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신자 교리방

육신의 부활

주혜1 2011. 8. 20. 08:39

* 육신의 부활이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문으로 여러분이 이미 배우고 외우신 사도신경에도 나오고 있는 육신의 부활을 공부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믿든 안믿든 육신의 부활은 교회의 신앙에 속한 내용입니다. 교회는 초세기부터 육신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고백해 왔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세례를 받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육신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고백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육신의 부활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믿기 힘든 사실로만 받아들여집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수 있는가?  육신부활이란 인간의 잔해인 뼈와 근육 등이 역사의 종말에 가서 하느님으로부터 새로 활력을 받아 다시 살아나게 되고 무덤이 열리고 새로운 육신이 생겨나 이미 천국에 존재하고 있는 영혼에 첨부됨을 뜻하는 것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이것은 우리 현대인들에 있어 얼마나 유치한 이야기인가?  우리는 이미 우리의 지상 생애에서도, 몇 년 후에는 지금 우리가 지닌 육신의 단 하나의 원자도 우리 안에 그대로 남아 있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무덤 속에서 완전히 부패된 인간유골의 소생에 대한 확신이라니 대체 무슨 말인가?  이러한 의문들이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들은 우리가 육체의 부활이라고 할 때 그 '육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서에서 말하는 육체를 올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이런 식의 오해를 하는 것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희랍 철학식의 이원론적인 인간관에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를 보면 그 당시에도 이러한 오해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지니고 있는 의문들은 여러분만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당시에도 이런 의문은 있었으며 복음서에서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질문한 내용 중에도 바로 이점에 나오고 있습니다. 성서를 한 번 읽어 봅시다.   (복음을 읽는다. 마르코 12,18 - 27)

여기서 예수님의 답변은 육신이 부활하고 나면 어떠할 것이라는 것보다 지금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답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도 한번 보도록 합시다 (성서를 읽는다. 고린 전 15,35 - 49).  바오로는 여기서 이 세상의 몸과 하느님의 새로운 천지 창조력에 의해서 부활한 몸과의 관계를 씨앗과 그 씨앗에서 성장한 식물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즉 이 세상의 생활은 말하자면 씨앗라는 것입니다.  그 씨앗이 없으면 식물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식물은 그 씨앗과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씨앗은 씨앗으로서 멈추지 않고 본래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새로운 모습으로 성장해 갑니다. 그와 같이 우리의  몸도 하느님의 창조의 역사에 의해서 완전히 새로운 몸으로 변형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의 생활은 부활할 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생활에 의해서 쌓아올린 것은 하느님의 창조력에 의해서 변형되고, 고양되어 영원한 생명으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신의 부활이라고 바오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서를 읽어 봄으로써 여러분은 이제 어느 정도 육신의 부활이 어떠한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어렴풋이나마 아시게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아직 설명이 충분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육체'라는 말이 지니는 의미입니다.  사실 성서에서 나오는 부활에 대한 어리석은 질문들이 바로 이 육체라고 하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롯된 것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질문들이 '육체'라는 말을 좁은 의미에서 알아들은 것에서 비롯된 것처럼 우리들 역시 흔히 육체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를 우리의 정신, 영혼과는 따로 떨어진 것으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입니다. 이것은 그리스인들의 이원론적인 인간관, 즉 인간의 구성을 육체와 정신으로 나누어서 생각하고 있는 것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 개

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렇게 문제가 되고 있는 육신의 부활에 대해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서  먼저 '육체'라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그리스도교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여러가지 인간관을 살펴보면서 알아보기로 합시다.

 

1.  그리스인들의 인간관

 

그리스인들은 인간이 죽으면 육체는 가고 영혼만 남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영혼에 비해 육체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영혼은 기원으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영원불변한 신적인 것에 가까운 것으로 보았고, 따라서 죽음은 영혼이  이 육신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라고 희랍인들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플라톤은 '진실된 철인은 죽음에 앞서서 이미 육체에서 영혼을 해방시키는 자이다'라고 까지 말할 정도였습니다.   희랍철학의 이러한 이원론은 후세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육체적인 것을 넘어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참된 삶이라는 견해가 전통적으로 굳어지게 됩니다.

 

2.  히브리인들의 인간관 (성서적 인간관)

 그리스인들의 사고가 분석적이고 합리적임에 비해 히브리인들의 사고는 우리 동양인들의 사고 방식과 비슷하게 포괄적이고 직관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인간을 보는데 있어서도 희랍인들과는 큰 차이를 보여줍니다. 히브리인들은 인간을 파악함에 있어서 희랍인들처럼 영혼과 육체를 따로 구분해서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그들은 항상 전체로서 인간을 바라봅니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창조물로서 靈과 肉의 합성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육체인 것입니다.  히브리적인 인간관(이것이 원 그리스도교적 인간관이라고 할 수 있다)에서는 인간을 가리켜 'nefesh'라고 합니다. 이것은 목구멍, 욕심, 입김 등의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글자 그대로 그 한 부분만을 의미하기보다 인간 전체를 의미하는 말로 쓰입니다. 어떤 한 부분을 빌어 전체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방식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일반적인 것이었습니다.

희랍인들은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표현함에 비해 히브리인들은 인간은 'nefesh'라고 표현하는데, 이것은 영혼 쪽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포괄적인, 종합적인 개념인 것입니다.  우리 표현에서도 '목 메인다'. '숨 막힌다'할 때 신체의 어느 한 부분의 용어로 어떤 영혼적인 상태까지 표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히브리인들도 그러한 식의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ruah'라는 표현도 있는데 숨, 호흡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 말도 역시 인간의 전체적인 것을 가르키는 말로 알아야 합니다.  희랍식으로 영혼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육체'를 의미하는 'basar'라는 말도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그 표현 방식은 항상 전체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셨음을 이야기할 때 성서는 말씀이 육(肉)이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점을 생각할 때 분명한 것은 육이 인간의 한 부분으로서의 신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성서에는 희랍적인 요소보다 구약성서의 히브리적 요소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구분한다든지 지성과 의지로 구별하는 등의 인간에 대한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이해는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인간 실존의 육체성을 강조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서간에 희랍적인 경향이 보이기는 하나 히브리적인 사상이 많이 남아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는 자주 靈과 肉을 대립시키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육체에 대해 평가절하시키는 면은 있지만 그렇다고 바오로가 희랍식의 철학적인 사고로 인간존재의 원리로서 영과 육을 대립시키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의 연약함과 하느님의 강인함의 대립에 대한 표현인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인간 전체를 하나로 보며 결코 분리시킬 수 없는 육체성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고린 전 15,42).  인간의 정신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감각을 통해야 합니다. 순수한 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3. 심리학적, 인간학적 연구에 의거한 인간관

희랍인들의 인간 이해보다는 히브리인들의 인간 이해가 많은 면에서 더 타당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현대의 심리학적, 인간학적 연구가 이를 뒷바침하고 있습니다.   육체는 인간의 자아에 부가된 첨가물이 아닙니다. 인간의 주체성, 자아는 결코 신체와 대립된 것이 아닙니다. 신체가 어떤 상황에서 물리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의미에 대한 상황에 대한 주체성의 반응입니다. 물리적으로 바깥으로부터 아무런 자극이 없는데도 신체가 반응하는 경우 (호흡이 가빠짐. 얼굴이 빨개짐 등), 그것은 상황, 의미에 대한 주체성의 반응인 것입니다.  우리의 생은, 신체적 삶은 결코 대상화할 수 없는 나 자신인 것입니다. 영이 신체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성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삶으로서의 신체이지 물건으로서 거기에 있는 것으로서의 신체일 수 없습니다. 현기증을 보면 직접적인 물리적, 신체적 이유로 생기는 경우도 있으나 심인성에 의하여 생길 수도 있습니다. 얼굴이 빨개짐도 마찬가지입니다.  난로 옆에 오래 있었기 때문에 얼굴이 빨개지는 것은 외부의 물리적 영향 때문이지만 부끄러울 때 얼굴이 빨개지는 것은 우리의 내면적인 상태에 대한 육체적인 표현입니다. 미각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속상한 일이나 걱정스러운 일이 있을 때 평소에는 그렇게 맛이 있던 음식도 전혀 맛이 없게 느껴짐을 경험합니다. 이러한 예들은 몸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전체로 살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삶이 즉시 신체와 연결되고 있는 것입니다. 무용을 생각해 봅시다. 동물의 경우 운동은 생식에 필요한 것에 관해서만 움직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 무용과 같은 것은 전혀 생식과 관계 없는 운동입니다.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움직임이 아닙니다. 그것 자체가 목적인 것입니다. 희비애락을 신체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신체가 삶과 직결되어 있음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예입니다.

 

결 론

* 육신부활은 인간 삶의 전체적인 부활

이제 우리는 '육체'라는 말을  단순히 좁은 의미에서의 육체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상의 삶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영위하는 삶, 그리고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친교, 그 모든 기쁨과 슬픔, 지금의 우리의 존재를 구속하고 있는 모든 것이 이 육체인 것입니다.  '나'라는 인간은 육신으로만 이루어진 존재도 아니며 그렇다고 영혼으로만 이루어진 존재도 아닙니다. '나'는 영혼과 육신이 합체되어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영, 육이 함께 움직이고, 함께 희노애락을 겪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한 인격체에게서  영,육을 분리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란 영.육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도 영혼과 같이 생명에 관여함은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부활 신앙에는 영혼만의 부활이 기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육신과 영혼이 하나로 합치된 새로운 모습의 삶을 의미합니다.   이제 육체의 부활이라는 말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못 생각했듯이 인간을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서의 신체, 썩어 없어질 유기물의 소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서 땅에 묻혀 있던 시체가 무덤을 열고 다시 살아나온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삶 전체가 부활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구원이 인간의 한 측면인 영혼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인간 전체의 문제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부활에 대한 교리는 인간이 누구인지 그리고 사람은 단순히 정신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全人間이, 즉 영혼에게서 활기를 받는 육체가 하느님이 맡기신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얼마만큼 중요한 일인가를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살도록 불린 것은 전인간이지 결코 육체와 분리된 영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전인간의 변형을 의미하는 육체의 부활은 그리스도 신자의 집단이 갖는 확실한 행복의 시작이며 또한 원천입니다.

 

종합 심화

인간의 삶 속에서 의의와 완성 그리고 전체성을 지향하는 모든 것이 실제로 충만에 이르는 것이 바로 육체의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이미 배웠듯이  당신의 아들을 부활시킴으로써 권능을 보여준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에 의해 비로소 증명됩니다.

그러면 이제 육신의 부활이  의미하는 바를 정리해 봅시다 :

1) 육신 부활이란 희랍철학에서처럼 인간이 자신의 불멸하는 영혼의 힘으로써 완성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그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행위를 통해서 충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2) 육신 부활이란 육신 없는 영혼이 하느님 안에서 최후의 고향을 찾기 위해 세상에서 이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출생하면서부터 세계와 사회 속에 편입되어 있으며 역사 속에서 자유롭게 삶을 영위하다가 마침내는 죽음에서 궁극적 존재가 되는 전인적인 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현세에서 육체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이룩한 모든 것을  그의 죽음 속으로 가지고 갑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느님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영원한 것으로 변형되는 것입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을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신의 부활이라는 교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전인적인 것이며, 그것은 또한 지금의 우리의 삶이 곧 부활의 준비가 된다는 뜻에서 모든 각개인이 처한 현실, 역사적 상황 안에서 각자의 소명을 충실히 수행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육신 부활의 교리를 대하고 그것에 희망을 품을 때 지금 현실의 삶을 보다 더 충실히 사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구성 □

육체와 영혼으로 단일체를 이루고 있는 인간은 그 육체적 성격으로도 이미 물질세계의 요소들을 한 몸에 집약하고 있으므로 물질세계는 인간을 통해서 그 정점(頂點)에 도달하고 인간을 통해서 그 자유로운 찬미를 창조주께 읊어드리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그 육체적 생명을 천시해서는 안될 뿐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 창조된 그 육체가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이므로  좋고 영예로운 것으로 알아야 하겠다.  그러나 죄로 상처 받은 인간은 육체의 반항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은 육체로도 하느님을 찬미하고 육체가 마음의 악한 경향을 따르는 일이 없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이 물질 이상의 존재임을 증명하는 동시에 자신은  자연의 한 조각이거나  인간사회의  한 무명요소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도 속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그 내적 품위로써 일체의 물질세계를 초월(超越)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마음속으로 돌아갈 때 이 깊이에 도달하는 것이고 거기에 인간의 마음 속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이  기다리고  계시며 하느님이 보시는 그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 짓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 앞에서 영적(靈的) 불멸(不滅)의 혼(魂)을  긍정하게 될 때 인간은 단지 물리적 내지 사회적 조건의 소산인 덧없는 환각에 속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깊은 진리 자체를 파악하는 것이다. [「사목헌장」, 14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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