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3 아쇼카선언문에 대한 법응스님의 지적사항
No |
8.23 아쇼카선언문 |
법응스님 지적사항 |
1 |
‘이웃’에 있는 나 자신의 종교이며, 내 종교를 비추고 있는 거울입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연관된 존재일 뿐 아니라 서로를 비추고 있는 거울입니다. 나의 종교가 우주 전체를 담고 있듯이 상대의 종교 또한 우주 전체를 담고 있습니다. |
불교가 아닌 타 종교의 세계관도 불교와 같이 완벽한 세계관, 우주관이 있다고 인정함으로써 석가모니부처님가르침의 온전성, 완벽성 등 타 종교에서 추종이 불가능한 부처님의 고귀한 가르침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
2 |
각자 인연의 차이일 뿐입니다. 각자의 다른 인연이 만들어내는 다양성은 ‘있는 그대로’ 세계의 실상이며 아름다움입니다. |
여러 종교가 존립하는 것은 각국의 인종, 문화 등 인연의 차이이지 그 자체가 있는 그대로 실상이라며 온갖 종교의 사상을 긍정하는 즉 삼종외도설과 육사외도와 같은 허구의 종교사상을 긍정하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
3 |
연기적 세계관은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부처님의 관점이며, 불교가 세상과 관계 맺기를 원하는 방식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불교인들은 이웃종교를 진정으로 ‘이웃’으로 생각하는데 충분하지 못했으며 이웃종교인의 허물을 내 허물로 여기고 그들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여기는데 충분하지 못했음을 반성합니다. 이웃종교를 질시하거나 경쟁하는 상대로 여겼던 적은 없었는지 반성합니다. 그리고 이웃종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귀 기울여 배우려는 노력이 충분하지 못하였음을 반성합니다. |
승려가 타 종교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이미지의 구절입니다. 현실에서 타 종교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념적 내용에 대해 배우고 따라야 하며 그동안 그러하지 못한 점을 반성해야 한다고 하니 이는 종단적 차원에서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주장입니다. |
4 |
불교는 ‘나만의 진리’를 고집하지 않으며 불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진리에 대한 표현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열린 진리관은 이웃종교를 대하는 기본 원칙이며 대화와 소통을 위한 출발입니다. |
기독교 등 타 종교에도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표현만 다르다고 하니 이는 훼불적이며 조계종의 종지를 뒤 흔들고 교주 석가모니부처님과 그 가르침을 모독하는 구절임이 분명 합니다. 타 종교에 진리가 있다 한다면 승려나 불자를 포기하고 교회나 성당에 나가되 되며 그 곳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이 아니고 무엇인지요? 제아무리 이웃종교와 소통을 위한 방편이라 해도 표현이 다를 뿐 타 종교도 진리라 한다면 불교 무용론 그 이상의 의미입니다. |
5 |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문법이 다를 뿐입니다. |
불교의 기본 담마(法)인 사성제, 팔정도, 삼법인, 육바라밀이 타 종교에도 표현의 차이지 그러한 내용이 있다는 마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
6 |
이웃종교에 대한 인정과 관용이라는 소극적 차원을 넘어 그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배우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
일부 전문직 승려의 기독교 등 타 종교에 대한 비교종교학적 차원의 연구가 아닌 전 승려가 그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배우라는 종단적 선언을 한다면 어쩌자는 것인지요? 사찰에 십자가라도 걸라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
7 |
진리를 향한 동반적 관계이며 이웃종교의 장점을 통해 내 종교의 부족함을 채우는 상호보완적 관계입니다. |
유일신 및 유아적 교리, 절대적 신을 향한 주종관계의 종교에서 불교의 부족함을 채우자 하니 이는 그야말로 치광외변주의 마설이 아니고 무엇인지요? |
8 |
전법은 다른 종교인을 개종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행복과 안녕’을 실현하는데 그 궁극적 목적이 있습니다. 나의 종교를 선전하기 위해 타종교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와의 공존을 지향하고 다른 종교인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방법이어야 할 것입니다. |
포교의 포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 기독교는 불교국가인 아시아의 각국에 2만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개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칼라마경’에도 잘 나와 있듯이 전법은 불자의 사명이며, 그릇된 종교, 세계관, 인생관을 바로잡아 주어서 해탈과 열반에 이르게 하는 기본적 의무이며 사명입니다. 이를 포기하겠다면 조계종이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종단에서 미주와 유럽에 교구본사를 설치하려는데 태생적으로 기독교인인 외국인들에게 포교를 포기 하자는 주장인지 이해가 안 됩니다. |
9 |
이웃종교인들도 그들이 믿는 종교를 통해 평화와 안락을 구하고 있습니다. 길은 다르지만 우리가 이르고자 원하는 바는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
불교를 지말무명이나 해결해서 안락을 구하는 종교로 격하시키고 있습니다. 근본무명의 해결인 해탈과 열반에 대한 기본적 개념과 구경목표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평화를 추구하는 것도 그 기조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해야 합니다. |
10 |
내 종교의 관점과 언어로 이웃종교를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의 입장과 언어로 그들의 종교를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석가모니부처님의 기본(근본)가르침을 무력화 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의 입장과 언어로 그들의 종교를 이해한다 함은 유신론 창조론을 그들의 입장과 언어로서 이해하라는 너무나 억지의 주장이 아니고 무엇인지요? |
출처; 아쇼카 선언은 대폭 수정되어야 합니다(법응스님)
아쇼카 선언은 대폭 수정되어야 합니다-법.docx
아쇼카 선언은 대폭 수정되어야 합니다-법응.pdf
8.23 아쇼카선언문과 이찬수목사의 글과 유사성
No |
8.23 아쇼카선언문 |
불교평론에 실린 이찬수 목사의 글 |
1 |
‘이웃’에 있는 나 자신의 종교이며, 내 종교를 비추고 있는 거울입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 연관된 존재일 뿐 아니라 서로를 비추고 있는 거울입니다. 나의 종교가 우주 전체를 담고 있듯이 상대의 종교 또한 우주 전체를 담고 있습니다. |
불교학자 김용표가 “현대 한국 불교도의 타종교에 대한 태도를” “교단적으로는 배타주의적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교리적으로는 포괄주의적 해석을 하고 있으며, 종교 체험적으로는 다원주의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고 진단한 것이 그 보기다. (불교학자 김용표의 말을 빌어 불교가 다원주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
2 |
각자 인연의 차이일 뿐입니다. 각자의 다른 인연이 만들어내는 다양성은 ‘있는 그대로’ 세계의 실상이며 아름다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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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연기적 세계관은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부처님의 관점이며, 불교가 세상과 관계 맺기를 원하는 방식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불교인들은 이웃종교를 진정으로 ‘이웃’으로 생각하는데 충분하지 못했으며 이웃종교인의 허물을 내 허물로 여기고 그들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여기는데 충분하지 못했음을 반성합니다. 이웃종교를 질시하거나 경쟁하는 상대로 여겼던 적은 없었는지 반성합니다. 그리고 이웃종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귀 기울여 배우려는 노력이 충분하지 못하였음을 반성합니다. |
내심 불교는 그리스도교보다 한 수, 아니 여러 수 위라는 심리적 위안감만 가질 뿐, 구체적으로 무엇이 그런지 진지하게 연구하려는 자세는 별반 보이지 않는다. 아니, 아예 관심조차 없어 보인다. 어떤 때는 관심이 없다기보다는 직접 대하기, 한 자리에서 만나기를 두려워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그리스도교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것은 그저 자신의 우물에만 안주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으며, 그것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종교적 의무 관심충실하지 못한 태도로 이어지게 된다. |
4 |
불교는 ‘나만의 진리’를 고집하지 않으며 불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이웃종교에도 진리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진리에 대한 표현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열린 진리관은 이웃종교를 대하는 기본 원칙이며 대화와 소통을 위한 출발입니다. |
상대를 알고 받아들이려는 적극적인 자세 없이는 언제까지고 자신의 ‘우물’에서만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 세상 모두를 내 지혜의 ‘바다’로 바꿀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
5 |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문법이 다를 뿐입니다. |
내가 보건대 이들 종단 간에는 그저 외형적 혹은 문화적 차이가 존재할 뿐, 교리나 사상, 더 나아가 종교 체험의 정도에는 별 차이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
6 |
이웃종교에 대한 인정과 관용이라는 소극적 차원을 넘어 그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배우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
-의상이 오늘날 태어났다면 ‘일승’이라는 우주적 구원의 진리 안에 그리스도교를 자연스럽게 포섭했으리라.
-불교는 나머지 10%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도 30%를 채우려는 그리스도교인의 노력 이상으로 기울여야 한다. 그럴 때에만 그리스도교가, 서양이 제대로 보일 것이다.
- 상대방의 세계에 매일만큼 그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치열한 매임과 속박의 과정을 거치고서야 비로소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불교 본래의 모습으로 다가설 수 있는 것일테니까. |
7 |
진리를 향한 동반적 관계이며 이웃종교의 장점을 통해 내 종교의 부족함을 채우는 상호보완적 관계입니다. |
-불교가 정말로 깊고 넓다면 ‘밖’의 것을 소화해 받아들핼 태도로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불교적 자세의 핵심에 속해 없다기보다기 때문이다. 그런데 받아들핼 태도로으려면 무엇보다 관심을 갖고 공부해야 한다. 공부해야 이해가 되고, 그래야 받아들핼 태도로게 된다. 모른 채 받아들인다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나 진배없는 것이다.
- 이 마당에 그리스도교를 차별의 대상으로 남겨두지 않고 적극 포섭하는 자세는 불교적으로 보더라도 필연적, 자연적인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
8 |
전법은 다른 종교인을 개종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행복과 안녕’을 실현하는데 그 궁극적 목적이 있습니다. 나의 종교를 선전하기 위해 타종교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와의 공존을 지향하고 다른 종교인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방법이어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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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이웃종교인들도 그들이 믿는 종교를 통해 평화와 안락을 구하고 있습니다. 길은 다르지만 우리가 이르고자 원하는 바는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
불교계 안에도 21세기 유신이 일어나야 할 시점에 와있는 것이 분명하다. 한국의 대표적인 고승인 원효의 일심(一心)사상과 여래장사상, 의상의 화엄일승(一乘)사상 등 최고 스승들의 뛰어난 사상들은 한결같이 일체의 차별적인 것들을 하나로 포섭해내려 한 시도였다는 사실에서도 오늘날 불교유신의 이유와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화쟁(和諍)을 자기 사유방식의 큰 틀로 삼았던 원효가 21세기에 다시 태어난다면 아마도 그리스도교를 화쟁 대상으로 삼았으리라 |
10 |
내 종교의 관점과 언어로 이웃종교를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그들의 입장과 언어로 그들의 종교를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 내가 보기에 불교는 스스로에 대해 깊고 넓은 종교라는 자긍심만을 가졌을 뿐, 정작 다른 종교나 사상을 실제로 포용할 만큼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
출처; 이찬수목사, 어느 불교적 기독교인이 본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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