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살아있었던, 혹은 살아있는 그 누구도 하느님을 직접 보고, 만져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과거 역사의 체험 속에서, 또는 현재 인간의 희노애락과 자연의 체험 속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추측해 내고 느낄 수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번 시간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체험한 하느님은 과연 어떤 분이시며, 그러한 하느님이 우리와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이미 배웠듯이 구약의 창조의 하느님과 구원의 하느님을 통해서 하느님이 이 세상 모든 자연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참으로 경이로운 것들로 가득차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거대한 것을 보면 광활한 하늘을 진홍 빛으로 물들어 놓은 석양이라든가, 밤하늘에 총총히 들어 찬 별들, 숲속에 치솟은 나무들 사이로 비추는 신비로운 몇 줄기 빛, 눈 덮인 산봉우리들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모습들, 이런 모든 것들은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해주고 경외감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저는 고등학교 시절, 영어시간에 배운 헬렌켈러에 대한 이야기가 아직도 강한 인상으로 남아있습니다. 숲속을 두 시간 동안이나 산책하고 온 친구에게 헬렌켈러는 "무엇을 보았냐"고 그 친구에게 물어봅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고 이야기합니다. 헬렌켈러는 그 친구가 어떻게 두 눈과 건강한 몸을 갖고 있으면서도, 아무 것도 보지 못할까? 어떻게 그리 무심히 자연을 보고도 지나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장님인 그녀는 꽃 한송이의 향기로움, 산들거리는 바람소리 조차도 그저 경이롭고 신비스럽기만 하다며 이러한 섭리를 주관하시는 분의 체취를 느낀다는 내용입니다. 또 제가 어떤 책을 읽으면서 경이롭게 느낀 것은, 새 중에 알레스카에 워불라는 새는 무게가 20g 밖에 안되는 아주 가벼운 새라고 합니다. 그런데 본능에 의해, 알렉스카에서 캐나다로, 캐나다에서 영국으로, 영국에서 아프리카의 우세풍을 타고, 남아메리카 까지 6,000미터 상공에서, 3,800km를 날아간다고 합니다. 또 세쿼이어 나무라는 식물이 있는데, 이 나무의 씨는 애끼 손톱의 1/10도 안되는 아주 작은 씨입니다. 그런데 다 자라면 세계에서 제일 큰 나무가 된답니다. 높이는 90M 이상이고, 직경은 11M, 이것으로 집을 50채 지을 수 있다고 하는데, 뿌리가 1,200M, 수명은 약 3,000년이라 합니다. 정말 놀라운 자연의 신비를 보고 전능하신 분의 오묘한 섭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밖에 엄청나게 많은 경이롭고 신비스러운 자연을 덮어 놓고도, 우리는 생애의 끝이 가까이 오게 되면 흔히 별것 아닌 사소한 것에도 관심을 쏟게 됩니다. 친절한 말 한마디, 스치는 손길, 무엇보다 사랑 안에서 삶의 참된 의미를 발견합니다.
전 개
우리가 이 시간에 배울 하느님의 속성도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 삶 안에서 항상 깊이 체험되었던 그런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생명과 죽음을 주관하는 분이시며, 모든 삶에 함께 하시는 하느님입니다. 한 예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의 호흡이 곧 생명이라고 생각했고, 사람이 죽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서 그분 자신의 숨을 거두어 가셨기 때문에, 그래서 그가 죽게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살아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분 자신의 숨, 곧 그분의 '영'을 그 사람 안에 계속 불어 넣어주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삶 안에서 하느님이 활동하신다고 믿었는데, 그들의 출생이라든지 자손의 번성, 농작물의 수확, 심지어는 전쟁까지도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하시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만일 전쟁에서 그들이 패배했다면 자기 편의 장군이 어리석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이 적군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우리는 너무 편파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과학의 최첨단을 살고 있다는 우리들의 사고방식은 과연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기만 하다고 생각합니까? 만일 여러분의 아프던 머리가 나았다고 가정합시다. 이스라엘 사람들 같으면, 하느님이 낫게 해 주셨다고 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 같으면, "하느님은 무슨 얼어 죽을 하느님이야! 아스피린 한 알 먹고 나았지"라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 아스피린이란 약을 만들 수 있는 인간의 두뇌와 그 약의 재료는 누가 만들었습니까? 사실은 하느님께서 그 약을 통해서 여러분을 낫게 해 주신 것입니다.
사실 고대에는 모든 삶의 영역이 모두 신성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샤머니즘적인 신앙으로 볼 때, 우리는 옛 사람들이 바위나 태양, 나무나 물 등을 신성하게 여기고 숭배하는 것을 보고 무조건 미신이라고 배척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바위나 태양, 그 자체가 인간보다 더 신성하고 위대하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지닌 본질이나 속성이 영원하고 무한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 와서 그 신성한 영역은 매우 좁혀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그리스도교인들이 전체인구의 상당한 숫자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이 세상이 아직도 불의와 부조리, 고통과 악이 만연한 이유는 그들의 일상의 삶 안에서 하느님을 느끼지 못하고, 하느님을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역사 안에 드러난 하느님은 과연 어떤 분이 신지 살펴보겠습니다. 그 전에 한 가지 유의할 점은, 하느님은 어떤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물질을 분석하여 그 물질의 성질과 특성을 알아내듯이 하느님에 대해서도 논리적으로 밝혀낼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은 이스라엘 백성의 체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속성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우리의 삶과 연결시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하느님의 속성 중에서 중요한 사실은 하느님은 오직 한 분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구약성서에 신명기란 책을 보면, "너 이스라엘아 듣거라, 너의 하느님은 오직 한 분 뿐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 "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물론 하느님은 '하나다, 둘이다' 라는 숫자로 파악되는 분이 아니지 만은, 특별히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일신 신앙을 고집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그 이유가 있습니다.
모세가 에집트에서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탈출한 후 가나안 복지로 정착하기까지, 이미 정착하고 있던 주변 민족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그들의 여러 신들을 알게 되었는데, 그럼으로써 다른 나라 신들에게 빠지게 되어 종교적으로 타락하고 정치적으로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시간에 이미 배웠지만, 이스라엘이 남, 북으로 갈리고, 바빌론에 유배가게 되서는, 민족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구심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과 지도자들은 그들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유일하신 하느님의 신앙을 강조하게 되었고, 하느님을 올바로 예배하고 그분의 법을 준수하는 것만이 이스라엘이 해방되고 구원받는 길이라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느님이란 호칭말고, 하느님을 달리 표현하면 어떤 표현이 있읍니까? (절대자, 창조주, 구원자 ..... ). 하느님의 이름이 뭔지 아시는 분 있습니까? 성서에 보면 하느님에 대한 호칭으로 야훼, 엘신, 혹은 여호와라고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다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다른 것과 구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그 이름 안에는 그 이름을 지닌 사람이나 사물의 본질의 의미가 함축적으로 들어 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출애굽기를 보면, 하느님은 당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계시해 주고 있는데, "나는 곧 나다"라고 말해 주십니다. 사실 정확히 말해서 이 번역은 의미가 조금 틀렸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 보다는 "나는 나일 나다"라고 미래적인 의미로 보는 게 좋을 것입니다. 이 말은 바로 하느님이 "누구를 위해서 여기 있다"라는 의미로서, 바로 하느님이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돌보신다는 뜻이 포함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 분이신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항상 돌보시는 분 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느님은 세상에 얽매이는 분이 아니시다.
그리고 두 번째, 하느님은 세상에 얽매이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서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신상도 만들지 말라고 명령을 하는데, 신상을 금지하는 깊은 이유는 하느님은 근본적으로 그 기원이나 존재에 있어서 세상에 매여 있지 않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1) 초자연적이고 초민족적이고 초우주적인 하느님
그래서 하느님은 초자연적이고 초민족적이고 초우주적인 하느님이 되는 것입니다. 잘 이해가 안되실 것 같아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로마신화에 나오는 제우스신이나 비너스신 포세이돈 등과 같은 신의 이름을 들었을 겁니다. 이런 신들과 같이 이스라엘 주변나라의 신들도 역할이나 기능에 따라서 여러가지 신들이 있는데, 그 신들은 일정한 영역 안에서만 머물고 지배권을 행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하느님은 어떤 영역이나 혹은 어떤 부류의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이런 모든 것을 초월해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이웃 민족이 숭배하는 태양이나 달과 별까지도 초월해서, 우주만물을 다스리는 초자연적인 분으로 생각하게 된 겁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국한된 신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어 우리의 하느님도 될 수 있는 이유를 바로 성서가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기민족의 위대한 영웅까지도 잘못할 경우에는 가차없이 꾸짖고, 정의와 사랑의 법대로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당신 법에 의해 공평하게 다스리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나 하면, 구약에서 다윗왕이라하면 가장 경건한 인물 중에 하나로 손꼽히고, 아브라함의 후손, 다윗의 자손이란 칭호로 항상 대명사격으로 나올 만큼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이러한 다윗의 잘못까지도 가차없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가장 힘이 있다 하는 삼손의 잘못도, 가장 지혜롭다는 솔로몬의 잘못도 성서에서는 드러내 놓고 있습니다. 아마 성서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국한된 책이라면, 자기 민족에게 유리하게만 왜곡해서 편찬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모든 민족을 초월하고 모든 자연을 초월하여, 모든 자연 만물을 돌보시기에, 바로 우리 민족의 하느님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시간을 초월하시고 생명이 충만하신 하느님
하느님은 이렇게 모든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뿐만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시고 생명이 충만하신 분이라는 점에서, 단지 하느님이 몇 천 년 전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존재하셨던 분이 아닌,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란 사실을 우리는 깨닫고 느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역사하심을 시편 139편이 잘 표현해 주고 있는데, "당신 생각을 벗어나 어디로 가리이까? 당신 앞을 떠나 어디로 도망치리이까? 하늘에 올라가도 거기에 계시고 지하에 가서 자리깔고 누워도 거기에 계시며, 새벽의 날개 붙잡고 동녁에 가도,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자리를 보아도 거기에서도 당신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 그 오른 손이 나를 꼭 붙드십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간이란 제한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변화는 이 시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람이 태어나고 성장해서 온갖 명예와 부를 누렸다고 해도 죽기 마련이고, 씨가 자라서 줄기가 되고 잎이 되고, 기가 막히게 화려한 꽃을 피웠다 하더라도, 시간 안에서는 꼼짝 못하고 시들고 맙니다. 바로 시간 안에서 모든 만물은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변한다는 것은 불완전하다는 뜻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이 시간을 초월한다는 것은 완전하다는 말이 됩니다. 불교에서는 연기설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모든 세상만물은 반드시 어떤 이유로 인해서 있으며 서로 관계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이고 부모님은 또 조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이고, 이렇게 무한대로 나가면 분명히 처음 시작을 가능하게 한 분, 다시 말해 시간을 설정하신 분이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구약성서의 제 2이사야에서는 "하느님이 시작이요 마침이시다" 라고 표현하는데, 신약의 예수님은 당신이 알파요 오메가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즉 하느님은 시작과 마침을 주관하는 분, 즉 모든 생명의 시작과 마지막을 주관하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3) 거룩하신 하느님
다음으로 하느님의 속성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당연합니다. '거룩함'이란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아니 종교를 안가진 사람들도 동경하고 가치를 두는 단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세속적인 것과 다른 것을 거룩하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성당이 거룩하다는 것은 성당 건물 자체가 거룩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느님이 현존하고 계시기에 거룩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이 거룩하심은 인간의 어두운 양심을 밝게 비추시며 빛으로 인도하시는 그분 자체에서 나오는 거룩함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3. 인격의 하느님
하느님이 초월자이시며, 거룩한 분이면서도 우리와 만남을 이룰 수 있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감성과 이성과 지성을 지닌 인간으로 만들었듯이 그분도 바로 최고의 이성과 지성을 갖춘 인격적 하느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창조의 하느님'에서 배웠듯이 거대한 우주만물의 질서, 정교하게 설계된 창조물들은 결코 우연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이 인격적으로 우리와 통교한다는 사실은, 구약 안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에서 잘 표현되고 있는데, 그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로서 혹은 목자로서 때로는 임금으로서, 남편으로서, 해방자 등으로서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을 아버지로 표현할 때, 이 아버지라는 상징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특수한 관계로 표현할 때 사용합니다. 호세아 예언서에 보면 이러한 표현이 아주 감동적으로 우리에게 와 닿으면서, 그 분과의 친밀함을 더욱 느낄 수 있게 합니다. "내 아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나는 그가 너무 사랑스러워 내 아들을 에집트에서 불러내었다."라는 표현이라든지, "나는 내 아들을 인정으로 매어 끌어주고, 사랑으로 묶어 이끌고,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에 비비기도 하고, 허리를 굽혀 입에 먹을 것을 넣어 주었지만, 내 아들은 나를 몰라본다" 이러한 표현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아버지같이 무조건적으로 얼마나 참된 사랑과 애정을 쏟고 계신지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버지라는 표현을 했다고 해서 하느님을 남성으로 보는 것은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인간의 성을 초월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고대의 종교나 신화에서는 남자의 남근을 우주의 풍요성의 상징으로 받들고 숭배하던 이이 있었기 때문에 성서에서는 이러한 오해를 배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목자이시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체험에서 나온 표현인데 그들이 유목민 시절에 가장 보편화된 직업 중에 하나가 목자라는 직업이었습니다. 양떼들에게 목자라는 위치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입니다. 양떼들의 양식인 풀밭으로 인도하고 늑대나 다른 위험한 동물로부터 보호하는 임무가 바로 목자의 임무입니다. 바로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생활체험에서 나온, 양떼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목자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구원을 베푸시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구약성서에는 이렇게 좋은 표현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전쟁의 하느님, 벌을 내리시는 하느님, 두려운 하느님 등의 여러가지 표현으로, 하느님의 화내실 때도 있고, 증오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화내시다가도 후회하실 때도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혹시 여러분 중에는 전지전능하고 무한하신 하느님이 어떻게 인간과 똑같이 묘사되고, 인간과 똑같이 감정표현을 하느냐고, 성서를 좀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느님을 인간과 똑같이 묘사하는 것은 하느님이 인간의 세계를 초월하여 단지 생각 속에서나 공상 속에서 계신 것이 아니라, 살아있고 생활하시는 분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더 나아가서 우리를 염려하시고 돌보아 주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 사랑의 하느님
마지막으로, 하느님에 대해서 가장 중요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의 하느님이란 점입니다. '사랑'이란 단어는 누구든지 가슴 설레이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랑으로 힘을 얻고, 절망 속에서도 사랑 때문에 희망을 갖습니다. 사랑에는 아버지가 자식에게 베푸는 무조건적인 사랑, 남녀간에 로멘틱한 사랑, 친구간의 우정 어린 사랑 등의 여러가지 사랑의 형태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의 원천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바로 하느님의 최고의 사랑은 당신 자신이 우리를 위해서 인간의 모습을 취하셔서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바로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그 믿음 하나만으로도 우리 삶에서 모든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종 합
이제까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 가를 배우면서 하느님은 한 분이시며, 세상을 초월하시고, 시간을 초월하시며, 거룩하시고 최고의 지성과 인격을 갖춘 분이시고 사랑자체이심을 알았습니다. 또 그런 초월적인 하느님이 우리와 전혀 무관하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하시고 항상 돌보시고 사랑해 주심을 깨달았습니다.
심 화
산에 오르지 않고도 삶을 살아갈 수 있지만, 산에 올라가 보지 않고서는 산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런 기쁨과 신비를 결코 체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고서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별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를 내신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뜻대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 지고 아름다워 질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고통과 좌절, 근심과 걱정이 항상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지만,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함께 우리의 고통을 나누고 계신다고 믿을 때, 우리는 좌절하지 않고 희망하며 살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끝으로 오늘의 교리를 정리하면서, 꼬마성자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아주 아주, 굉장히 오랜 옛날에, 오래된 마을에 오래된 사찰이 있었습니다. 이 사찰엔 아주 영성이 훌륭한 스승님이 계셨는데, 그 분의 가르침을 받고자 많은 제자들이 속속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스승님을 존경했고 스승님도 제자들을 매우 매우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스승님은 한 제자에 대해서 각별한 정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 제자의 이름은 편의상 여러분도 잘 아시는 땡칠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렇게 스승님이 유독 땡칠이 만을 더 사랑하니까 동료제자들로부터 땡칠이는 시기와 미움과 질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머리는 부시시한 부싯돌이었고, 그렇다고 잘 생기기나 했나, 공부를 잘하나, 항상 좀 덜 떨어진 사람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동작도 완전히 반템포였고, 제자들이 서로 신이나 진리에 대해서 토론할 때면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입 한번 뻥끗 못하고,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서 남이 하는 이야기를 듣기만 했습니다. 보다 못한 제자들이 땡칠이한테 질문이라도 하면, 땡칠이는 "난 단지 방금 전 너희들의 이야기에 동감해"하면서 배시시 웃곤 했습니다. 옆에서 그걸 보고 있던 제자들은 기가 막혀 "넌 도대체 뭘 동감한다는 거냐?" 하고 빈정거리면서 물어보면 땡칠이는 다시 "너희들 의견은 여러 가지이지만 오직 진리는 하나이며, 모두 하는 말들은 같은 말이니까 동감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땡칠이가 매사에 이런 형편이니 제자들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같이 배우는 자체가 수치스럽고 존심상할 정도로 인식되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 마음같아선 짤라버리고 싶은데 도대체 큰 스승이 유독 사랑하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궁리만 하던 중 마침내 땡칠이만 빼고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회의를 열었습니다. 땡칠이에 대해 여러 의견이 나왔는데 그 중에는 땡칠이를 개패듯이 비오는 날 먼지나도록 패자는 주장도 나왔고, 모두 스승님한테 가서 단식투쟁 농성으로 땡칠이를 쫓아버리자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이렇게 시끌벅적 야단스럽게 떠드는 통에 큰 스승님이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제자들을 한 곳에 불렀습니다. 그리고 한 제자에게 새장에 새를 가득 담아오라고 시키고 제자가 새를 가득 담아오자 큰 스승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무슨 일로 이렇게 시끄러운지, 너희들이 나에게 항의할 게 있다는 걸 다 안다. 그렇지만 그 해답을 가르쳐 주기 전에 먼저 시험문제 하나 내겠다. 자! 여기 새가 새장 안에 가득히 들어 있다. 너희들은 다 한 마리씩 꺼내 가지도록 해라. 그리고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새를 죽인 후 그 죽은 새를 해질녁까지 가지고 오도록 해라. 반드시 아무도 안보는 데서 새를 죽인 후 그 죽은 새를 내게 가져와야 한다. 이것이 이번 종합시험문제이니 컨닝하지 말고 각자 풀도록 해라." 스승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제자들은 그 말씀이 무슨 말일까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머리굴리면서 새들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반면 땡칠이는 스승님의 말씀을 의심없이 믿고 새를 가지고 떠났습니다. 제자들은 고민고민하다가 서로 뿔뿔히 흩어져 아무도 안보이는 곳을 찾으러 다녔습니다. 어떤 이는 바위 뒤에, 어던 이는 동굴 속에, 어떤 이는 숲 속에서 몰래 새를 죽이고 해질녁에 임박해서 큰 스승님 앞에 죽은 새를 가지고 모였습니다. 그러자 스승님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였어?" 하고 묻자, 제자들은 일제히 "땡칠이만 빼고 다 모였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조금있다가 땡칠이가 헐레벌떡 새장 속에 살아있는 새를 들고 뛰어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본 제자들은 속으로 음흉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시간도 늦은 데다가 죽이라는 새를 그대로 살려놨으니 분명 땡칠이만 시험에 낙제할 것이 뻔할 뻔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스승님은 땡칠이를 가까이 불러서 "네가 죽인 새는 어디 있느냐?" 하고 묻자 땡칠이는 "그 새는 이 새장 속에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일제히 낄낄, 깔깔, 껄껄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속으로는 짜식 안됐어. 드디어 시비가 판가름 났구먼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웃음소리가 조용해지자 스승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좋다 그러면 어떻게 새가 죽지 않고 새장 속에 있는지 해명해 보도록 해라"하시자 땡칠이는 얼굴이 빨개져서 더듬거리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스승님, 스승님이 저에게 주신 말씀은 아무도 보지 않는 데서 새를 죽이라는 말씀이었는데, 저는 그런 장소를 도저히 찾지 못했습니다. 제가 가는 곳마다 어디를 찾아가든지 그곳에는 하느님이 계셨어요. 하느님이 보고 계신데 이 새를 어떻게 죽일 수 있겠읍니까?"라고 대답하자, 큰 스승님의 시선은 나머지 제자들에게 갔고, 그 제자들은 그 순간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제자들은 그 많은 진리를 스승으로부터 배웠지만 진정으로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교리를 통해서 우리도, 하느님이 단지 인간의 머리 속에 상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삶 안에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임을 느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현존을 느끼기 위한 간단한 묵상법을 하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모두 눈을 감으세요. 그리고 오른손을 심장에 가볍게 올려놓고 심장의 고동소리를 들어보세요. 그리고 숨을 3초간에 걸쳐 크게 둘이쉬고, 3초간에 걸쳐 크게 내쉬세요. 천천히 이 동작을 반복하세요. 숨을 들이쉬는 것은 생명이고, 내쉬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내쉬는 동작이 있을 대 숨을 들이마실 수가 있습니다. 숨을 들이마쉬면서 주님의 신선함과, 깨끗함과 그분의 자비와 사랑과, 고요함과 평화스러움을 생각하시면서 함께 마시십시요. 숨을 내쉴 때는 내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 불안, 걱정, 긴장, 응어리진 불순함, 교만, 아집, 모든 더러운 것을 함께 내 밷으세요. 이런 생각을 갖고 이 동작을 천천히 반복하세요.
주님, 나의 눈을 열어주시어 당신의 눈으로 바르게 볼 수 있게 하시고, 나의 귀를 열어주시어 당신의 음성을 항상 들을 수 있게 하시며, 나의 입을 열어 주시어 당신의 말씀을 올바로 전할 수 있게 하소서. 그리하여, 나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나의 모든 삶 안에서 당신을 뵈올 수 있게 하소서.
그러나 주여, 나의 생애에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날은 오직 오늘뿐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아멘
모두 눈을 뜨세요. 바쁘신 중에도 이렇게 나와 교리를 배우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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