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詩’ 7월호가 배달되었다. 요즘 전국적으로 극성을 부리는 열대야를 식히려
어제 한라산 탐라계곡에서 찍은 짙푸른 숲 사진에 6편의 시를 골라 싣는다.
이번호는 나태주 시인의 ‘권두 시론’을 싣고, 칼럼은 임보 선생의 ‘시와 감동’을 썼다.
‘이달의 우리 시단’에는 김동호, 이무원, 조병기, 김주혜, 임희숙, 김명원, 박해림의 시를,
‘정예 시조시인 6인 특집(3)’에는 민병도, 김연동, 정휘립, 최오균, 이송희, 김영완의
시조를 실었다. ‘우리시가 선정한 좋은 시(김금용)’에는 박경리, 박희진, 신경림, 허만하,
김석규, 홍일표의 시가 선정되었고, 신작 소시집은 염창권의 시와 고성만의 해설을 실었다.
‘신작 특집’에 시를 발표한 시인은 이상번 배경숙 송문헌 주경림 윤석주 김금용
이병기 고성만 최석우 장혜승 정하해 한수재 장성호 박승류 박소영 등이다.
영역시로 박희진의 ‘자연의 아름다움’을 고창수가 번역하고, 영미시 산책은 오든의
‘학교 아이들’을 배정국의 역으로, 중국시 소개는 하이즈의 ‘아시아의 구릿빛 땅이여’를
김금용 역으로 실었다.
♣ 허(虛) - 박희진
밤이 되어 찬란한 보석들이 어둔 하늘을 수놓을 때엔 배가 고파도 견딜 수 있어라 실상 이렇게 유리와 같은 가슴의 벽을 넘나드는 투명한 슬픔은 내 아무런 생生에의 집착을 지니지 않음이니 아 이대로 돌사람처럼 꽃다운 하늘 아래 단좌하여 허虛할 수 있음이여 나는 아노니 이윽고 내 야기夜氣에 젖어 차디찬 입가엔 그 은밀한 얇은 파문이 새겨질 것을
♣ 틈 - 허만하
틈을 주무른다. 애절한 눈빛으로 서로를 더듬는 알몸의 포옹이 만드는 캄캄한 틈. 멀어져가고 있는 지구의 쓸쓸한 등이 거느리고 있는 짙은 그늘. 진화론과 상호부조론 사이를 철벅거리며 건너는 순록 무리들의 예니세이 강. 설원에 쓰러지는 노을. 겨울나무 잔가지 끝 언저리. 푸근하고도 썰렁한 낙타 빛 하늘 언저리. 안개와 하늘의 틈.
지층 속에서 원유처럼 일렁이고 있는 쓰러진 나자식물 시체들의 해맑은 고함소리. 바위의 단단한 틈. 뼈와 살의 틈. 영혼과 육신의 틈. 빵과 꿈 사이의 아득한 틈. 낯선 도시에서 마시는 우울한 원두 빛 향내와 정액 빛 밀크 사이의 틈. 외로운 액체를 젓는 스푼. 존재는 틈이다. 손이 쑥쑥 들어가는 적막한 틈이다.
♣ 청빈한 나무 - 김석규
나무는 누워서 이사를 간다
받치고 섰던 하늘 더 멀리까지 내다보려고
나무는 누워서 이사를 간다
언제 했는지 이발을 하고
풀려서 너풀거리는 소매도 걷어붙이고
서서 자는 나무는 침대가 없다
잎새로 바람을 잣는 나무는 선풍기가 없다
항시 햇살을 이고 선 나무는 난로가 없다
그 흔한 냉장고도 텔레비전도 없이
단지 그늘만 키우는 제 몸 하나에
더는 깨지지 않도록 새끼로 동여맨 밥그릇
양말도 벗은 발목에 매달고
나무는 누워서 이사를 간다
♣ 태실胎室 - 홍일표
연어는 활활 타오르는 불덩어리다
붉은 포탄이다
마지막 가야할 곳
그리움도 지극하면 불이 되는지
물속을 뚫고 치달리는 불
물과의 난타전이다
살은 찢어져 너덜거리고,
저 멀리 중국 공안의 총격에 픽픽 나동그라지는
국경을 넘는 티베트 난민들
여기저기 부러진 길들이 퍼덕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헐떡이는 난민들
설원이 붉게 물들고,
물길을 놓친 연어들이 천천히 무거운 생을 내려놓는다
앞서간 연어들은
물이 부글부글 끓는 용광로로 뛰어든다
활활 타오르는 물속에서
입을 쩍쩍 벌리며
움켜쥐고 있던 생을 양도한다
생사의 틈새가 보이지 않는다
용광로에서 살구알 같은 내세가 쏟아져 나오고,
오래 숨죽이며 국경을 넘은 색색의 깃발들이 펄럭인다
♣ 논어論語 - 염창권
말의 가시를 뽑으려다
가시에 찔렸다
말로 인해 몸이 아프다,
내 살 속에서 네가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프니 너 또한 아프지 않은가,
바늘 같은 가시 둘을 나란히 놓아둔다
아프지 않은 말은 인仁하지 않다는 듯,
가시를 견디려면
아프게 이야기해야 한다
네가 준 말을
살 속에 깊이 묻어둔다.
♣ 달맞이꽃 - 김주혜
보름달이 뜨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작 보름달이 떠오르면 서성이다 놓쳐버린 사람, 보름달이 스러질 때 지구 반대편으로 사라진 사람. 자작나무 숲보다 깊은 가슴을 가진 사람. 해바라기 긴 그림자보다 더 외로운 사람. 어둠 속에 갇힌 나에게 심보르스카의 시를 읽어주며 달빛 천지로 만든 사람. 가끔 꿈속에 빙하가 되어 벌겋게 벗겨진 상처를 달래주며 흘러흘러 서쪽으로 사라진 그 사람을 위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부르며 밤마다 바다를 건너갑니다.
♬ 클래식 기타 연주곡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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