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신자 교리방

예수님의 생애

주혜1 2011. 6. 4. 22:32

오늘부터 우리는 예수님께 시선을 집중시켜서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이르는 길을 통해서 그분이 왜 우리의 구세주이시고 또 어떻게 구원하셨으며 지금도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가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오늘은 그 첫번째 시간으로, 예수님의 생애 전반에 대해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신약성서 중에서 네 복음서를 펼쳐 보아야 하겠지요.  그런데 네 복음서를 모두 종합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출생에서부터 죽으심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생애를 온전히 재구성할 수는 없슴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약간의 유년시절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만 그 이후로 갑자기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타나 활동하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복음서 자체가 예수님의 전기나 그분의 경력을 객관적인 연대기식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던 그분의 제자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오늘 이 시간에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오신 예수님의 생애를 그분의 3년간의 공적인 활동을 통해서, 다시 말하자면 그분의 말씀과 기적, 행적들을 복음서의 내용을 토대로 공부하기로 하겠습니다.

 

전 개

 

1. 공생활의 시작

 네 복음서는 예수님의 공적인 등장에 앞서서 세례자 요한의 활동에 대해 공통되게 전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낙타털로 옷을 해 입고 광야에서 절제와 고행의 생활을 하면서, 역사 안에 나타나실 하느님의 임박한 도래를 위해 동료 백성들을 준비시키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마태 3, 2)라는 요한의 외침에 많은 군중들은 관심을 기울였고 또 그에게 조언을 청하며 회개의 표시로써 '세례'를 받고자 몰려 들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며 설교하던 요한을 직접 찾아가시어 세례를 받습니다.  그런데 세례에 앞서 요한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께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칭호로 인사하면서 오히려 자신이 예수께 세례를 받아야 할 자라고 고백함으로써 바로 예수님이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아이심을 공적으로 증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당신의 30년간의 사생활을 마치시고 당신 본연의 사명을 수행하는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셔서 그곳에서 40일간 주야로 단식하시며 기도하십니다.  복음서에 의하면 이 기간 동안 예수님은 악마로부터 유혹을 당하시는데 그 유혹은 '빵과 권력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의심의 유혹'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악마는 하느님의 사명수행을 위해 준비하시는 예수님께 그 사명을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으로 이해시키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모든 유혹을 물리치시고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행하고자 하십니다.

 

2. 예수께서 선포한 기쁜 소식

마르코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전교를 시작하시며 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5)라고 전해 줍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다가온 하느님 나라는 어떤 것이며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루가 복음서를 통해 잠시 살펴 보기로 하지요.

- 루가복음 4, 16-21을 읽음

예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 전하고,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 주고 눈 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기 위해서 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로마제국이라는 이교민족에게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억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들을 구출하여 유다인의 독립국가를 세우고, 질병과 재해 그리고 굶주림을 제거해 주실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러한 표면적인 행복이나 자유보다도 더욱 근본적인 것, 인간이 참으로 인간답게 살아 가는 데 없어서는 안되는 것, 그것이 없이는 인간의 진정한 성취도 완성도 있을 수 없는, 그리고 인간의 삶을 참으로 충실하게 하고 결코 없어지지 않는 결실을 가져 오는 것을 여기서 알리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음, 즉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쁜 소식과 하느님 나라는 그분의 설교 말씀과 기적 이야기 그리고 그분의 삶 자체를 통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전해집니다.  따라서 이제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 그리고 그분의 행적에 대해 보다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3. 예수님의 기적

예수님은 첫번째 기적을 당신이 자라시던 곳에서 멀지 않은 '가나'라는 동네의 어느 혼인잔치 집에서 행하십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청원으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요한 2, 1-11).  이것은 예수님의 많은 기적 중에서 첫번째 기적이었습니다.  성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예수께서는 무수히 많은 기적을 행하십니다.  성난 파도와 바람을 잠들게 하시고(마태 8, 23-27), 악령 들린 사람을 구해 주십니다(루가 4, 31-37).

예수의 명성은 이런 사건의 놀라움과 함께 멀리 퍼져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접근하려는 강한 소망을 불러 일으킨 것은 그분의 많은 치유기적 때문이었습니다.  예수의 제자인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음을 아신 예수께서는 그를 즉각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게 고쳐 주셨고(마태 18, 14-15), 12년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인을 낫게 하셨으며(마태 9, 22) 당시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으로 간주되던 나병환자들까지도 온전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루가 7, 11-19).  그래서 이제는 예수님이 모든 병자들의 희망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루가 복음서가 전하는 중풍병자의 치유이야기를 잠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  루가 5, 17-25을 읽는다.

예수께서는 중풍으로 수족이 마비된 사람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중풍병자가 이전에 심한 죄를 지었기에 병을 얻었고 그래서 예수께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신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중풍병자'라고 표현된, 하느님 대전에서의 불행한 인간이 많은 군중을 헤치고 더욱이 지붕을 뚫고 들어갈 정도의 그의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께 나아갔고 그분께로부터 인정받게 되었고 또 받아들여져 새롭게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 모인 우리들 중에 아무도 중풍환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육체적인 중풍, 질병은 없을지라도 하느님 대전에서는 병든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인간사회 안에 살면서 많은 사람들과 만나며 그 가운데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또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자기가 가장 신뢰하던 사람으로부터의 배반 혹은 혼신을 기울이던 일의 좌절 또는 주위의 가까운 사람들의 불의의 사고나 죽음 등으로 몸과 마음이 부서져 일어서기 어려운 경우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가 우리에게는 중풍병자와 같이 일어설 수 없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 우리는 술이나 쾌락에 탐닉하거나 무의미한 잡담 등으로 우리 자신을 잠시 속일 수는 있겠지만 하느님 앞에 떳떳하게 나설 힘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때야말로 우리에게는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약한 자신을 하느님께 바쳐드려야 할 때인 것입니다.  이렇게 상처입고, 부서진 자신을 숨김 없이 예수님께 내보이며 그분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 새롭게 되고 새로운 출발의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일어설 수 없어도, 하느님의 은총을 믿을 때 하느님이 그 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대로 하여라, 일어나 요를 걷어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은 우리가 지금까지 짊어지고 온 일체의 과거의 올가미를 벗어 버리고 이제 여기서 새롭게 출발하라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이 고뇌와 모순에 찬 세계 속에서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그것에 대항해 갈 힘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기적과 치유의 행위를 통해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불가사의한 기적을 통한 믿음의 강요나 군중들의 흥미유발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비참한 상태에 놓인 인간을 다시 회복시키려는 그분의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길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인간이 '예리고의 소경'(루가 18, 35-43) 처럼 삶의 어둠의 상태에 머물지 않고 인생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도록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때에 그분은 우리 신앙의 빛으로서 우리에게 신앙의 눈을 뜨게 해 주신다는 것, 바로 이것이 기적을 통해 우리에게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4. 예수님의 설교

 군중들을 당신에게로 끌어당긴 다른 매력은 그분의 설교였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단순하며 동시에 심오한 것이었습니다.  문맹자들도 그분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었고, 교육을 많이 받은 이들도 그분의 지혜와 심오함에 경탄하였던 것입니다.  적개심을 가지고 그분을 염탐하러 갔던 사람들까지도 "저희는 이제까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요한 7, 46)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대부분의 이야기를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그 비유들은 거의 생활주변에서 나온 것들로,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 인간사, 율법 등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무지한 군중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하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전 생애를 통해서 지향한 목표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하느님 나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기도하시고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토록 힘 주어 말씀하시며 가르치신 '하느님 나라'란 과연 어떤 것인가를 우선 마태오 복음서 5장의 유명한 산상설교의 대목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 마태오 복음 5장 3-10절을 읽는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다만 하느님께 의지하는 자'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재능이나, 건강, 인간관계 등은 마지막까지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희망을 하느님께 두고 자기의 행복을 오로지 하느님께만 바라는 사람입니다.  눈을 볼 수 있게 해 주기를 바란 맹인이나 예수와의 만남으로써 다시 일어설 힘을 받고자 했던 중풍병자와 같이 말입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하느님만 믿고 살아가는 사람은 박해를 받거나 손해를 보거나 비애를 느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 그러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충실로 말미암아 때로는 자기가 안주하던 땅에서 쫓겨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참고 결코 악을 악으로 갚으려 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 약속의 땅에 들어갈 것입니다.  권력자에게 아첨을 하거나 사교 수완이나 능숙한 흥정으로써 자기의 이익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올바른 심판이 행해질 것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가 완성될 때 만족한 행복과 진정한 기쁨을 발견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하고 동시에 하느님의 나라는 과연 어떠한 것인지,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준비를 해야 하는 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한마디로 말해서 하느님을 참으로 하느님으로써, 인생의 기준, 사회의 가치 기준으로서 받들어 모시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 세계의 정의와 평화의 질서가 실현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죽음 후에 다가올 나라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사는 이 지상에서부터 시작되고 준비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지금 벌써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마태 13, 31-33)로 말씀하십니다.

우리 자신의 힘은 보잘 것없는 것이지만 하느님의 창조 사업이 행해지기 위한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우리도 소위 전능한 역사(役事)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 지상에 세우는 것입니다.  보잘 것 없는 이스트균이 빵 전체를 부풀리듯이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 행동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를 최대의 가치로 여기고 살아갈 때 그것은 사회 전체를 개혁하는 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한편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야 할 우리 인간에게 예수께서 호소하시는 것은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마태 22, 35-40)입니다.  이 사랑이 모든 예언서와 율법의 골자이며 요약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사랑으로 봉사하는 삶을 사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우리에게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삶은 바로 하느님의 다스림의 징표이기 때문입니다.

인정이 메말라 있는 세상에, 사랑이 없는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자라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결단 즉 회개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회개는 단지 마음을 고쳐 먹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가던 길과는 정반대의 길로 되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세상의 것과 영합하지 않고 하느님께로 몸을 돌리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통치, 즉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실현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조건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봉사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겨자씨와 같은 작은 씨앗을 자라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5. 예수님의 행적

 예수님의 기적과 설교보다 더욱 강한 인상을 주는 가르침은 그분의 행적 즉 생활자체였습니다.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은 인간의 고통과 괴로움에 대한 깊은 연민의 정에 있었습니다.  이때의 연민이란, 단순히 이웃의 불행을 보고 그것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려는 마음뿐 아니라 그 불행 속에 들어가 불행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인간의 고통을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고통을 당신의 어깨 위에 짊어지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 죄인과 창녀, 세리들을 감싸고 가까이 하셨으며 때로는 그들의 손님이 되시고, 같은 식탁에서 함께 음식을 나누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가난한 자와 불쌍한 자들 그리고 모든 인류에 대한 봉사자로 오셨다는 것을 과월절 만찬 때에 명백히 보여주십니다.  섬김을 받으로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는 당신의 말씀을 실천하시어 마치 종이나 노예처럼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기까지 하신 것입니다(요한 13, 15).  결국 예수님은 당신의 이러한 봉사적 삶을 통해서 사람들을 당신의 가르침과 하느님의 계획 속으로 불러들이고 계시는 것입니다.

또 한편 당신께서 행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세상 끝 날까지 계속 지속시키기 위해 예수님은 새로운 공동체, 즉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추종하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사도들을 선택하셨고(마태 10, 1-4), 그들을 당신의 복음선포 활동 안에서 늘 동행하게 하시어 오랫동안 교육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선교활동에 파견되었던 그들은 예수님의 힘과 권위, 그분의 능력을 전해 받았고(마태 10, 1), 오늘날 교회의 살아있는 신앙 안에서 예수님의 기적과 말씀과 행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종합 심화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활 전반에 걸친 그분의 살아있는 설교, 우리에게 일어설 힘을 주시고 볼 수 있게 하시는 기적들, 그리고 인간의 고통을 함께 나누시며 인간에게 봉사하시는 예수님의 봉사적 생활 자체를 살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바로 자비하시고 사랑이 넘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현존을 드러내는 것이며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 다가온 하느님의 나라는 결코 죽어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우리 모두가 회개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사랑의 생활을 함으로써 작은 씨앗과 같이 하찮게 보이는 하느님 나라가 크게 자라고 성장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 나라는 세상의 권력과 같이 강제적인 폭력이나 억압으로 지배되는 세상이 아니라 사랑과 봉사로써 다스려지는 세상이라는 것,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 모두를 이 하느님 나라에 초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우리의 결단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하느님의 자비로운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까지 추구해 왔던 세속의 가치관을 버리고, 때묻은 과거의 올가미로부터 벗어나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과감한 결단이 요구됩니다.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자유로운 결단을 통해서 당신의 초대에 응해 주기를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응용 실천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첫번째 일은,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과 함께 지난 날의 온갖 세속적인 욕망과 집착을 벗어 던질 수 있게 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진정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상처입고 나약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볼품없고 약한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감싸 주시고 받아들여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겸손되이 우리를 내어 드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루하루의 삶이 회개의 연속이 되게 함으로써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그 사랑으로 우리도 이웃에게 봉사하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실현시키는 사랑의 삶이란 엄청나게 크고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시선을 내 자신에게만 고정시키지 않고,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일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봉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나는 내 성의를 다해서 봉사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기로 하면서 오늘 이 시간을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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