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이 섬 시인의 시 리뷰

주혜1 2010. 12. 9. 12:29

봄비

 

낮게 낮게

고개를 낮추고 허리를 낮추고

생각을 낮추어 가장 겸손한 모습으로

메마르고 푸석거리는 마음밭을

축촉하게 적셔주는

 

은혜

 

 

근황이후

 

요즈음 흙과 노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

목젖을 씰룩거리며 꿀떡꿀떡 단비를

빨아대는 흙의 모습은

볼때기라도 한줌 꼬집어주고 싶도록 귀엽다

포실포실 분가룰 날리는 엉덩이도 예쁘고

쌔근거리는 숨소리도 예쁘고

단내가 배어 있는 불그레한 귓부리도 예쁘다

저에게 조금만 관심을 보이고 예뻐해 주면

좋아라 방실거리며

더 실한 것 더 좋은 것으로 되돌려주고 싶어 하는

의젓하고 대견한 녀석

 

은혜도 사랑도 입 싹 닦고 고개 돌리면

그만인 세상에

은혜를 은혜로 아는 정직한 녀석

 

가꾸고 꾸미지 않은 나를

땀으로 얼룩진 나를 더 좋아하는.

 

초록빛 입맞춤

 

반갑다는 건 덥석 손이 맞잡아지는 것

얼굴을 비비고 싶은 것

기쁨이 찰랑찰랑 발목을 적시는 것

깊은 산 속에 드문드문 서 있는 토종 소나무

거기 매달린 단단하고 야무진 솔방울들

친하지 않은 향긋하고 포근한 냄새

계곡을 휘돌아온 물소리가

어서 오라고 아는 척을 하면

숫용추 치마바위 지나서

유난히 아담하고 청정한 적송 한 그루

내 가슴에 쏟아 붓는 향긋한 초록빛 입맞춤!

 

 

소도 언덕이 있어야

 

풀 한 포기 밭 한 뙈기 없는 주제에 그래도 두 눈 끔뻑끔뻑하는 소 한 마리는 몰고 다니지 이 소라는 게 바로 장신구요 트레이드마크라는 거야 어느 곳이나 명함을 대신하여 소의 고삐를 불쑥 내미는데 그 커다란 눈이며 코며 입을 벌쭉거리는 게 썩 잘 어울린단 말이다 분위기가 있어 하지만 소도 언덕이 있어야 바람도 쏘이고 간간이 입질이라도 해대지 가려운 등짝이라도 비벼대지 잘난 척 끌고 다니지만 춘삼월 문가에 앉아 아지랑이를 바라보는 그 젖은 눈매와 봄 햇살에 단내 풍기는 더운 콧김을 어찌 다 막으려고.

 

 

코디네이트

 

“여름살이 오른 콩밭 열무엔

불린 고추를 갈아 담아야 제 맛이 난단다“

 

우툴두툴한 주먹만 한 돌이면 충분했다

탱자나무 한켠 늘 그 자리에 버티고 앉은

꺼칠꺼칠한 학독은 항상 붉게 젖어 있었다

불린 고추에다 반섞이 보리밥 두어 숟갈을 넣고

갈아내면 커다랗고 억센 어머니 손등은

황토색으로 젖어들기 시작했다

함경도의 억새바람만큼 빠르게

학독 속 열무김치는 버무려졌다

어머니는 항상 고향을 등에 지고 다니셨다

가는 곳마다 풀어놓고 버무리려 애쓰셨다

‘내래 죽기 전에 꼭 고향 한 번 가 볼기다“

먼 곳을 바라보던 젖은 눈매는

열무김치 담글 때의 매운 눈빛이었다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는 황토빛이었다

경기도 양주군 장흥리 공원묘지에 내리쬐는

뜨거운 여름 햇살이었다

 

콩밭에서는 툭툭 열무의 살이 불어나고 있었다.

 

  

 

이 섬 시인의 시 리뷰

-김 주 혜(시인)

 

따뜻하고 사람 좋아하는 이 섬 시인은 대전에 산다. 초대든 급습이든 이 시인의 집을 방문한 적이 많았던 나는 대전, 하면 이 섬이 생각나고 이 섬, 하면 대전이 떠오른다. 가끔씩 몹시 아프고 외로울 때면 대전으로 달려가고만 싶었던 날도 여러 번 있었다.

섬 시인의 음식 솜씨는 자타가 공인한 실력가이기에 몸과 영혼이 씻겨 내려갈 것만 같은 열무김치 맛이며, 대나무 소반에 받혀 내놓는 손수 기른 상추며 깻잎의 향그러운 내음이 그리운 탓이기도 하리라.

 

이 섬 시인과는 오래 전에 시창작 모임에서 알게 되어 동인(시와함께)까지 한 사이지만, 나는 그녀가 꼭 죽마고우처럼 느껴진다. 그녀는 시인으로서의 오만도 없고, 허세도 없으며, 언제나 말없고 겸손하고 순박하기가 우리네 농촌에서 보는 친근한 암소만 같다. 누군가 허세로 장신구처럼 내세우는 그럴듯한 소가 아닌 살맛나는 진국의 시인이 바로 이 섬, 그녀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시 행간 행간에서는 반가운 봄비가 내린다. 이 시인이 기독교신자이기 때문은 아닐 터이지만 실제로도 그녀의 손길은 메마른 사람의 가슴을 촉촉이 적셔주는 은혜로움이 느껴지니 그녀의 시에는 가식이 없다. 시를 쓰는 사람은 적어도 흙처럼 정직하고 흙처럼 은혜를 알고 땀에 젖은 사람을 반길 것이라고 여겨서 그녀는 시 쓰는 사람을 한결같이 좋아한다. 어느 모임에서든지 만나면 덥석 손부터 잡고 끌어안으며 "대전으로 놀러 와~ " 하며 향긋한 초록 입맞춤을 건네주는 그녀의 눈빛에서 나는 가꾸고, 꾸미지 않은 그녀만의 독특한 땀내음를 맡는다. 이섬시인 뿐만 아니라 대전 시인들에게 언제고 놀러오라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대전이 꼭 내 친정처럼 느껴진다.

 

시를 쓰는 동안 짬짬이 그녀는 집앞 텃밭으로 나가 붉은 황토와 논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타인을 위한 텃밭 가꾸기에 그녀는 혼신을 다한다. 황토와 대화를 나누고, 바람에 맞춰 푸성귀와 춤추며,  햇빛과 더불어 ‘댄서의 순정’을 간드러지게 부르는 이섬시인은 세상에 대한 욕심은 없으나 시에 대한 정열과 욕심만은 타인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 섬시인의 시가 성자의 삶을 닮아있는 것 또한 우연이 아니다. 소에 비유한 삶 또한 그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소가 비빌 언덕이라 표현한 것은 그녀가 믿는 절대자가 아닐까 한다.  허세와 가식을 장신구처럼 달고 다니는 글쟁이 혹은 군상들에게 소처럼 낮게 낮게 허리를 낮추고, 고개를 낮추며 겸손하고 정직하게 글을 쓰라는 경고를 시 곳곳에서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