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기있게) 안녕하세요? 오늘 하루 주님 안에서 기쁘게 생활하셨습니까? 밝은 얼굴을 보니 저도 기쁘고 교리 가르칠 힘이 생기는군요. 그러면 여러분의 생생한 시선을 못생긴 저에게 모아주십시오.
네, 감사합니다(저 뒤에 계시는 형제님, 저를 보아주세요). 네, 공부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몇 시간에 걸쳐서 우리들은 예수님의 일생, 즉 탄생, 유년시기, 공생활,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구체적으로 한 사람 예수에게서 구현된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인류는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 이르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서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생활하는 것 그것이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하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우리는 인류와 세상의 구원자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오늘은 우리 가톨릭 교회는 구원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공부하게 됩니다. 세상에 만연한 비 구원의 체험들 곧 사회적 불의와 부조리, 억압과 고통 그리고 질병과 죽음 속에서 '구원 받는다' 혹은 '구원 받았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표징(성사)으로서 교회의 사명은 어떤 것인지 보겠습니다.
1) 죽은 병사의 십자가
한 병사가 있었습니다. 다음날 큰 전투를 위해 전쟁 중의 짧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 병사는 그 전투가 자기의 마지막임을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몇 가지 되지 않은 물건을 챙기던 중에 목걸이 십자가를 발견합니다. 고향에 계신 어머님이 항상 걸고 있으라고 주신 것인데 그냥 팽개쳐 두었던 것입니다. 한참을 생각한 뒤 병사는 그 목걸이를 목에 걸었습니다. 다음날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끝났을 때 사람들은 석양아래서 반짝거리는 십자가를 목에 단 주검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2) 불치의 암으로 고생하는 부인
불치의 암에 걸려 침대에 누워있는 한 부인이 있습니다. 그 여자는 도저히 자기가 죽게 된다는 사실, 그리고 쉴새 없이 밀려오는 고통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녀는 "왜 하필이면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오늘 밤도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고, 현대의학을 경멸하고 그리고 하느님을 저주합니다.
3) 약혼녀를 따라 죽음을 택한 젊은 남자
북한산 어느 바위에는 약혼녀를 산에다 묻은 뒤 그도 또한 그 바위에 몸을 던진 젊은 남자의 애절한 사연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4) 수돗물로 배를 채우는 소녀가장
소위 어린이 가장의 보도가 신문에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어린이 대공원에 놀러 가고, 밥맛이 없어 햄버거를 먹고, 피아노 학원에 가서 건반을 두드릴 때, 그들은 한끼는 라면으로 한끼는 수돗물로 배를 채우고 있습니다.
전투를 앞둔 병사, 암으로 고생하는 부인, 수돗물로 배를 채우는 소녀가장, 약혼녀를 따라 죽음을 택한 젊은 남자는 그 순간에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그들 각자에게 하느님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그들에게 참으로 '구원받음'은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들에게 구원입니까? 그리고 우리에게는 무엇이 구원입니까?
전 개
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구원의 교리는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적인 진리입니다. 이미 배운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길 바라십니다"(1 디모 2, 4). 바로 이 때문에 그분은 당신 아들을 세상의 구원자, 구세주로 파견하셨습니다(1 요한 4, 14).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 18). 예수님의 온 일생은 그분 말씀대로 그렇게 인간사회에서 모멸과 천대받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죄인들을 용서하는 삶 이었습니다. 아무런 조건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인간사회를 구성하는 근본질서는 사랑이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인간들을 향한 구원의 소식과 무한한 사랑의 실천은 예수님을 고난과 죽음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요한 복음사가가 지적한 대로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 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 보지 못하였다.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 주지 않았습니다"(요한 1, 10-11). 십자가, 십자가는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인간을 위한 극진한 사랑과 성부 하느님께 대한 순명이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곳이 되었습니다. 이 십자가 죽음에서, 인간을 아집과 이기심에 사로잡히게 하고 고정되고 폐쇄된 틀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는 속박이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활신앙은 말하자면 자기 생명을 고려하지 않은 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아낌없이 희생하는 삶은 '구원된다'는 희망적인 신앙인 것입니다. 예수의 삶과 자신을 동일화시키는 이를테면 예수를 뒤따르는 신앙의 삶 자체가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이라고 확신하고 또 고백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신앙의 올바른 구원관에서는 구원의 개인주의, 곧 '나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하느님은 모든 이가 구원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2. 구원은 새로운 창조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셨다"(요한 3, 16). 이 유대가 첫번째 인간 아담에 의해서 끊어졌듯이, 이 유대가 다시 이어진 것도 인간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었습니다(로마 5, 12-31 참조).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골로 1, 15)이신 그리스도는 완전한 인간으로서 아담의 후손들에게 최초의 범죄 때부터 이지러졌던 하느님의 모습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지만 소멸시키지 않으셨으므로 우리 안에서도 인간 본성은 자동적으로 고상한 품위에까지 들어 높여 졌습니다. 성자께서는 당신 자신이 인간이 되심으로 어떤 의미에서 당신을 모든 사람과 일치시키신 것입니다. 인간의 손으로 일하시고 인간의 지력으로 생각하시고 인간의 의지로 행동하시고 인간의 마음으로 사랑하시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참으로 우리 중의 한 사람이 되셨으며 죄를 빼고서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비슷하셨습니다(사목헌장 22항).
이분 인간의 구원자를 통해서 하느님이 사람을 위해 만드신 세계, 죄가 들어오자 제 구실을 못하게 된 이 세계는 본래 지녔던 지혜와 사랑이신 하느님과의 유대를 다시 회복하였으며 우리는 새로운 인간, 하느님을 '압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인간이 된 것입니다.
3. 구원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예수님 당시에 유다의 율법은 십계명 외에도 600여개의 세세한 조항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율법의 준수가 의로움과 신앙의 기준이 되었으므로 사람들은 율법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생명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을 소위 안다는 사람들이 감시하고 심판하는 무서운 하느님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지요. 예수님은 그러한 그릇된 구원관을 온몸으로 거부하셨습니다.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는 그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방탕한 아들, 아버지의 뜻을 거스렸던 그 아들을 아버지의 사랑은 받아들이십니다. 아버지의 품은 항상 넉넉하고 여유가 있습니다. 잘못을 뉘우치는 그 마음만으로 아버지에게는 충분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사실 뭐 똑똑하거나 힘이 세어서 혹은 하느님 말씀을 잘 들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선택하시고 보호해 주셨던 걸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은 백성이 고통 중에 울부짖는 것을 눈감고 귀 막으며 참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한이 없으십니다. 오늘 우리를 있게 하는 생명의 신비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정교한 컴퓨터도 당해내지 못하는 자연의 놀라운 질서를 보십시오. 우리 중에 누구라도 자기 힘으로, 자기 노력으로, 자기 선행으로 생명을 얻은 사람이 있습니까? 선물입니다. 신용보증이나 담보물이 있어야 하는 융자금이 아닙니다. 내 선행의 공덕으로 주어지는 상이 아닙니다. 선물입니다. 요한 사도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 요한 4, 7-11).
4. 구원은 오늘 우리의 과제이다.
계곡을 흐르는 물은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 위에서 받은 물을 끊임없이 아래로 흘려 보냅니다. 이 자기 비움, 버림이 물을 썩지 않게 하고 산을 살린다. 같은 이치로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은 내 자신 안에 꼭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퍼져 나가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를 공허하게 또는 가난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빠져나간 그 사랑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하느님은 우리를 채워주시기 때문이다.
교회를 인류구원의 보편적 성사라고 한다. 이 말은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교회는 자신이 몸소 드러내 보여야 하고, 또 불신의 세계에 하느님 구원의 손길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는 바로 우리들을 말합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사랑이 충만한 공동체이어야 하며 불화와 불의, 부조리와 고통이 가득한 세상에 평화와 자유, 정의가 실현된 구원의 공동체임을 드러내야 합니다. 인류의 구원, 인류의 해방을 위해 자신을 비워버린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교회 역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자주 고통과 불의가 난무하는 세상에 대해 신앙은 회의를 겪습니다. 하느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악이 가능할까?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이 무참히 파괴되고 있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 신앙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당장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 있는 사람에게 크리스찬들이 말하는 구원이란 얼마나 공허한 소리인가, 참된 구원이라면 소외된 인간 조건 아래서도 의미가 있는 구원, 살아있는 하느님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반문하게 됩니다. 하느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지금의 예비자 여러분들께는 실감이 나지 않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덤덤해지고 일상의 일처럼 되었을 때 우리들은 이런 회의를 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앞서 공부한 바,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는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그리스도 신앙의 영역에서만 통용되는 말일 수는 없습니다. 소외된 인간조건하에서도 사랑과 신뢰, 용서와 대화가 있는 곳이면 비록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구원이 작은 형태로나마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 사랑과 자유가 실제로 교류되는 곳에서, 이런 일상적이고 작은 체험들은 자신을 넘어서 다른 어떤 것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간접적이나마 현실화시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체험은 구체적인 인간의 삶에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구원을 개인의 신앙만으로 축소시키는 그릇된 생각들을 경계하면서 오늘날 일상적 체험 속에서 구원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구원이란, 병자는 치유됨을, 굶주리는 자는 한 줌의 쌀이나 한 조각의 빵을 받음을, 고독한 사람은 그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을 찾음을, 수인은 감옥으로부터 해방됨을, 반겨주는 이 없는 사람은 이해와 호감을 받음을, 억압받고 예속된 사람은 자유롭게 되고 독자적인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가능성을 회복함을, 부당하게 취급되는 사람은 법과 정의가 관철되는 체험을, 일상업무의 단조로움에 시달리는 사람은 실적의 강압없이 그리고 다가오는 날에 대한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음을, 고향으로부터 추방된 사람은 고향을 되찾음을, 전쟁과 폭력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평화를 찾고, 절망하고 체념한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으며, 헤어날 길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충고하고 새로운 길을 타개할 수 있는 사람들을 발견함을 의미한다'(그레사케,「은총 : 선사된 자유」, 134쪽 참조).
5. 개인구원과 세계구원
앞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인간의 구원이란 결코 자기 한 사람의 것일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구원 받는다는 것은 곧 자신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관계와 함께 영광 속에 들어 높여진다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다른 사람과 떨어져서는 살 수 없는 것처럼 자신과 만난 모든 사람, 만남의 장소가 된 모든 환경과 사회,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세계전체가 함께 영광 속에 들어 높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는 우리가 다만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무대나 또는 공덕을 쌓기 위한 수행의 장소에 지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때에 삶의 무대였던 세상이 모조리 없어지고 우리만 구원받는다는 것도, 시련의 장소였던 물질세계에서 해방되어 영혼만이 구원받는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세상과 함께 완성으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발전을 위한 신앙인의 사명이 강조되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6. 구원은 희망의 대상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알아야 그분을 믿고, 또 세례를 받아 교회에 참여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아직도 희망으로만 구원을 받을 뿐입니다(로마 8, 25 참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마련하셨지만 이 구원은 마지막 때가 왔을 때야 비로소 그 완성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정적인 구원은 주님의 날이라는 종말적인 관점에서 살펴 볼 필요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느님과 화해되었고 그분의 피로 의화되었으니 만큼, 그 때에 가서는 그분에 의해 하느님의 분노를 면하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나타나실 것입니다.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Already, not yet)라는 말로써 그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것의 전세계 전 우주적인 완성은 종말에 가서야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희망의 대상이라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하느님의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될 날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참고 기다릴 따름입니다"(로마 8, 23-25). 주님의 날 곧 복음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종말에 가서야 나타날 것이며, 우리들은 그 나라의 도래를 위해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소서"(마태 6, 10 ; 루가 11, 2)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희망이 지금의 우리 사회의 개혁과 발전에 대한 사명을 감퇴시킬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 구원은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해졌을 때, 이미 도래했고 그것은 마치 땅에 뿌려진 하나의 씨앗으로서, 점차 자라야 하는 이치이기 때문입니다(마태 13, 3-9 ; 마르 4, 2-9). 또 반죽을 부풀게 하는 누룩처럼 세상의 눈으로 보면 미미한 것이지만 나중에 가서는 큰 위력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사회, 이 세상에서 씨앗으로, 누룩으로서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 희망의 대상으로서의 그 최종적 구원을 드러내 보여야 하며 그 나라를 성장시켜야 합니다.
종 합
지금까지 살펴본 바를 종합하여 봅시다. 하느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1 디모 1, 4).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구세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행적으로 우리는 구원받은 자의 삶이 어떠한 것인가를 엿볼 수 있었으며,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을 넘겨주신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구원의지를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인간의 구원자입니다. 그분으로, 전혀 우리의 착한 행실로써가 아니라, 우리는 하느님과 다시 화해할 수 있었으며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과 일치하는 길이 보입니다. 또한 구원은 사명입니다. 오늘 이 고통과 병, 죽음, 불의가 횡행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구원을 전해야 하는 어려운 임무를 그리스도께로부터 받고 있습니다. 나 개인만의 구원, 평화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도래할 하느님 나라의 씨앗으로, 누룩으로써 세상을 밝게 비추는 사람이 되야 하며, 그러면서도 동시에 결정적으로 갑자기 도래할 그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희망합니다.
심 화
성서가 구원에 대해 말할 때, 구원을 묘사하기 위해 생명, 빛, 평화, 자유, 화해, 의롭게 됨, 치료, 구속, 왕국, 사랑, 희망, 기쁨 등의 개념과 상징을 많이 사용합니다. 요컨대 성서는 구원의 실재를 하나의 추상적 개념이나 교리에 담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서는 사람들이 처한 구체적인 고통과 소외의 상황에서 출발합니다. 구원은 추상화될 수 없으며, 전인적이고 사회적인 구원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을 모르면서도, 교회를 알지 못하면서도 그리고 하느님을 알지 못하면서도 나만의 평화, 내 가족만의 안위를 포기하고 우리 사회의 구원을 위해 몸 바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찾아봅시다. 거리에서, 신문에서, 방송에서 그리고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그들은 어떻게 평가되고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느님을 알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희망하는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습니까?
또한 이상적인 인간사회, 인간의 복지를 위한다는 자본주의나 공산주의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습니까(유물주의 비판). 비 그리스도인의 구원문제는 다음 시간에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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