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신자 교리방

신약성서의 인간관

주혜1 2011. 6. 20. 16:58

여러분은 전 예비 기간을 보내고 있는 과정으로서 이 기간 동안에는 인생에 대한 보다 깊은 사고를 해보고 나아가서는 철학적으로 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동안 삶의 의미 전체를 고찰하면서 종교와 신앙 문제를 공부하셨고 전 시간에는 구약성서의 인간관에 대해서 공부하셨는데 오늘은 신약성서의 인간관에 대해서 공부한다.

 

2. 성서란 ?

 

⊙ 뜻 : "거룩한 책들"이란 의미로서 하느님의 말씀이 기록된 오류가 전혀 없는 진리의 책이다.

⊙ 구분 :

구약성서 - 히브리인들이 에집트 종살이에서 나올 때 야훼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옛 계약에 대해서, 또한 이 계약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 나온다.  그 내용은 크게 모세오경과 예언서, 지혜서, 역사서가 있다.

신약성서 -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 자체를 바탕으로 하여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새 계약에 관한 이야기와 가르침이다.

⊙ 권수 : 73권(구약 46권, 신약 27권)

⊙ 저자 : 여러 사람.  저자를 모르는 사람도 있음.

⊙ 시대 : A.D(Anno Domini) 50년 - 100년경 사이에 쓰임.  서기, 불기, 단기  설명.

 

3. 인간이란

 

인간은 끝없이 진리를 찾고자 하며, 인간의 생(生), 사(死)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인간에게 부여된 창조력을 발휘함으로써 인간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한편 인간은 자신의 고통과 절망,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존재이다.  이러한 한계 앞에서 절대자 혹은 구원자를 요청하고 있다.

"나"란 누구인가? :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고유한 존재(독자성)로서 복잡하고도 신비로운 존재이다.

   1)+-----+----+

      | ①   | ②   |          ①은 나도 남도 나를 아는 부분.

      +-----+----+          ②는 나에 대해서 남은 모르고 나만이 아는 부분.

      | ③   | ④   |          ③은 나에 대해서 남은 알고 내가 모르는 부분.

      +-----+----+          ④는 나에 대해서 나도, 남도 모르는 부분.

   2) 나 : ①감각 ②정서 ③지성 ④의지(동물은 ①에 의한 본능적 수준이다). 

 

4.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드심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  그 인간은 혼자가 아니라 둘이 결합하여 살도록 창조되었다.  그 인간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이 다른 인간으로 창조되었다.  우리는 인간에 대해서 이해할 때 이와 같은 엄연한 두 성에 대해서 보다 깊은 인식과 파악이 뒤따라야 하겠다.

그럼 신약 성서 안에서의 남성, 여성에 대한 그리스도교 사상은 어떠한지 알아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이 신약성서 안에서(하느님 직접 계시) 어떠한 자리를 차지하고,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알아본다.

 

전 개

 

1. 신약성서의 인간이해

 

신약성서의 인간이해를 위해서는 구약시대의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 도식이 성립될 수 있는 지를 먼저 알아보는 것이 중요한 요건이 될 수 있다.  이른바 구약의 하느님은 무서운 분, 엄한 분, 벌 주시는 분, 감히 접근키 어려운 분 등으로 인간 편에서 이해하고 대했다고 할 수 있겠다.  하느님과 인간관계가 신약에 와서는 더 이상 그러한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해 두면서 신약의 인간 이해에 접근해 나가야 하겠다.

인간을 구상하고 있는 여러 가지 내적 외적인 요소들을 따로 따로 구별함으로써 추상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유한하고도 한계성을 지니고 살아가는 불완전한 죄인들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원래 출발점에서부터 삐뚤어진 비자연의 상태에서 원래 자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회복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회개 (회두, 회심)이다.  마음과 정신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서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는 인간관계를 요구하고 있다.  그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죄많은 우리 인간은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멸망하고 말겠지만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로운 생명으로 우리는 살아가게 되었다.  인간은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인간으로써 죽으셨고 부활하셨듯이 우리 인간도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부활을 맞이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 최대의 희망이요 신비요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신비로운 존재요, 하느님의 신성에 동참할 수 있는 성성(聖性)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남(男)과 여(女)로서의 인간

 

예수님 시대에도 여성은 남자에 종속되어 있었으며 사회적으로도 불평등한 처지에서 생활하였다.  예수님은 남녀 차별적 가부장적 사회 문제를 직접적으로, 공공연하게 뜯어 고치려고 나서지는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의 전 삶을 통한 언행을 살펴 볼 때, 여성이 남성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로 동등하게 부름 받았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났다.

예수님이 사시던 당시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뽑으셨는데 모두가 남자들이었지만 그들 무리에는 5명(막달라 마리아, 작은 야고버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그리고 헤로데의 신하 쿠자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 등)의 여성들도 있었다.  이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을 부양하고, 예수님의 임종식을 지키기도 했다(루가 8, 1-3).

예수님은 또한 당시 사회 전통에 의해 여성들에게는 닫혀 있었던 진리 탐구의 권리가 여성에게도 주어졌음이 재확인 되었다.  예수님이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때 언니 마르타는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었다.  그러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이런 상황 안에서 마르타는 마리아의 편안한 모습을 보고 불평을 터트렸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즉 "언니가 매우 바쁘게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으니까 마리아가 좀 거들어 주거라"식의 말씀이 아니라,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된다"(루가 10, 41-42).  예수님은 이와같이 전형적인 여성의 역할만을 지켜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있다.  성서 전체의 예수님의 사상을 보면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예수님의 처사는 당시의 인습을 깨뜨리는 가히 혁명적인 처사였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당시 유태교의 인습을 무시하고 자유롭게 여성들과 상종하신 것에 대한 글들이 신약성서에 많이 나오고 있다.  예수님의 발에다 비싼 향료를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은 여인이 있었는가 하면,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딸이 침대 위에서 죽어 있을 때, 예수님은 침대로 다가가서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 살려주셨고 사마리아 여인을 비롯하여 여러 신분의 여인들과 허물없이 상대하셨다.  예수님은 질병에 시달리는 여인들을 여러 번 고쳐 주셨다(마르 1, 29 ; 5, 24-34 ; 루가 13, 10-16).  또한 예수님에게 있어서 가장 큰 사건인 죽음과 부활의 현장에서도 여인들이 함께 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신약성서의 내용들은 구약 성서에서와는 달리 여성과 남성의 관계를 말해 주고 있는 이야기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구약에서는 합법적이었던 '이혼법'을 거부하시면서, 남녀의 동등권을 분명히 강조하였다(마르 10, 1-10 ; 마태 19, 1-12 ; 루가 16, 18).  따라서 남존여비의 사상은 그리스도 사상에 근본적으로 위배된다.

그럼 두 성(性)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구체적 분석은 상당한 논리 전개가 필요하므로 여기서는 본 논지의 성격상 피할 수밖에 없고, 다만 두 성의 관계는 비교에서 오는 우월성이라든가, 불평등한 힘의 차이라든가, 사회 가치 기준에 의한 두 성의 우열 판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 두고자 한다.  우리는 두 성에 대한 고유한 영역과 능력을 인정하여 받아들임으로써 비교 우열 관계가 아니라 동반 협조관계로서 받아들여야 하겠다.

 

3. 구원받은 인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것 하나만으로도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당시에는 감히 하느님의 이름을 대중이 알 수도 없었을 뿐더러, 더구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됨으로써 하느님과 보다 친밀한 위격적 관계가 이루어졌고 하느님과 가깝게 통교를 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비천하고 죄 많은 인간의 위치가 보다 들어 높임을 받게 되었다.  이 사실은 확실히 구약과 신약 사이의 혁신적인 변화이다.  그 모든 것이 가능케 된 결정적인 원인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느님의 외아들이 이 세상에 인간으로서 오셨다는 데 있다.  예수님의 탄생, 즉 강생, 육화라는 사실은 그만큼 크나큰 의미를 지닌 사건이다.  여기에는 엄청난 신학과 신비로움이 깔려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 그분은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시라는 것, 동시에 그분은 하느님이신 순전한 신이시라는 것 등의 일련의 불가사의한 교리들은 인간의 머리로는 납득키 어려운 신비에 쌓인 문제들인 동시에 우리 신앙인들의 신앙 대상들이다.  다시 말해서 신이신 분이 비천하고 유한하며 한계성을 지닌 인간이 되신 것이다.  이러한 엄연한 현실 앞에서 인간은 이제 신에게까지 접근하여 긴밀한 관계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고귀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충분한 자리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더 이상 비관적이거나 신과는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비천하고 죄많은 존재로서 만이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신과 같이 인간은 어느정도 거룩하게 될 수 있는 신비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인간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그 확연한 길을 열어 보여 주신 것이다.

신으로부터 비롯된 인간 모두가 다시 그분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아직 미완성의 도상에 있는 자들로서 이 세상에 있지만, 이미 완성에로 가고 있는 나그네 여정 길에 있는 인간들임을 복음은 전하고 있는 것이다.

 

☞  예수님의 가르침   [루가 12, 22-31]

 

                   □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아라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니 잘 들어라. 너희는 무엇을 먹고 살아 갈까, 또 몸에다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더 귀하고 몸이 옷보다 더 귀하지 않느냐?  저 까마귀들을 생각해 보아라.  그것들은 씨도 뿌리지 않고  거두어 들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곳간도 창고도 없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저 날짐승들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느냐?  도대체 너희 중에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일 수 있겠느냐?  이렇게 하찮은 일에도 힘이 미치지 못 하면서 왜 다른 일들까지 걱정하는가?  저 꽃들이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해 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결코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는 못하였다.  너희는 왜 그렇게도 믿음이 적으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거든 하물며 너희에게야 얼마나 더 잘 입혀 주시겠느냐?  그러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염려하며 애쓰지 말라.  그런  것들은 다 이 세상 사람들이 찾는 것이다.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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