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직하고픈 이야기

버지니아 울프의 유서

주혜1 2009. 1. 10. 16:03

 버지니아 울프의 유서

 

 

 

 버지니아 울프[영국](1882-1941)

 

 

 

 

  내 상처를 이해해 준 그대에게


흐르는 저 강물을 바라보며 당신의 이름을 목놓아 불러봅니다.
레너드 울프.
제 처녀 때의 이름 버지니아 스티븐이 당신과 결혼하면서 버지니아 울프가 된 것을 저는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제 나이 예순, 인생의 황혼기이긴 하지만 아직 더 많은 일을 할수 있는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할 생각입니다.
제 자살이 성공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 부부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 거라고 입방아를 찧을지도 모르겠어요. 아이도 없는 터에 남편의 이해부족, 애정 결핍 등 이런저런 얘기가 나올까 솔직히 두렵습니다. 이 유서는 당신이 엉뚱한 구설수에 휩싸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쓰는 것이랍니다.

1912년 결혼한 이래 30년 동안 제가 진정으로 사랑하였고, 저를 진정으로 아껴 주었던 레너드 그 동안 차마 얘기하지 못했던 제 생애의 비밀을 이 유서에서 당신께 말하려 합니다. 저의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은 첫 번째 아내가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죽자 변호사 허버트 덕워스의 미망인 줄리아와 재혼을 합니다.
속된 말로 홀아비와 과부의 결혼이었던 거지요. 제 어머니 줄리아는 이미 네 명의 자식이 있는 상태였고, 아버지는 전처 소생의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재혼한 두 사람 사이에서 오빠 토비와 언니 바네사, 저 그리고 동생 애드리안이 줄줄이 태어났지요. 그리 넓지도 않은 집에서 아홉 명 아이와 두 어른이 아옹
다옹하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어머니는 봉사정신이 무척 강한 분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병구완하러 다니느라 정작 집에 있는 아이들은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셨지요. 큰애가 작은애를 알아서 잘 돌보겠지 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하셨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 생애의 불행은 여섯 살 때부터 시작됩니다. 큰 의붓오빠인 제럴드 덕워스가 어머니 없는 틈을 타 저한테 못된 짓을 하는 것이었어요. 자기와는 신체 구조가 다른 저를 세밀히 관찰하고 만지고. 그 시절부터 저는 몸에 대한 혐오감과 수치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성에 관련된 것이라면 무조건 배격하는 마음도 갖게 되었지요.

불행은 설상가상으로 몰아 닥쳤죠.
어머니는 이웃사람을 간병하다 그만 전염이 되어 제가 열 세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를 잘 이해해 주던 이복언니 스텔라도 2년 뒤에 죽었는데 바로 그때 아버지마저 암에 걸려 몸져눕고 말았습니다. 저와 언니 바네사가 신경질이 나날이 심해지시는 아버지의 병간호를 맡아서 하는 것이야 뭐 그래도 힘든 일이라 생각하지 않고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춘기를 막 넘긴 작은 의붓오빠 조지 덕워스가 저한테 갖은 못된 짓을 하는 것이었어요. 그렇지 않아도 의지할 데 없어 심리적으로 불안했던 저는 무방비 상태에서 그런 일을 수시로 당하고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집에 책이 없었더라면 전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버지의 전처처럼 죽지 않았을까요? 아버지는 총 65권에 달하는 대영전기사전의 책임 집필자여서 집에 책이 엄청나게 많았고, 저는 현실의 불행에서 도피하기 위해 책에 파묻혀 지냈습니다. 저는 당신과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
들 앞에 나서는 것을 너무나 무서워했고, 사춘기 시절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당신이 청혼했을 때 저는 두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은 부부생활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작가의 길을 가려는 나를 위해 공무원 생활을 포기해 달라는 것. 세상에 이런 요구를 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성적 욕망을 버리고 사회적 지위를 팽개치고 오겠다는 사람은 레너드, 당신 이외엔 없을 거예요.
고통스런 과거를 끊임없이 반추하며 제가 작품을 쓰는 동안 당신은 출판사를 차려 묵묵히 제 후원자 노릇을 해주셨지요.

저는 지난 30년 동안 남성중심의 이 사회와 부단히 싸웠습니다. 오로지 글로써. 유럽이 세계 대전의 회오리바람 속으로 빨려들 때 모든 남성이 전쟁을 옹호하였고, 당신마저도 참전론자가 되었죠. 저는 생명을 잉태해 본 적은 없지만 모성적 부드러움으로 이 전쟁에 반대했습니다. 지금 온 세계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제 작가로서의 역할은 여기서 중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한 채 저는 지금 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1882-1941)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生涯)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로 시작되는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에 등장한 버지니아 울프. 1941년 주머니에 돌을 가득 채워넣고 템즈강에 투신 자살하기까지 수 차례의 정신질환과 자살기도를 경험한 버지니어 울프. 동시에 버지니아는 20세기 문학의 대표적인 모더니스트로서 뛰어난 작품 세계를 일궈 놓은 선구적 페미니스트이기도 했다.

 아래는 최애리 번역가의 글을 옮긴 것이다.

 

 [문학사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이른바 '의식의 흐름'이라는 새로운 서술 기법을 발전시킨 20세기 초의 실험적인 작가로 손꼽힌다. 또, 1960년대 말부터는 페미니즘 비평의 선구자로 재발견되면서 새로운 해석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그러한 문학적 업적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전설적인 여운을 불러일으킨다. 생전에 이미 블룸즈베리 그룹의 중심 인물로서 숱한 화제를 뿌렸던 데다가, 비범한 성격과 용모, 만성적인 정신분열증, 결국 자살로 마감한 생애는 그녀를 하나의 전설로 만드는 것이다.

 그녀는 학자이자 비평가였던 레슬리 스티븐과 아름답고 활동적인 어머니 줄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 모두 재혼으로, 레슬리에게는 정신박약인 딸이, 줄리아에게는 2남1녀가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다시 2남2녀가 태어났으며 버지니아는 그 중 셋째였다. 그래서 그녀는 여덟 살부터 예순 살까지 열한 명의 식구와 일곱 명의 하인들이 북적이는 가운데 자라났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유복한 환경이었다. 남자 아이들은 공립학교에 다녔고, 여자 아이들은 집에서 가정교사와 부모로부터 배웠다. 20세기가 되기 직전까지도 영국의 웬만한 가문에서는 여자아이들에게 학교 교육을 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의 방대한 서재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고, 아버지의 손님들인 당대 일류 문사들의 대화에서 지적인 자극을 받아 일찍부터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녀가 열세 살 때 어머니 줄리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로서 그녀는 최초의 신경쇠약을 겪었다.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살림을 꾸려가던 어머니의 부재와 아내를 잃은 레슬리의 상심은 온 집안의 분위기를 암울하게 만들었다. 열세 살 위의 의붓언니 스텔라가 살림을 맡았지만 역시 2년 후에는 세상을 떠났고, 그 후에는 불과 열여덟 살이던 바로 손위의 언니 바네사가 살림을 맡게 되었다. 레슬리는 점점 더 완고하고 자기중심적이 되어갔고, 두 의붓 오빠들 역시 자매에게는 견뎌내기 힘든 존재였다. "마치 야수와 함께 우리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았던 그 시절은 1904년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끝이 났다. 그녀는 신경쇠약이 재발하여 자살을 기도했다.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달랐던 형제자매들은 제각기 흩어졌다. 바네사는 동생들을 데리고 블룸즈버리 지역으로 이사했다. 가난한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이 주로 사는 허름하고 조용한 동네였다. 비좁고 침침했던 옛집과는 달리 집안을 환하게 꾸몄고, 케임브리지 대학에 다니던 남동생 토비의 친구들을 초대했다.

 클라이브 벨, 색슨 시드니-터너, 리튼 스트래치, 메이나드 케인즈, 레너드 울프 등이 드나들었다. 어떤 규범이나 구속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롭고 반항적인 정신들이 맞부딪치며 예술과 철학과 문학을 토론했고, 바네사와 버지니아는 안주인 노릇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룹에 동참할 수 있었다. 버지니아는 친구의 소개로 <가디언> 지에 정기적으로 기고하여 원고료를 벌기 시작했다.

 1906년 사남매의 그리스 여행은 불행하게 끝났다. 여행에서 얻은 티푸스로 토비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바네사는 클라이브 벨과 결혼했고, 블룸즈버리 그룹은 계속 번창했지만 버지니아는 어느새 스물 아홉 살에 아직 결혼도 안 하고, 청혼도 거부하고, 아이도 없고 게다가 정신병이 있었다. 1912년 그녀는 결국 레너드 울프와 결혼했다.

 토비의 친구들 중 한 사람이었던 레너드 울프는 버지니아에게 둘도 없는 반려가 되어주었다. 병원에서는 악화시킬 뿐인 정신병을 가진 아내를 위해 규칙적이고 안정된 생활 습관을 만들어주었고, 창작을 격려해주었다. 그녀의 거부로 인해 처음부터 성생활이 배제된 백지 결혼이었지만, 결혼이 반드시 성관계 위에 기초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이상적인 결혼이었다.

 그녀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09년이었다. 1913년 완성된 <출항>은 1915년에 발표되었고, 뒤이어 <밤과 낮>(1919) <제이콥의 방>(1922)등이 발표되면서 차츰 인정받기 시작했다. 재미 삼아 사들인 수동식 인쇄기로 시작한 호가스 출판사 역시 차츰 궤도에 올랐고, <댈러웨이 부인>(1925) <등대로>(1927) 등으로 명성과 수입을 얻기에 이르렀다.

 <자기만의 방>(1929)을 쓰게 된 것은 이 무렵의 일이었다. 어째서 여성이 작가가 되기란 그토록 어려운가를 역사적 사회적으로 규명한 이 에세이는 출간 당시부터 이미 적지않은 반향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1960년대 말 이후로는 페미니즘의 지침서가 되다시피 하였다. "우리가 모두 일년에 500파운드를 벌고 자기 방을 갖는다면"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여성의 경제적 자립과 정신적 자유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여성들의 소망이 되고 있는 것이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울프 부부의 삶에는 점차 암운이 덮이기 시작했다. 독일군의 침공은 유태인인 레너드에게 잠재적인 위협이었으며, 시골집으로 대피했지만 갈수록 심각해지는 전시의 불편과 고통은 버지니아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했다. 다시금 자신이 미쳐가고 있음을 감지한 그녀는 남편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나는 당신의 인생을 더 이상 망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이슬이 아직도 촉촉한 초원을 씩씩한 걸음걸이로 가로질러 강으로 나가서 주머니에 돌멩이들을 가득 집어넣고 강물로 들어갔다. 시체는 2주 후에야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