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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 세례명은 예뻐야 하나요?

주혜1 2012. 5. 4. 06:27

야곱의 우물 20

 

세례명은 예뻐야하나요?

 

 

사제생활을 하다보면 가까운 신자들이 세례명을 지어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종종 있다. 이름이 가진 중요성을 생각하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자녀들이나 성인 영세자들이 세례명을 짓는 데 각별한 신경을 쓰는 것은 이해되지만, 신부가 무슨 작명가도 아니고, 무당처럼 영험한 이름을 골라주는 것도 아닌데 막상 부탁을 받으면 부담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가톨릭 교회의 전통상 훌륭한 성인들을 세례명으로 선택해서 그들의 신앙적 모범을 본받고 주보성인으로 삼는 것이 원칙이지만, 근래에는 기억하기 쉬운 자신의 생일 날짜에 맞추거나, 성인의 삶과는 무관하게 일단 예쁜 이름을 짓는 데 관심을 갖는 이들도 적지 않다. 가끔은 가톨릭 신자들의 세례명이 특이하거나, 성인 같지 않은 이름들도 있어서 물으면 자신의 주보성인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기도 한다.

 

내 세례명은 사도요한이다. 그런데 세례대장에는 “요왕”이라는 낯선 이름이 적혀있다. 어릴적 남들과는 달리 멋지고 예쁜 서양이름을 하나 받기는커녕 ‘요강’을 연상시키는 촌스런 이름이 싫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옛 분들이 사도요한과 세자요한을 구분하기 위해 과거에 사도요한을 ‘요왕’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안 것은 후의 일이었다. 마르코를 ‘말구’, 프란치스코는 ‘방지거’, 마르티나는 “말지나”로 불렀으니 말이다. 생각해보면 선조들이 서양이름을 한국식으로 토착화한 노력의 하나였는데, 서양적 형태가 가톨릭적이라고 여기는 분위기 때문인지 세례명도 서양성인 이름을 그대로 쓰는 식으로 바뀌었다. 한국의 103위 성인이 탄생한 이후에는 간혹 한국 성인의 이름과 세례명을 동시에 쓰는 신자들도 늘었지만, 여전히 낯선 것이 사실이다.

 

서구의 가톨릭 신자들은 자신의 이름이 곧 세례명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인들의 이름이란 것이 결국 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 나온 이름이니 당연한 듯싶다. 가령 요한을 얀, 얀센, 존, 존슨, 한스 등으로 부르듯 약간은 언어권에 따라 변형을 주어 사용하기는 해도 세례명을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 외에 따로 갖는 일은 좀처럼 드물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우리도 세례명을 부모님이 지어주신 한국 이름으로 그냥 부르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할아버지가 작명소에서 받아주었던, 부모님이 오랜 고민 끝에 지었주셨던 그 분들이 공들여 지어준 내 이름 속에는 하느님께서 부모님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시는 가장 소중한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학적인 창의적 발상과는 달리 대부분의 한국 천주교 신자들은 신자가 된다는 것이 서양식 이름을 하나 더 받는다는데 특별한 의미를 갖고, 다른 이들과는 차별화된 신앙생활에 대한 묘한 매력을 더 느끼는 것 같다.

 

어째든 우리 정서상 이름 하나는 잘 지어야한다. 근래 예쁘지 않은 이름 때문에 사회생활이 어려운 이들이 개명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법이 바뀐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신자들 중에는 자기 세례명을 좀 바꿀 수 없냐고 묻기도 한다. 하지만 교회법상 아주 특별한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 번 세례 때 부여받은 세례명을 바꿀 수는 없다. 수도자가 될 경우 수도명을 새로 받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본래 세례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제들도 서품 후 자신의 세례명을 그대로 쓴다.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면서 받은 이름이 무엇보다 소중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가톨릭 세례명들 중에서 교회생활을 불편하게 할 정도의 그런 이름은 없다. 간혹 너무 진부하거나, 부르기 힘든 세례명인 경우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 성인의 삶을 본받아 살아야하는 신자들의 본래의 소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평생 불린 세례명을 듣기 예쁘게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보성인이 될 분의 생애와 영성에 더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을 주보성인의 삶을 따라 열심히 살다보면 어느 덧 그 분의 삶을 닮아간다는 선조들의 말씀은 결코 거짓은 아닌 듯싶다. 이름이란 본래 나를 그에 걸맞게 살게 해주는 기억이자 힘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알지 못하는 성인의 예쁜 이름의 힘보다는 나와 비슷한 처지에서 역경을 이겨내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 성인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 더 영적인 공감과 정서적 안정을 이끌어주는게 당연한 것 아닐까 싶다.

 

세례 때 고민하는 또 한 가지는 대부모를 정하는 일이다. 예전에는 세례 당일 날 갑자기 영문도 모르고 붙잡혀서 생면부지의 대자대녀를 만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래서 만나자마다 생이별을 하고 죽을 때까지 대자대녀를 만나지도 못하는 경우도 있는데, 근래에는 대부모를 미리 정하고,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더 많다. 대부모 제도는 가톨릭 신앙이 가진 좋은 후견인 제도와 같다. 유아영세의 경우에는 가능하면 그 가족과 지속적인 인연을 맺을 사람들이 대부모가 되면 좋고, 성인영세의 경우에는 입교를 권유하고 인도한 사람이나, 연령층이 비슷하지만, 신앙적으로 성숙한 이들에게 부탁하는 것이 더 좋다. 요즘은 부모라고 권위만 내세우지 않고 친구 같은 부모가 더 통교와 나눔이 좋은 시대이니 말이다. 대부모가 되는 것이 부담스럽지만, 요즘같이 저출산 시대에 막대한 교육비용 지출 없이 기도와 격려만으로 영적 출산을 돕는 대부모의 삶도 매력적이란 생각이 든다. 한 가지 부담이 있다면 대부모가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면, 대자대녀의 삶도 매한가지고, 심지어는 대자대녀가 잘못된 삶을 훗날 연옥단련으로 보속해야 한다는 옛 분들의 ‘엄포’를 기억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내 세례명을 사랑한다. 예수님 곁에 기대서 자신을 가장 사랑받던 제자라고 자신있게 말한 사도요한. 열 두제자들 중에 유일하게 순교를 안 하고, 평생 성모님을 곁에 모시고 살면서 복음서까지 집필하신 성인이야말로 내게는 최고의 성인이시다. 단지 내게 남은 과제는 이 분을 닮아 살아가야하는 것인데, 쉽지는 않겠지만 그 분의 ‘빽’을 믿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다.

송용민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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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신학하는 즐거움
글쓴이 : 송사도요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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