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으로서 그리스도인 되기
송용민 신부
(삼산동 성당 주임/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나는 개인적으로 강의를 할 때 ‘종교인’란 말을 ‘그리스도인’이란 말보다 더 즐겨 사용한다. 첫째 이유는 종교적 삶에 대한 체험과 이야기가 없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한다는 것은 자칫 믿음이란 행위가 가진 깊은 종교적 체험을 간과하게 될 것 같기 때문이다. 둘째는 그리스도인 역시 종교인이라는 사실을 잊고 다른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지나친 편견과 오해는 물론 내 믿음만이 옳다는 배타적인 생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를 뜻하는 라틴어 ‘religio’란 말은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외경심과 의례행위”를 뜻한다. 학자들에 따라 이 단어가 세 가지 정도의 어원적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다. 첫째는 ‘relegere’(다시 읽다)란 의미에서 종교 의례에서 신들의 업적을 반복해서 읽어주는 것으로 인간이 신과 맺은 관계를 기억하게 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둘째로 ‘religare’(다시 묶다)란 의미에서 인간이 신과 맺은 본연의 관계가 죄로 인해 끊어졌기에 이를 다시 묶어 내는 노력이라고 이해하기도 한다. 셋째는 ‘reeligere’(다시 선택하다)란 의미에서 인간이 종교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새로운 태도로 신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한다. 중요한 점은 ‘religio’란 용어가 하느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이 신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겸허하게 인정하는 태도를 뜻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서양의 종교 개념이 인격적인 유일신에 대한 신앙을 토대로 발전했다면, 동양은 전통적으로 인격신을 향한 절대적 신뢰 관계보다는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초월적 신성에 대한 경외심과 가르침을 실천하는 쪽으로 발전했다. 한자어 ‘종교(宗敎)’는 서양의 ‘religio’를 일본에서 처음으로 한자어로 번역하면서 수용되었는데, 본래는 불교 경전에 나오는 용어로서 ‘부처님의 크신 가르침’이란 뜻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으뜸 되는(宗)’ ‘가르침(敎)’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데 동양의 종교들은 주로 ‘살고 죽는 문제’에 대한 관심이 강했다. 서양의 종교전통이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면서 죄의 용서와 은총, 하느님의 구원과 사랑을 강조했다면, 동양은 그런 신과의 관계를 맺기 위한 삶의 태도와 정신의 수양을 중요하게 생각한 듯하다. 도교의 도(道)의 정신, 불교의 ‘공(空)’ 사상, 유교의 ‘인(仁)’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동양 종교들은 자연과의 합일이나 세상의 모든 집착으로부터의 해방, 하늘의 뜻을 땅에 실천하는 인간의 도리 등을 실천하는 것을 종교적인 삶의 원리로 이해하였다.
한국의 종교들도 인간의 생로병사와 관련된 중요한 현세적인 일들에 대한 ‘삶’의 문제를 종교적인 의식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고, 하늘의 뜻을 땅에서 이루는 사회적 조화와 윤리적 질서의 회복, 한(恨) 맺힘과 한풀이를 종교적으로 승화시킨 면도 없지 않다. 한국의 샤머니즘의 전통에서 발전한 ‘무(巫)’의 정신이 한국의 기층종교심성을 형성해서 민간신앙의 뿌리를 형성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흔히 ‘무당’을 사이비 종교인으로, 무당의 굿을 이단적인 우상숭배로 여겨온 오랜 편견과는 달리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한(恨)을 풀고 복(福)을 나누고자 하는 무교의 정신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의 불교 역시 무교의 한풀이의 민간 전통을 한국불교의 고유한 정신으로 습합했고, 무당의 종교적 기능을 일부 사찰구조(산신각/칠성각)나 승려들의 전통(점술/부적/승무)에 수용한 면도 없지 않다. 유교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조선시대에도 왕궁의 여인들과 서민들의 생로병사의 문제에는 신의 뜻을 묻고 이를 전해주는 한(恨)의 사제라고 불리는 무당(巫堂)이 큰 역할을 했다.
한국의 그리스도교도 이러한 한국의 전통 종교들의 토양 위에서 자라났다. 어느 날 갑자기 그리스도 신앙이 생긴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영혼 속에 간직된 종교적 삶의 욕구들이 특정한 종교적 상징들을 통해서 표현된 셈이다. 특히 한국의 개신교 발전의 동력에는 한국인의 종교적 욕구가 잘 표현된 민간신앙의 전통들을 그리스도교적으로 수용하거나 승화시킨 면도 없지 않다. 가령 이른 새벽에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우물가의 첫 번째 물을 길어 정한수를 떠놓고 천지신명께 빌던 민간의 치성의 전통이 그대로 새벽기도회 전통으로 이어진 면도 없지 않다. 그리고 굿판에서 벌이는 화해와 치유, 신바람 나는 어우러짐을 통해서 모두가 희열을 느끼는 대동굿의 정신이 개신교의 성령부흥회로 이어져 개신교 발전의 큰 영향을 끼친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먼저 체험해야할 종교 체험의 근원은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 것일까? 물론 신앙의 언어로 말하자면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 죄의 용서와 구원의 기쁨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생명을 얻었고,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신앙체험을 말하기에 앞서서 우리가 먼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종교적 체험의 근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룩함의 체험, 즉 성스러움의 체험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영혼 안에서 본성적으로 어두움을 체험한다. 살면서 피할 수 없는 영혼의 어두움, 죄와 악의 체험, 병과 고통의 체험, 미움과 시기, 오해와 갈등, 싸움과 폭력에 이르기까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죽음의 신비를 겪는다. 살아도 산 것 같지 않고 죽을 것 같다는 느낌을 갖는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이러한 세상의 속됨과 죽음에 매몰되지 않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종교적 욕구가 있다. 평화, 기쁨, 사랑, 희망, 인내, 온유, 감사, 나눔 등의 생명의 언어가 우리 영혼 안에 새겨져 있다. 무엇이 참으로 나를 행복하게 하는 지 조금만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당장은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돈이나 재산, 건강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당장의 삶을 지탱해주는 그런 최소한의 생존을 채워주는 것들 없이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이 갖고 있는 탐욕만큼이나 버리지 못해서 혹은 놓지 않아서 겪는 고통의 깊이도 무시할 수 없다. 불교가 인생의 가장 큰 신비인 고통의 문제를 비움 혹은 무소유로부터 찾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리스도인도 이런 영혼의 어두움을 피할 수 없다. 단지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것은 이 어두움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지만, 그 어두움을 가르며 우리 영혼을 비추는 생명의 빛을 체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한복음 저자의 고백대로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 5) 그리고 그 빛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으로 세상에 오셨는데 바로 그분이 우리가 그리스도, 구원자로 고백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것이다. 예수님과의 만남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영혼의 갈망이 채워지고 있음을 체험한다. 그분의 말씀과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통하여 나를 병에서 치유하고, 죄에서 해방시키며,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는 하느님 사랑의 손길을 느낀다. 그리스도인이 종교인으로서 찾는 희망이 예수와의 만남 속에서 새로운 인생의 길(道)임을, 세상의 모든 집착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의 삶(空)임을, 그리고 어떠한 처지에서도 감사하고, 기뻐하며, 기도할 수 있는 신앙의 기쁨을 나누는 삶임을(仁) 체험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적 삶에 대한 갈망 없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신앙은 그 힘을 잃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과연 나는 신자로서의 삶의 기쁨을 어디서 얻는 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참으로 예수님 안에서 삶의 새로운 희망을 찾고 있는가? 아니면 내 영혼의 빛을 체험하는 거룩함의 체험, 하느님 앞에서 성스러움의 체험 없이 그저 의무적인 교회의 신앙행위에만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이다. -송용민 사도요한 신부님
'예비신자 교리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세기 강의 (0) | 2012.05.14 |
---|---|
[스크랩] 20. 세례명은 예뻐야 하나요? (0) | 2012.05.04 |
가톨릭 교회의 구원관 (0) | 2012.04.12 |
사도신경 해설/ 천지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0) | 2012.03.20 |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관 (0) | 2012.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