인] 천릿길 이별이 애끓게 한 사랑
지리적 단절이 불러일으키는 향수병처럼
상사병도 마음보다는 거리에서 오는 것
대장부 길 떠나는 유희경을 놓아보내며
부안의 기생 매창은 절창의 시를 읊었다
한겨레
» 매창의 이별시는 중세적 거리감의 산물이다. 그림은 신윤복의 <월야밀회>. <한겨레>자료사진
동무와 연인 / (21) 매창과 유희경

폴 비릴리오는 자동차가 자동차 사고를 ‘발명’했다고 일갈한 바 있다. 보드리야르는 한술 더 떠, 자동차는 사고를 통해서 자본주의적 풍족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러나 폴 해기스의 <크래쉬>(2006)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21그램>(2003)과 <바벨>(2006) 등을 보노라면, 자동차는 자동차 사고를 통해서 좋은 영화감독을 ‘발명’한다고 억지를 부려도 좋을 법하다. 아무튼, 바야흐로 자동차는 이제 삶의 양식 속에 흡수되었고, 오히려 그 과잉 속에서 자동차 시대의 종말을 간취할 법도 하다.

그러나, 사진의 발명(1839)이나 전화의 발명(1876)과 더불어 자동차의 발명(1886)이 초래한 변화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물론 그 변화 중의 하나는 아래와 같은 절창의 이별시가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매창, 1573~1610). 물론 이 정한(情恨)은, 네트워크 시대의 우리들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중세적 거리감(‘천리’)의 아득함에 닿아 있다. 그러나 매창이 그의 정인(情人)인 유희경(1545~1636)을 놓아 보내는 곳이 불과 부안에서 서울이니, 가령 자동차를 굴리고 핸드폰을 놀린다치면 황진이 큰언니라도 언감생심 이런 시를 생산하기는 어렵다. 아도르노의 재치있는 지적처럼, 비서가 전화를 받아주고 제 시간에 퇴근해서 골프 치러 가는 니체는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기록을 살피면 유럽에서도 19세기 초중엽까지는 노스탤지어(향수)가 하나의 번듯하고 진지한 병으로 다루어지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추론컨대, 이른바 ‘향수병’은 지형과 지리적 거리가 인간관계를 뿌리에서부터 규정하던 시대의 증후라는 사실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노스탤지어의 문제를 이처럼 인문지리적, 계보학적, 혹은 매체론적으로도 분석할 수 있듯이, 마찬가지로 상사병의 기원이나 메커니즘도 조금 다르게 헤아리고 따져볼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노스탤지어가 결국 마음자리를 통해서 해결-치료되는 게 아니었듯이, 연인 사이의 원격 감응방식­마치 주술처럼­인 상사병도 각자의 마음자리를 톺고 까부른다고 해서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노스탤지어가 마음의 병일 수만은 없듯이 상사병 역시 마음의 병일 수만은 없다는 것을 엥겔스는 그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1884)에서 좀 더 서늘하고 재미없게 밝힌 바 있다. 현대의 일부일처제 가족은 국가와 종교와 도덕의 호위 아래 사랑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삼아 연명하지만, 사실 그 제도의 기원은 갑돌이와 갑순이가 서로를 원하고 그리워하는 ‘마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의 논지 중의 한가지는, 우리가 영화나 소설 등속을 통해 자연스럽게 동화시킨 연인들 사이의 연애-이야기와 성애-이미지는 역사상 극히 최근에 형성된 것이며, 특히 상사병이나 정사와 같이 극적인 사태로 특징지어지는 러브스토리는 오랫동안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몫이었다는 것이다.

엥겔스의 냉조적인 지론에 따르면, “어떤 방식의 혼인에서든 사람들은 혼인 이전이나 이후나 다름이 없다.” 이를 고쳐서 말하자면, 제도로서의 혼인­우리는 혼인이 제도라는 사실을 쉼없이 강조해야 한다!­은 상사병과 같은 마음자리의 응결이나 교환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더불어, 사랑에서 출발하는 자는 혼인은 물론이거니와 사랑 그 자체의 본질과 실체를 영원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

내가 <사랑, 그 환상의 물매>(2004)에서 물매(기울기), 틈, 편차, 그리고 어긋남의 자가동력을 통해 사랑을 설명했듯이, 오히려 사랑은 마음이 아니라 이별이라는 사건이나 둘 사이를 가르는 그 틈과 사이의 거리를 통해서 살피는 게 훨씬 현명한 짓이다. 최근 독일의 연구팀은 인간의 골수에서 추출된 줄기세포로부터 정자(精子)를 대량생산할 가능성을 밝혔다. 거리와 틈과 그리움과 사랑의 필요를 지우고 자웅동체의 꿈을 약속하는 중요한 진일보일까?

» 김영민 / 전주한일대 교수·철학
마찬가지로 각종의 유토피아 픽션들은 인간들 사이의 틈과 거리와 어긋남의 계기를 기계적으로 삭제함으로써 모성이니 연애니 하는 사랑의 관계를 원천무효화시키는 미래세계를 그린다. 미래세계 속에서 주체란 아무래도 성가신 비용인 것이다. 사랑의 심리주의는 만고의 완악한 고집이기 때문에 고치기가 죽기보다 어렵긴 하다. 그러나 사랑은 마음의 문제라기보다는 가령 이별과 거리의 문제라고 보는 게 낫다. 유명한 속담은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고 얘기하지, ‘마음을 졸이면 라면국물도 졸여진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하지 말고, 묵묵히, 길게 사안을 살펴보시라. 사랑의 역동성은 물론 그 원초적 가능성조차 틈과 사이, 그리고 어긋남과 이별에 기대고 있다. 그래서 부안의 시기(詩妓) 매창은, 대장부의 길을 운운하며 길을 떠나는 유희경에게 그날도 언제나처럼 이별의 시를 읊는 것이다.

하룻밤 봄바람에 비가 오더니
(東風一夜雨)
버들이랑 매화랑 봄을 다투네
(柳與梅爭春) 이 좋은 시절에 차마 못할 건
(對此最難堪)
잔 잡고 정든 임과 이별하는 일
(樽前惜別人)

김영민/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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