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야의 유령] 비운의 역사가 낳은 희생자들의 이야기
[아마데우스]를 통해 스크린을 음악으로 물들였던 밀로스 포만이 이번에는 미술계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주목한 인물은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 하지만 [고야의 유령]은 [아마데우스]처럼 인물의 행적을 쫓아가는 영화가 아니다. [고야의 유령]은 한 인물의 개인적인 삶보다, 그 인물이 살다 간 시대의 아픔을 고발하는 영화다. 고야를 영화의 주체가 아닌 관찰자로 심어놓고, 역사를 깊이있게 관조하는 감독의 시선이 꽤나 날카롭다.
스페인 궁중화가 고야(스텔란 스카스가드)의 뮤즈인 이네스(나탈리 포트먼)는 이교도로 몰려 종교 재판소에 회부된다. 이에 이네스의 아버지는 성당에 고액의 기부금을 내는가 하면 로렌조 신부(하비에르 바르뎀)를 심문해 거짓 자백서를 받아내는 등 딸을 빼내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성당은 돈만 받고 이네스를 풀어주지 않고, 거짓 자백서로 인해 성당에서 추방당한 로렌조는 이네스를 겁탈하고 만다. 15년 후. 로렌조는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의 권력을 등에 업고 스페인으로 돌아오고, 이네스도 감옥에서 풀려난다. 이네스는 로렌조와의 사이에서 태어 난 딸을 찾고자 그를 찾아가지만, 자신의 과거가 발각되는 게 두려운 로렌조는 딸 알리시아를 해외로 추방하려 한다.
[고야의 유령]은 비운의 역사가 낳은 수많은 희생자들을 그린 영화다. 밀로스 포만은 그 희생자들을 역사 앞에 세우기 위해 세 명의 인물(희생자)에 주목한다. 첫 번째 희생자는 바로 이네스. 13세기에 시작된 유럽의 종교 재판소는 가톨릭의 교리를 지키는 것과 이단을 없애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신에 대한 믿음보다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는 게 우선이었던 그들에게 이단을 가리는 객관적인 기준이란 게 있을 리 만무했다. 그들은 교회의 이익을 위해 죄 없는 사람들을 옥에 가뒀고, 고문 했으며, 반역자는 공포심을 주기 위한 본보기로 가차없이 처형시켰다. 밀로스 포만은 고야의 뮤즈였던 이네스를 통해 종교 재판소의 정치적 야욕에 의해 날개가 꺾인, 수많은 희생자들을 애도한다.
[고야의 유령]의 두 번째 희생자는 로렌조 신부다. 겉으로 보기에 이네스를 겁탈하고, 프랑스 세력을 등에 업고 스페인 국민을 탄압하는 로렌조는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로 보인다. 하지만 믿었던 종교와 나라에 배신당해 추방당하고, 새롭게 의지했던 프랑스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한 로렌조 역시 그 시대가 낳은 하나의 희생자일 뿐이다. 밀로스 포만은 로렌즈를 통해 시대에 소용돌이 속에 변할 수밖에 없었던 나약한 인간을 자화상을 그려냈다.
밀로스 포만이 내세운 마지막 희생자는 바로 고야다. 이네스의 절망과 로렌조의 타락. 그리고 종교 재판소와 나라의 부패 등, 모든 것을 목격하는 역사의 산 증인 고야는 이로 인해 미(美)가 아닌 추(醜)를 그리는 화가로 변모한다. 이처럼 영화는 아름다운 여인의 세월을 빼앗고, 신을 섬기고자 했던 성직자에게 분노를 안기며, 아름다운 것을 그리고자 했던 화가의 붓 끝에 사악한 것을 그리게 했던 역사를 고발한다.
하지만 포만은 침략, 폭력, 간강 등으로 점철된 그 시대의 모습을 어둡게만 그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심각한 장면에서 농을 툭툭 던지는데, 특히 처형당한 로렌조가 마차에 실려 나가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슬픈 장송곡 대신, 경쾌한 장단의 음악을 버무림으로서 지독한 ‘역설의 미학’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내 평화를 지키기 위해 다른 나라의 평화를 짓밟고, 내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죄 없는 이들의 밥그릇을 빼앗았던 전쟁의 아이러니와 겹치며 묘한 슬픔을 자아낸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로 많은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휩쓴 하비에르 바르뎀의 연기는 이번에도 실망시키지 않는다. 다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먼저 보고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이라면 로렌조라는 인물이 더 사악하게 보이는 선입견이 생길지도 모르니, 이를 사전 방지하기 위해 그의 선한 연기가 일품이었던 [씨 인사이드]를 먼저 관람하기를 권하는 바이다. 그리고 또 한 명. 고야의 뮤즈를 연기한 나탈리 포트만. 최근 [마고리엄의 백화점]부터 [천일의 스캔들],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까지 그녀의 출연작들이 연이어 개봉하고 있는데, [고야의 유령]에서의 그녀의 연기는 그 중 으뜸이라 할 만하다.(펌) -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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