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소중한 재산

주혜1 2010. 7. 29. 09:58

소중한 재산


김주혜


 요즘 베니스 영화제 각본상을 받은 영화 ‘시’를 봤다. 소위 ‘시인’의 반열에 들어 세 권의 시집을 냈으니 ‘시’란 제목에 솔깃하기도 했지만, 주인공 여배우가 같은 세대를 살아온 사람이라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묘한 의무감에서 보았다.

‘시’와는 아주 동떨어진 생활을 하는 한 여자의 일상에 초점이 맞추어 있어 스토리는 기대에 못 미쳤지만, 여배우의 주름진 얼굴에서 나는 ‘시’를 읽었다. 주름살 하나하나에 번지는 미소가 그리도 사랑스럽고 귀엽다는 것도 알았다.

 요즘 연기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까지도 주름제거 시술을 하여, 세월은 흘렀건만 도통 주름살 하나 없이 팽팽한 얼굴을 하여 연기자에게선 실감나는 표정이 살아나지 않아 신경이 쓰였는데 영화 ‘시’의 주인공 여배우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였음에도 사랑스럽고 귀여움을 잃지 않고 있어 참다운 연기자의 모습을 발견한 것 같아 편안했다. 더욱이 영화 속에는 찌든 삶과 기막힌 현실 앞에 있으면서도 자신을 사랑하는 우아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으니 그 자태가 바로 참다운 ‘시’의 얼굴이 아닌가 나름 생각하게 했다. 바람도, 나뭇잎도 그리고 떨어진 과실, 그녀를 스쳐가는 그 모든 것들이 ‘시’ 의 모습이라고........ 그랬다. 이처럼 ‘시’를 사랑하는 이는 자연을 닮아가야 한다는 것을.

  

 뜻밖에도 ‘시’, 그 영화 속에는 22년 전, 박제천 선생님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눈 초롱초롱 뜨고 앉아 ‘시’ 강의를 듣고 있던 나를 발견하고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학창시절엔 박목월선생님께 시도 아닌 것을 들고 쫄랑쫄랑 따라다니며 시와 인연을 맺은 후, 결혼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잊혀진 연인인 그 ‘시’를 87~88년 덕수궁 안에 있던 문예진흥원 ‘시’ 강좌에서 다시 만난 것이 문학아카데미와 맺은 인연이다.


 당시 구 상, 조병화, 황금찬, 오규원, 박희진, 홍윤숙, 성춘복, 성찬경선생님 등 기라성 같으신 시인님 들을 직접 만나는 행복감이란 이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아 덕수궁 나들이는 늘 뭔가에 홀린 듯 다닌, 내겐 꿈같은 시절이었다. 시를 써서 발표하고 선정 받아 칭찬을 듣고, 시낭송이라는 매력에 도취되었던 그때의 설렘과 자만심은 행복 그것이었다.


 그러나 한껏 달아오른 우리 수강생들의 아쉬움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문예진흥원의 강좌는 문을 닫았고, 시에 대한 갈증을 견디지 못한 몇몇은 시인님들을 찾아다니며 사숙을 부탁드렸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있던 차에 진흥원에서 알게 된 김정아, 이화숙, 하 영 등이 박제천 선생님께 사정사정하여 일주일에 한 번씩 대학로 소금창고에서 가난한 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 지금의 문학아카데미가 된 시작이었으니 참으로 흐르는 세월을 화살에 비유한 것이 적절하지 않은가. 문학아카데미가 이렇게까지 크게 발전하게 된 배경은 물론 박선생님의 탁월한 지도력이 우위이겠지만 시를 사랑하는 우리들의 삶이 그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나는 ‘소금창고’에 가기 위해 시집을 사서 읽고 상상력을 키우며 지하철을 갈아타고 다니던 그 때가 새삼 눈물나게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하여 박제천선생님의 탁월하고도 날카로운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하나둘씩 유수한 잡지와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시인의 반열에 들어가기 시작하였고, 그 수는 해가 거듭할수록 늘어났으니 사숙생들의 경쟁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불꽃이 튀어 살벌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방산사숙은 명실 공히 문인의 등용문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인생관과 가치관에 따라 추구하는 행복한 삶과 인간관계가 형성되듯이 내 주위에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 함께 있다는 뿌듯함은 시에 대한 열정을 더욱 달구었고, 삶의 질도 높아진 듯 뿌듯하기까지 하였다. 박선생님께서는 시의 적절하게 동인 결성을 이르셨고, 뭉뚱그려 [90년대 동인]으로 하여 동인지도 만들어 주셨다, 내가 쓴 시가 만인들에게 공개되는 자리, 그 활자화 된 내 시를 보고 또 보고 쓰다듬은 그 시절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지 않아 싶다. 더 나아가서 박선생님은 소규모 동인도 권장하시어 나는 전영주, 박승미, 고옥주, 故이창화, 이 섬 등과 함께 ‘시와 함께’ 라는 동인을 결성하였다. 우리는 교외로, 아담한 찻집으로 다니며 각자 써온 시를 발표하고 평도 받는 등 시 모임이 있는 날이면 늘 행복했다.


 그런가 하면 박선생님께선 한 달에 한 번 샘터 파랑새 극장에서 [시의 축제]를 마련하시어 자신의 시를 낭송할 기회와 책으로만 접하고 흠모해 왔던 시인분들을 초청하시어 직접 뵙고 좋은 말씀을 듣는 소중한 자리를 만들어 주셨다. 하늘의 별로만 알고 있던 분들을 뵐 때마다 나는 큰바위얼굴을 떠올리며 꿈을 꾸었다. 사숙생들의 시는 점점 날개를 다는 것처럼 일취월장하였으며 시낭송하는 실력들도 만만치 않았다. 누워있는 시를 일으켜 세우는 작업이 낭송이라는 말에 공감하며 시낭송이 있는 날이 수업 받는 날보다 더 기다려졌다. 이번엔 어느 시인분을 초청하실까? 하는 기대감과 함께 그 분들 앞에서 내가 쓴 시를 낭송하는 영광을 갖기 위해 밤잠도 거르며 써대던 그 시절이 그립다. 마치 연극의 주인공인 듯 조명을 받으며 마이크 앞에서 감정을 실어 시 낭송하는 행복함이란......! 

 그뿐이랴! 일 년에 한 번씩은 숲속시인학교를 마련하여 1박2일로 즐거운 나들이를 하며 백일장도 하고, 세미나도 열고, 서로의 살과 살을 부비며 뒹굴기도 하는 등 아카데미 식구들의 정은 이미 가족과도 같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하나둘씩 시인이 되어 떠나는 뒤를 이어 나도 90년 가을, 이근배 선생님께서 창간기념으로 모집한 [민족과 문학]지에 [스트레스 외 5편]을 투고하여 신경림선생님의 추천으로 제 1회 신인상을 받아 당당히 등단을 하였으니 그때의 감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시인이 되다니! 정말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모지인 [민족과 문학]이 폐간이 되었고 나는 끈 떨어진 연이 되었다. 문학아카데미가 유일한 출구요 입구였으니 내겐 진정 친정인 셈이다. 같이 공부한 시인들과 각별하고도 끈끈한 정 또한 친정이 아니면 생길 수 없는 소중한 재산이 되었다.


 그 즈음 박제천선생님께선 등단이 마지막이라는 개념을 없애버리도록 채찍질을 가하시기 시작하셨다. 문학아카데미 식구들의 시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도록, 자만심에 빠지지 않도록, 여늬 시인들보다 월등하기를 바라시는 마음에서 등단한 사람들을 위한 워크숍반을 창설하시곤 적극 참여하기를 바라셨다. 그때 나는 좀더 적극적으로 박 선생님 말씀을 따랐어야 했다. 내 등단한 시에 대해 찬사가 쏟아지고, 몇 되지 않는 시를 가지고 급하게 첫 시집 [때때로 산이 되어]를 엮고 나니, 자만심에 빠졌든지, 머리 짜는 시간에 지쳤든지 아무튼 워크숍반에 들지 않은 것은 큰 손실이었고, 지금에 와서는 후회막급이다.


 문학아카데미가 22년, 잡지 [문학과 창작]이 1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총체적인 결산을 말하라고 하면, 나는 문학아카데미에서 얻은 인간적인 교류라고 하겠다. 시를 쓴 그 시간의 즐거움도 있지만, 초창기 아카데미 식구들과의 벌거숭이 시절이 더 그립고 애틋하다고. 그들은 모두 내 친정식구들이라고.......!


 영화 ‘시’에서 주인공 여배우의 현실은 매우 어둡고 암울하다. 주름 가득한 얼굴이지만 화려한 의상과 모자를 쓰고 나서서는 반신불수의 노인을 씻기고 보살핀다. 비록 현실은 주름지고 어둡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을 사랑한 그녀가 아름다운 것은 하늘을 보며,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는 여유, 바로 ‘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아카데미 창설 22년의 세월의 흔적은 이처럼 장대하나 내 세월은 그렇지가 못하여 자존심 꼿꼿한 나는 그 흔적이 부끄러워 눈물 그렁그렁한 채로 먼 곳에서 바라만 볼뿐 아카데미에 발길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 박선생님은 지켜보고 기다리고 계셨다. 내가 다시 시를 쓰지 않으면 안 되리라는 걸 알고 계셨다. 언제나 무뚝뚝하고 인사해도 받는 법이 없는 박선생님이지만 속정은 남다르다는 걸, 아는 이는 다 안다. 해서 친정오라비처럼 [연꽃마을 별똥별] 제3시집도 상재할 수 있게 도와주셨고,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나는 타고난 시인은 아니다. 아카데미에서 만들어진 시인이다. 아카데미 아니었으면 나는 그냥 시를 사랑하는 문학인으로 살아갈 따름이었을 것이다. 시인으로서 시집을 내고 내 곁에 시인들이 와글와글한 것 모두 아카데미 아니었으면 가당키나 한 일이었겠는가!

 22년이 흐른 지금, 나는 영화 ‘시’의 여배우같이 암울한 현실에서도 자연 그대로의 고운 자태로 자연과 더불어 살리라. 주름살마다마다 ‘시’로 꼭꼭 채우고 바람에 떨어진 살구를 줍듯이 오늘도 나는 시를 길어 올리려 하늘우물을 올려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