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인간의 죽음과 그 극복'에 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죽는다는 것'을 말하려면 '살아 있는 것'을 전제해야 하겠지요. 살아있지 않다면 죽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살아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인간 생명'을 생각할 때 그 생명의 시작은 우리의 흥미를 일으킵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 이 세상에서 살고 싶어서 태어나신 분 계십니까 ? 나의 부모님, 나의 형제들, 기타 주변의 모든 환경들을 선택한 후 그 안으로 태어나신 분은 아마 한 분도 안계실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탄생은 우리와 전혀 무관하게 은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어진 은총의 생명이 끝나는 순간인 '죽음' 역시 언제 어떠한 모양으로 나에게 닥칠지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탄생과 죽음, 그러니까 한 일생이 전혀 나 자신과는 상관 없이 시작되었다가 또 끝나는 것이 되고 마는군요.
전 개
1. 갑자기 찾아오는 죽음
한 평생을 꿈과 희망을 가지고 그 희망이 성취되어 가는 기쁨 속에 생활하는 사람에게 불쑥 죽음이 찾아 온다면 당사자는 물론 주변의 다른 사람들까지 안타까워 하거나, 혹은 죽음을 거부하고 두려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꼭 어떤 이유를 달지 않더라도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흔히 그 생각 자체를 회피하고 맙니다. 우리 사람들은 누구나 경험을 통해 생명의 소멸, 즉 죽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죽음이라는 것이 대개는 '사람들의 죽음'이지, '나 자신의 죽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는 것이지 내가 죽는다는 것은 생각하기 싫어하는게 보통 우리의 태도입니다. 하여간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반대 의견을 가지신 분은 안계시겠지요 ?
세상에 태어난 존재,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물들은 언제인가 죽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에게 있어 죽음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죽음은 단절이고 소멸이며 돌이킬 수 없는 떠남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든 그 모든 것들과의 단절이기 때문에 보통 동물들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죽음의 공포를 훨씬 앞서는 두려움이 우리를 사로 잡게 됩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살아있는 동안 현세적인 가치인 명예나 부, 권력과 같은 것들을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 알고 거기에 절대적인 노력과 투자를 아끼지 않은 사람들에게 더 크게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토록 절대적인 가치로 알고 있었던 그것들이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허망하게 무너지게 될 것이고 자기 자신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해 줄 아무런 힘도 없음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죽음은 누구에게나
세상에 있는 어떠한 것도 죽음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해 주지 못합니다. 이 점은 아주 오래 전 진시황의 예를 들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변의 모든 나라를 정벌하고 외세의 침입을 막아줄 만리장성까지 쌓아 이제는 세상에서 무엇하나 부럽거나 무서울게 없이 자기의 세계를 완전하게 구축하고 대단한 만족감으로 살았던 그 사람도 결국 죽음을 두고 생각할 때 자기가 애써 건설한 모든 것이 죽음 앞에서는 허망한 것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평생을 들여 이룩한 아방궁의 편안함이 물거품이 되어 결과적으로 자기 노력과 성취가 죽음 앞에서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는 두려움 때문에 각처로 불로초를 구하러 사람들을 보냈지만 결국 죽고 맙니다. 그 진시황에게 있어 죽음의 순간이 얼마나 괴롭고 아쉬웠겠습니까 ?
아무리 성공한 사람일지라도 아무리 대단한 부자이며 권력자라도 죽음 앞에서는 모든 인간들과 꼭같이 무력합니다. 자, 이제 죽음 뒤에 일을 놓고 이제까지 인간들이 보여 온 두 가지 태도에 대해서 생각해 볼까요 ?
인간이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되는가 ? 인간들의 태도는 사후세계가 있어서 거기에서 또 다른 모양으로 살아가게 되는가, 아니면 죽음으로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나고 마는가 하는 두 가지 부류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인생자체가 허무하게 막을 내려 버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쉽게 빠져들 수 있는 오류는 짧은 인생, 어차피 죽으면 그만인데 그 짧은 시간동안 구태여 심혈을 기울여 살아갈 필요가 있겠는가? 선하게 살면서 의미를 추구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 주어진 생명의 시간동안 즐기면서 살아도 되지 않는가? 라는 것이 아닐지요.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이와 같은 사고 방식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이 현실입니다.
다음으로 사후세계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현세의 삶이 사후세계에로까지 연장되어 현세생활에 대한 공과 실로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 복이나 형벌을 받게 된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보다 착하고 의미있게 살아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들을 이 두 가지의 범주에 넣고 도식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할 지라도 크게 구분해 본다면 이 두가지 범주에 의해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인간들이 생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양심의 소리, 즉 인생을 착하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식들을 존중해야 할 것이라 믿습니다. 아뭏튼 인간의 죽음이라는 어쩔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다양합니다.
3. 죽음의 원인
그렇다면 다소 늦었습니다만 우리들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닥치는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죽음은 자연적인 것이겠지요. 이것은 우리의 삶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인간의 원죄로 인해 세상에 들어온 것입니다. 다시말해 죄의 결과가 죽음으로 나타난 것이지요. 원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여러분께서 이미 들으셨습니다.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 죽음은 세상에서 그 세력을 떨치며 인간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성서는 구약과 신약이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구약성서는 인간의 지상생활이 끝난 후의 개인적 생명이 계속된다는 인식이 다소 불분명하였습니다. 다만 죽은 자들은 'Sheal'이라는 곳에 모이게 되며 하느님의 통치가 그곳에까지 미치긴 하지만 하느님께서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곳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에 있어서는 지상에서의 장수를 하느님의 축복으로 이해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묵시문학의 출현으로 이제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소개되기 시작하면서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사상이 신약시대를 준비했습니다. 신약시대에 이르러서는 구약의 여러 전통에 따라 형성된 사상을 기반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죽음의 정복자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정복자라 한다면 그분은 죽음까지도 초월하는 능력을 가진 분이시라는 점을 상정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들의 죄와 그 결과로서 시작된 죽음의 세력이 인간들을 괴롭히고 있었다는 사실과 아울러 하느님은 그러한 처지의 인간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들을 죄와 죽음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 성자 그리스도 예수를 세상에 파견하셨고 그 성자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의 전권을 받아 인간 구원과 죽음으로써 해방을 위해 죽음을 정복하신 것입니다.
4. 죽음을 극복하신 예수의 부활
이제 우리의 시선을 그리스도 예수께로 모아 봅시다.
죽음의 정복을 위해서는 죽음을 초월하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과 아울러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죽음 앞에 선 인간을 도와 줄 능력이 없다는 점은 이미 앞에서 알아 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죽음의 사슬에서 구해주시기 위해서는 세상의 어떤 것도 아닌 하느님이신 당신 자신의 힘으로 그 일을 이루셔야 합니다. 이때 그분께서 취하신 방법을 상기합시다. 그분 역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모든 인간이 죽어야 하는 자연 법칙에 따라 하느님이신 그분 역시 십자가에서 고통 중에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께서 이미 아시는 바대로 그분은 죽음으로써 그냥 끝나버린 것이 아니라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죽음의 힘, 모든 것의 소멸이며 단절이라 규정될 수 있는 죽음의 힘을 극복하고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는 죽음의 힘에 대한 승리요, 정복입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단순히 당신 자신의 부활로만 마무리 지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당신처럼 부활할 것이라는 희망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로 이점이 우리를 죄와 죽음의 사슬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한 순간 실패와 종말로 보여졌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죽음 역시 단순히 외적으로는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그분은 부활하셨고 우리 모두 그분과 같이 부활하리라는 희망의 구원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부활사건은 우리의 미래를 약속하는 것이고 성취시키는 힘을 주는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인간을 사랑하시고 잘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성실성에 힘입어 우리는 그분의 능력으로 다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 그리고 그분 말씀에 대한 희망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인 육신의 부활과 사후세계, 그리고 세상의 끝 날에 이루어질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다음 시간에 다시 살펴 보기로 하고 오늘은 우선 여기서 우리의 논의를 정리해 보지요.
종 합
*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새 생명의 시작
자 ! 여러분 이제 몇 마디 말로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들을 요약해 볼까요 ? 우선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은 죽는다는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죽음에 있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죽음에서부터 보호해 줄 수 없다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흔히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의 구세주로 믿고 있는 우리는 죽음이 단지 '끝남'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이를 초월하는 새로운 의미, 즉 새 생명의 시작이라는 것을 그분의 부활사건 안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와의 일치 (1고린15,17-32)야말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죽음의 극복과 구원을 이루는 근원인 것입니다.
심 화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한마디로 압축시킨다면 죽음은 결코 마지막이 아니라 새 생명,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새 생명, 영원한 생명은 일반적으로 샤머니즘적인 저승세계에서의 삶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으로서 그리스도교적인 의미에서의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이겠고 나아가서 우리 생명의 완성이요, 구원의 성취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생활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이 세상에서의 생활 모습에 의해 하느님 앞에서 심판 받을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다음 시간의 천국과 지옥, 심판의 주제를 다루면서 더 자세히 말씀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 죽음은 정복되었고 우리 역시 그리스도와의 일치에 의해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야 할 것과 그러기 위한 윤리적인 삶에 대해 깊이 새기면서 우리 실제 생활에서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도모해 보기로 합시다.
응 용
*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
여러분들의 지금 처지와 주변의 여러 환경들, 가족이나 직장 친구 기타 여러분 개개인과 관계 맺고 있는 모든 환경들을 잠깐동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만일 여러분이 갑자기 사고로 인해 세상을 하직하였다는 것을 가정하고 주변의 여러 사람들이 여러분의 죽음을 앞에 두고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에 대해서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잠시) 그리고 이제는 반대로 여러분들께서 사랑하시는 어떤 분이 갑작스레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지금 막 들었다고 상상해 보시고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십시요. 아무리 가정이라 해도 그러한 상상은 결코 유쾌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점이 우리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고 적어도 회피하려는 마음일 것입니다. 신자라도 이 두려움이나 회피의 경향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겪어야 할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죽음은 슬픔을 동반하는 것이고 우리를 일상의 흐름에서 어지러움으로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죽음은 슬픈 것이지요. 어느 누구의 죽음이라 할지라도 죽음은 슬프게 하는 것이고 그 사람이 우리의 이웃, 가족, 친구와 같은 사랑하는 사람이라 한다면 그 슬픔은 더욱 커져서 우리를 주체하지 못할 괴로움으로 몰아 넣고 맙니다. 더욱이 나 자신의 죽음일 경우는 두말할 나위 없지요. 이로써 우리는 또 다른 차원에서의 의무를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지요.
언제인가는 지상에서의 이별을 맛보아야 할 사람들과의 후회할 것 없는 사랑이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희망이지요. 죽음의 이별도 넘어선 그리스도께 대한 신뢰와 희망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영원토록 변함없이 지속된다는 것을 알아야겠고 죽음이 가져온 잠시의 슬픔이 지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시 새 생명으로서 더 승화된 세계에서의 차원 높은 사랑을 계속할 것이라는 희망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반복해서 말씀드립니다만 죽음은 그리스도를 통해 정복되었다는 사실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생명에로 초대받은 존재들이기에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회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렇다고 일부러 죽을 것까지는 없지요. 창조주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선사하신 우리의 생명을 마지막 순간까지 기쁘고 성실하고 의미있게 영위하다가 그분 앞에서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 천
이제 오늘의 교리를 끝마치면서 여러분들께 한가지 숙제를 드릴까 합니다. 집으로 돌아가시면 잠시동안이라도 진지한 마음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시고 유언장을 한번 작성해 보실 것을 권고합니다. 그렇게 하면 이제까지 평범하게 보아 넘겨온 것들이 새로운 모양으로 보여질 것이고 여러분들의 일상생활에 또다른 의미로 다가 올 것입니다. 또 가족들이나 기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더욱 커질 것이라 믿습니다.
어떤 회사에서는 신입사원 연수 때 미리 마련된 관 속에 한 사람 한 사람 들어가서 잠시 누워 있어 본다고 합니다. 그 속에서 무엇을 생각할까요 ? 상당히 기발하고 유익한 프로그램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내드린 숙제는 제가 확인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만 잠시동안 만이라도 성찰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더 깊은 신앙이 싹틀 것입니다.
☞ 교회의 가르침
□ 죽음의 신비 □
죽음 앞에서 인간 운명의 수수께끼는 절정에 달한다. 인간은 아픔과 꺼져가는 육체의 파멸을 괴로워 할 뿐 아니라 영원한 소멸을 두려워한다. 인간 실존의 완전한 파멸과 결정적 끝장을 싫어하고 거부할 때 마음의 본능에 따른 이 판단은 옳은 것이다. 인간이 자기 안에 지니고 있는 영원의 씨는 순수 물질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기에 죽음에 저항하여 일어설 수밖에 없다. 기술의 모든 노력이 제 아무리 유익하다 해도 인간의 불안을 해소시킬 수는 없다. 생물학적 수명의 연장은 마음속 깊이 뿌리 박힌 고차적 생명에 대한 갈망을 만족시킬 수 없다. 어떠한 상상도 죽음 앞에서는 맥없어지지만 하느님의 계시를 들은 교회는 인간이 지상 불행의 한계를 넘어서 행복한 목적을 위하여 하느님께 창조되었음을 주장한다. 그뿐 아니라 육체의 죽음도 인간이 범죄치 않았던들 모면할 수 있었을 것이며, 죄로 잃었던 구원을 전능하시고 자비로 우신 구세주의 은덕으로 인간이 다시 회복할 때 죽음은 패배를 당할 것이라고 그리스도교 신앙은 가르친다.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성 전체로써 당신과 영원히 결합하여 당신 불멸의 생명을 나누어 받도록 인간을 이미 부르셨고 거듭 부르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승리는 그리스도 친히 당신 죽음을 통하여 인간을 죽음에서 해방시키시고 다시 부활하심으로써 거두신 승리다. 따라서 확고한 논증에 바탕을 둔 신앙은 깊이 생각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답을 주며 미래 운명에 관한 그의 불안을 해소시켜 준다. 그와 동시에 신앙은 또한 죽음이 먼저 앗아간 사랑하는 형제들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결합할 가능성을 제공하며 그들은 이미 하느님 곁에서 참 생명을 얻었다는 희망을 우리에게 준다. [「사목헌장」, 18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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