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신년 감기/ 김한용

주혜1 2014. 10. 15. 15:54

신년 감기

 

        김한용

 

올해도 어김없이 친구를 얻었다.
이번엔 제법 "떠들썩한 놈으로 여간 만만치 않다
아마 얼마전 소주 몇 잔으로 영혼을 씻고
홀로 황망히 거닐다 돌아오던 밤
그때 슬며시 뒤따라오던 감기의 동행을
못 이기는 듯 허락한 듯하다
처음엔 침의 통로가 문제이더니
곧이어 전 호흡기관의 자유조종이 불가능해졌고
지금은 큰소리를 동반한 공기의 구토가 잦고
머리의 한쪽은 자꾸만 졸라대는 통증에게
뚝 떼어준지 오래다
하지만 난 이놈을 서둘러 돌려 내보내야겠다는 마음은 없다.
이 친구의 강제 배웅울 위해
늙은 약사를 만나는 일 따윈 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내 몸 속 어딘가 잘 익어가고 있는
시의 온도를 지속시키기 위해
담뱃불도 꺼뜨리지 않으려 하고
영혼을 맑히기 위한 소주 만찬도 변경의 여지는 없다.
이놈은 재촉하지 않아도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다
시나브로 빠져나갈 것이고
그동안 난 단지 약간의 침체를 느끼겠지만
어느 날 아침 부시시 눈 떴을 때
깨끗한 머리와 부드러운 침 삼킴을 다시 느끼면 그뿐이다.
내가 이놈에게 비교적 자비로운 연유는
이놈과는 싸움되는 싸움 싸워 볼 수 있는 때문이고
떠나야 할 때를 알아 조용히 떠나기 때문이며
결코 영혼을 공격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원단에 얻은 이 친구로 올 한해 싸움도 안 되는
싸움 걸어 올 모든 영혼 다치게 하는 일들과
몹쓸 눈물 뿌려야 할 가슴 무너지는 일들과
근원을 알 수 없는 흔들림들을 대신 할 수 있다면.....

 

감기여! 비록 가난한 몸이지만 잘 머물다 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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