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따라서 때때로 우리는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마르 9:24)라고 외친 사람의 갈급한 심정을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하느님을 깊이 필요로 하는 사람만이 진정 믿는 자이다. 그렇지 않는 사람은 실제로 자신을 하느님께 맡기지 않으면서, 또는 과학 시대에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미신이 아닐까 의심하면서 하느님의 개념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바로 믿는다. 그리고 사도신경으로 이러한 바른 신앙을 표현한다.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도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논리적으로 밝혀 내지 못했다. 하느님을 믿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향한 갈망만이 필요하다(시 42:2). 성경은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키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느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존재 가능성을 입증해 주는 증거는 분명히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실재를 확신한다. 하느님의 실재에 대한 증거를 무시하는 자들은 자기들이 하느님 믿기를 거부한데 대한 명확한 변명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증거를 진지하게 검토하는 것을 매우 꺼린다.
우주의 합리성을 생각해 보자. 거대한 우주가 질서있게 존재한다는 것은 사려깊고 합리적인 창조주가 계신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를 보여 준다. 흔히 신학자들은 네 가지 표제로서 우주의 합리성을 논한다
첫째는 우주론(Cosmology)이다. 우주론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우주의 기원과 특성을 연구하는 형이상학의 한 분야"라고 사전은 정의한다. 이러한 우주론을 진지하게 연구한다면 전능하신 하느님만이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은 우주를 만드실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둘째는 목적론(teleology)이다. 목적론이란 현존하는 "자연 속에는 목적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고 하는 학설이나 신념"이다. 인간의 한계를 갖는 사고로는 자연의 목적은 너무 복잡해서 그 생성과 발전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자연 활동이 질서 있게 합목적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바 그 배후에는 지혜로운 창조주가 계심을 알 수 있다.
셋째는 인류학(anthropology)이다. 이것은 인간의 체질이나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인간이란 우주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획을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라고 그리스도인은 믿는다. 또한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만이 그 계획을 이해할 수 있다. 창조주처럼 인간은 지적인 존재인 것이다. 인간은 또한 인격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우발적으로나 우연의 일치로 생겨났다고 믿는 사람은 실로 어리석은 자이다. 우리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낼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비인격적인 근원에서 진화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인격적이신 분임이 분명하다.
넷째는 존재론(ontology)이다. 존재론이란 "존재와 실체에 대한 학문으로서, 존재의 본질이나 그 핵심적 특성 및 관계성을 탐구하는 지식의 한 분야"라고 사전은 정의한다. 존재론의 주장에 따르면, 완전해지려는 인간의 노력은 완전함의 근원, 즉 완전하신 하느님 자신에 대한 증거라고 한다. 우리는 불완전한 세상에 살고 있는 불완전한 피조물이다. 우리가 완전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느님으로부터가 아니면 어디서 그 개념을 얻었겠는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유일한 설명은 완전한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 정녕 당신께서는 제 속을 만드시고 제 어머니 뱃속에서 저를 엮으셨습니다."(시 139:1, 시 13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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