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혜 시평

[스크랩] ‘우리詩’ 2월호와 장수매

주혜1 2015. 4. 18. 13:56

 

 2월 2일 낮, ‘우리詩’ 2월호가 배달되었다. 가로 편집된 표지가 독특한데, 꽤 두툼하다는 것은 그만큼 읽을거리가 많다는 증거이리라. 연재 2회째 ‘그림과 함께 하는 시’가 박흥순 화백의 그림으로 6편 실렸는데 실감난다. 감동하며 읽은 시 몇 편을 골라 한림공원에 일찍 핀 장수매와 함께 올린다. 다음은 실린 글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권두 시론’은 임보의 ‘감동성의 조건’, 이달의『우리詩』18인 특집으로 신작시 홍해리 ‘친구를 찾아서’, 정순영 ‘봄의 속내’, 서지월 ‘저 흰 꽃잎’, 김주혜 ‘두통’, 노혜봉 ‘피노키오가 보낸 섬백리향 편지’, 김영호 ‘구룡산의 갈대’, 윤향기 ‘스며든다는 것’, 임희숙 ‘자싯물 보시布施’, 김왕노 ‘계절풍’, 송문헌 ‘나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으랴’, 신현락 ‘얼음구멍’, 정숙 ‘달빛 고양이와 시인’, 송영희 ‘연정’, 박강남 ‘오래된 말씀’, 박해림 ‘신몽유도원도’, 고성만 ‘저무는 빛’, 조영순 ‘베일’, 남유정 ‘봄이 소리로 핀다는 걸 알려준 나의 매화나무에게’ 외 각 1편씩을 실었다.


 ‘신작소시집 2인 특집’은 김석규 ‘양철지붕’, 이민화 ‘살아 있는 부채’ 외 각 5편, 2000년대 등단 신예시인 19인 특집 신작시 박원혜 ‘무죄’, 김선호 ‘담쟁이 넝쿨’, 강동수 ‘출어’, 안명옥 ‘나무’, 권순자 ‘장수하늘소’, 권현수 ‘먼 길’, 진란 ‘낙타눈썹여자’, 김경성 ‘가오리가 있는 풍경’, 정재분 ‘뷰티풀 월드’, 최진화 ‘그물’, 박연숙 ‘지뢰찾기게임’, 이성웅 ‘바람의 CEO’, 박승류 ‘진화론’, 이용헌 ‘길 위의 연필’, 이재부 ‘지문指紋’, 조유리 ‘사기론論’, 황연진 ‘문자를 전송하다’, 이사랑 ‘나는 바람벽이었다’, 이화영 ‘종이컵에 권고함’ 외 각 1편씩이다.


 ‘알기 쉬운 詩창작 교실(12회)’로 임보 ‘당신도 좋은 詩를 쓸 수 있다’, 우리詩가 선정한 좋은 詩(34회)로 고성만 추천시인이 이동훈 장수철 이송희 이제니 박형권 이봉환 시인의 시를, ‘이 詩, 나는 이렇게 썼다’는 서량 ‘장작불, 혹은 가오리연’, 장성호 ‘어떤 주검, 나무들의 무덤 그리고 어떤 죽음’, 한시 읽기는 진경환의 연암 박지원의 ‘극한極寒’, 영미시 산책으로 백정국의 엘리자 액튼 ‘나 그대를 사랑합니다’, 우리詩 월평은 김신영 ‘시의 혈관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한다’가 실렸다.


 

♧ 친구를 찾아서 - 홍해리


먼저 간 친구를 찾아 산을 오르는데

도랑가 물봉선화가 빨갛게 피어

개울개울 흘러내리는 물소리와

참나무 그늘을 밝히고 있었네

오래 전에 가신 어머니 곁

쑥 억새 바랭이 방가지똥

얼크러져 부산을 떠는 자리

때늦은 꿩이 한번 울고 갔다

'얼굴을 만들어야지'* 하며 바쁘던,

평생을 뛰면서 살다 가버린 친구

작은 돌 하나 뉘어 놓고 잠들었네

좋아하던 소주 한잔 따라 놓고

북어포 하나 앞에 펼치니

친구는 왜 왔냐며 반기는 듯,

마음만 부자였고

늘 빈 세상을 살았던 친구

한세상 사는 일이 무엇이라고

더 살아 다를 것이 없었던 걸까

참나무 그늘이 짙어 시원한데도

꽤나 마신 술에 얼굴이 벌개져서

우리는 흔들리는 발걸음으로

도랑도랑 흐르는 물소리 따라

두런두런 산길을 내려올 때

물봉선화도 빨갛게 취해 있었네.


 * ‘얼굴을 만들어야지’는 황도제 시인의 시집 제목임



 

♧ 목각 인형 - 김주혜


 내 아버지는 늘 그녀와 함께 있었다. 그녀와 관계를 가지면서 자연적인 그녀의 얼굴에 점령되어 아버지 자신도 그녀를 닮아가고 있었다. 내 어머니는 비처럼 밤을 향해 꽂혀 그 공허함을 달래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와 함께 있는 아버지가 보기 좋았다. 그럴 때 아버지는 낯선 사람 같았으나 그 얼굴에서 험하지 않은 산을 볼 수 있었고, 풍랑 없는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어느 날, 그녀의 가는 그물 사이에 끼어 있던 어머니는 아버지 방안 가득 쌓인 목각 인형을 모두 치워버렸다. 목각 인형이 한없이 어깨를 들먹이며 떠나간 후 아버지는 늘 석양에 들어오셨다. 아버지의 산과 바다는 허물어지고 말라붙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거대한 도시의 급류 속에 이리저리 밀리며 마지막 소리를 뿌려야 할 그 순간, 그녀가 돌아왔다. 그녀에 의해 감추어진 아버지의 마지막 언어를 나는 아버지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얼굴 전면에서 흘러나오는 빛으로 들을 수 있었다.



 

♧ 기침 - 이동훈


기침이 잦아지면서

성가시던 가려움증이 사라졌다.

독한 놈을 더 독한 놈이 몰아낸 꼴이다.

쿨룩, 쿨룩

혹여 비뚜로 나간 말이나 행동이

이부자리까지 들썩하게 하는 게 아닐까.

짐짓 일상을 반성하는 시늉까지 하는데

아내는 병원에 가지 않는다고 야단이다.

기운을 다 소모하면 편안해질 것을

처방 받고 기운을 차리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그래도 아내 말에 토를 달지는 않는다.

아예 밥까지 먹지 말라고 하면 곤란하니까.

굶을 수만 있다면 그리해도 좋겠지만

가려움증이나 기침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게

한 끼를 굶는 일이다.

구걸도 마다않는 가난 앞에는

너무 부끄러운 고백이다.

배고픈 이웃은 가까이 있는데 무수한 말들만

분파를 나누어 배부르게 경계를 쌓고 있지 않은가.

기침은 어느 분파에도 속하지 않아

저 홀로 밤새 터져 나오니

아내 입장에서는 께름한 것이 당연하다.

다 낫기 전에 병원에 가야겠다는 우스갯말을

느지막이 고민해 보는데

그래, 안 그래, 그래, 안 그래

연하여 묻듯이

쿨룩, 쿨룩대는 것이다.



 

♧ 환절기의 판화 - 이송희


고원을 꿈꾸던 밤들이 포개져


붉은 눈 깜빡이며 소리의 알을 낳고


마음 결 따라가지 못해 잔설로 남는다


그물처럼 달려드는 바람의 눈을 피해


급히 비닐 막을 치는 분주한 손길 뒤로


그림자 짙어진 하늘이 촉촉하게 몸을 푼다


오목하게 패인 상처는 별빛으로 다스리고


빈 가지에 눈꽃 하나 접붙이는 동안에


생살의 아픔을 뚫고 얼음꽃 피어난다



 

♧ 물푸레나무 - 박형권


저 나무, 물푸레나무

안에 들어가 살림 차리면

숟가락과 냄비를 들고 부름켜로 들어가

방 한 칸 내고

엽서만 한 창문을 내고

녹차 물을 끓이면

지나가던 달빛이 창문에 흰 이마를 대고

나물처럼 조물조물 버무린 살림을 엿보겠다

나는 엎드려서 책을 읽고 있고

겨울 들판에서 옮겨온 밤까치꽃 같은 여자가 뜨개질을 하던 손을 멈추고

벽에 귀를 댄다

물푸레나무에는 물이 많아서

천장에서 똑똑 물이 떨어져

그릇이란 그릇 죄다 받쳐놓으면

실로폰 소리 나겠지

겨울 내내 물 푸다가 봄이 오겠다

여자하고 나하고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해야 서로 좋아하는 것

나의 하초와 여자의 클리토리스가 파랗게 물이 들도록

끙 끙 끙

어떻게 어떻게 힘주다 보면

나도 모르게 봄을 낳아서

갓 낳은 알처럼 모락모락 김이 나는 세상이 찾아오겠다



 

♧ 거리가 생겨났다 - 이봉환


흐리고 우울한 날이어서 활짝,


달맞이꽃밭에 노랑나비


멈칫멈칫 금방 피어난 듯 꽃잎인 듯 달라붙는다 문득


노란 것들과 나 사이 꽃잎인지 나비인지


구분이 안 가는 거리가 생겨난다


떠나는 길과 머무는 집이 묶였다가 풀어지고


걱정과 환희가 함께 버무려지는 거리


한 걸음 집 쪽으로 물러서면 먼 남의 일이 되지만


한 발짝 길 쪽으로 다가가면 활활 애가 타는 거리


그 거리가 있어 나 견딜 수 있네


그리움이 꽃피는 거기 그 거리


그쯤에 놓여진 내 애달픈 사랑


그때 창문을 열면?

 

 

 

출처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글쓴이 : 김창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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