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씨시(Assisi)의 전설
문우일 매니토바대 명예교수 |
어느 추운 겨울날 프랜시스(Francis) 신부와 클레어(Clare) 수녀는 스펠로(Spello)에서 아씨시(Assisi)로 가는 길을 함께 가게 되었다. 그리 먼 길은 아니지만 움브리아(Umbria) 평야에서 불어닥치는 찬바람을 잠깐 피하기 위하여 주막에 들렀다. 거기서 빵과 물을 얻어 들고 나오는데, 사람들은 수근 거렸다. 저렇게 아름다운 젊은 수녀가 이 깊은 산길을 왜 신부하고 같이 가는가? 의심하는 눈치들이 분명했다.
눈까지 날리는 수바씨오(Subassio) 산길의 겨울 해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말없이 얼마를 걷던 프랜시스 신부는 클레어 수녀한테 “수녀님, 당신은 지금 동네 사람들이 왜 수근 거리고 있는지 아십니까?” 하고 물었다. 신부가 무슨 뜻으로 묻는지를 아는 수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신부는 “수녀님, 이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세요. 그러면 해지기 전에 수녀원에 도착 할 겁니다. 나는 천천히 뒤에 떨어져 하느님의 인도를 따르며 혼자 가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오솔길 한 가운데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수녀도 무릎을 꿇고 잠깐 기도를 한 후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오솔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눈 날리는 잿빛 하늘 아래를 걷던 수녀는 발을 멈추고 돌아서서 “신부님, 다음에는 언제 뵙겠습니까?” 하고 소리쳐 물었다. 신부는 “아마 따뜻한 여름이 오고, 장미꽃이 필 무렵이면...” 하고 대답 했다. 수녀는 실망하는 표정으로 돌아 서서 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오솔길 옆 노간주 나무와 관목들이 온통 장미로 덮이기 시작했다. 수녀는 노간주와 관목들의 가시에 찔려 피가 흐르는 것도 모르고 장미 한다발을 꺾어 신부에게 건네주었다.
한여름 땡볕에 바람 한점 없는 아씨시의 거리들을 서둘러 걸어가는 신부들, 팔 옆에 꼭 낀 성서와 둥근 챙의 까만 모자들은 지금도 옛 로마의 천주교 전통 그대로이지만, 떼지어 밀려오는 관광객 그룹들은 마치 공단에서 뿜어내는 검붉은 연기처럼 혐오를 느끼게 한다. 푸르러야 할 산들마저 뿌연 갈색 배경을 이룬다. 아씨시의 성소와 성소들 사이에 단정하게 가꾸어진 집들과 규모 있게 다듬어진 돌로 포장해 놓은 꼬불꼬불한 골목길들. 이 골목길들을 걸을 때 우리는 800여년 지난 오늘에도 (성인) 프랜시스 신부와 그의 가르침 “주님, 내가 위로를 받기를 바라기보다는 위로를 줄 수 있고, 이해 받기를 바라기보다는 이해 할 수 있고, 사랑 받기를 바라기보다는 내가 사랑을 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성직자들을 대할 때, 그들은 마치 성인이어야 하는 것 같이 착각하고, 때로는 그들의 행동거취를 비판하기도 한다. 기독교 또는 불교의 성직자와 출가한 수행자들은 그들의 경전 가르침을 따라 세속의 탐욕과 유혹을 견디고 이겨내려고 노력하며 하루하루를 살 것 같다. 한편 그들도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기에 우리는 수행하는 그들의 일상을 보고, 더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눈 내리는 산길을 맨발로 다니던 프랜시스 신부의 기도에서, 그리고 한겨울에 노간주와 관목에서 장미꽃을 피게 한 클레어 수녀의 기적을 생각할 때 우리는 수행자들의 인간다움 ? 그들의 아름다운 우정(友情)과 연민(憐憫)을 본다.
눈까지 날리는 수바씨오(Subassio) 산길의 겨울 해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말없이 얼마를 걷던 프랜시스 신부는 클레어 수녀한테 “수녀님, 당신은 지금 동네 사람들이 왜 수근 거리고 있는지 아십니까?” 하고 물었다. 신부가 무슨 뜻으로 묻는지를 아는 수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신부는 “수녀님, 이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세요. 그러면 해지기 전에 수녀원에 도착 할 겁니다. 나는 천천히 뒤에 떨어져 하느님의 인도를 따르며 혼자 가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오솔길 한 가운데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수녀도 무릎을 꿇고 잠깐 기도를 한 후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오솔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눈 날리는 잿빛 하늘 아래를 걷던 수녀는 발을 멈추고 돌아서서 “신부님, 다음에는 언제 뵙겠습니까?” 하고 소리쳐 물었다. 신부는 “아마 따뜻한 여름이 오고, 장미꽃이 필 무렵이면...” 하고 대답 했다. 수녀는 실망하는 표정으로 돌아 서서 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오솔길 옆 노간주 나무와 관목들이 온통 장미로 덮이기 시작했다. 수녀는 노간주와 관목들의 가시에 찔려 피가 흐르는 것도 모르고 장미 한다발을 꺾어 신부에게 건네주었다.
페루지아(Perugia)를 지나 동남쪽으로 차를 몰아 탁 트인 움브리아 평야 안으로 들어가면, 움브리아 평야 동편 수바씨오 산기슭 위로 하얗게 보이는 마을이 프랜시스 신부가 살던 아씨시 이다. 수바씨오 주변 산맥의 산들은 미국의 서남부 캘리포니아의 산들과 마찬가지로 바람막이가 될 나무도 숲도 없이 노간주와 관목들만 무성한 지역이다. 바스티아(Bastia)에서 이 벌거숭이산들을 쳐다보며 치아씨오(Chiascio) 강을 건너 로카 마지오레(Rocca Magiore)를 향해 걸어 올라가면 아씨시 마을로 들어간다.
한여름 땡볕에 바람 한점 없는 아씨시의 거리들을 서둘러 걸어가는 신부들, 팔 옆에 꼭 낀 성서와 둥근 챙의 까만 모자들은 지금도 옛 로마의 천주교 전통 그대로이지만, 떼지어 밀려오는 관광객 그룹들은 마치 공단에서 뿜어내는 검붉은 연기처럼 혐오를 느끼게 한다. 푸르러야 할 산들마저 뿌연 갈색 배경을 이룬다. 아씨시의 성소와 성소들 사이에 단정하게 가꾸어진 집들과 규모 있게 다듬어진 돌로 포장해 놓은 꼬불꼬불한 골목길들. 이 골목길들을 걸을 때 우리는 800여년 지난 오늘에도 (성인) 프랜시스 신부와 그의 가르침 “주님, 내가 위로를 받기를 바라기보다는 위로를 줄 수 있고, 이해 받기를 바라기보다는 이해 할 수 있고, 사랑 받기를 바라기보다는 내가 사랑을 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성직자들을 대할 때, 그들은 마치 성인이어야 하는 것 같이 착각하고, 때로는 그들의 행동거취를 비판하기도 한다. 기독교 또는 불교의 성직자와 출가한 수행자들은 그들의 경전 가르침을 따라 세속의 탐욕과 유혹을 견디고 이겨내려고 노력하며 하루하루를 살 것 같다. 한편 그들도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기에 우리는 수행하는 그들의 일상을 보고, 더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눈 내리는 산길을 맨발로 다니던 프랜시스 신부의 기도에서, 그리고 한겨울에 노간주와 관목에서 장미꽃을 피게 한 클레어 수녀의 기적을 생각할 때 우리는 수행자들의 인간다움 ? 그들의 아름다운 우정(友情)과 연민(憐憫)을 본다.
캐나다 한국일보
발행일 : 201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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