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스크랩] 공간시낭독회 회원 소장전에 나온 내 손편지/ 정숙자

주혜1 2018. 2. 24. 15:45

 

 

    공간시낭독회 회원 소장전에 나온 내 손편지

 

    정숙자 시인

 

 

  등단 이후 줄곧 편지를 써왔다. 개인이 발간한 시집이나 수필집, 기타 어떤 책이든 내 집주소와 이름, 보내는 분의 사인이 들어있는 책에 대해서는 성실히 답신을 띄웠다. 한두 번 정도 빼먹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거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없지 않았던 게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런데 내 편지라는 것은 등단 이후뿐 아니라 초등 4년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한글을 반듯하게 쓸 수 있게 되면서부터 출발된 셈이다.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각지에서 부쳐오는 친척들의 우편물에 즉답했고, 점차 동네 할머님들의 편지까지 대필하게 되었다.

  뿐일까, 중매가 깨어진 앞뒷집 언니들의 처지를 대필해주어 혼인이 성사되기도 했고, 나중에는 종단에서 파면 위기에 몰린 스님의 ‘탄원서’를 편지 형식으로 제출해 무마가 되었던 적도 있다. 그것은 편지를 잘 써서가 아니라 좌우 정직한 사실과 성심을 다했기 때문이었다.

  2017년, 마지막으로 쓴 편지의 고유번호가 'No, 17-122'였고, 그는 양문규 시인의 시집 『여여하였다』에 대한 회답이었다. 내가 꼬박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인즉, 아버지 뜻대로 ‘잘 받았음’의 알림이지만 거기 덧붙여 ‘잘 읽었습니다’를 참말로 써야 되기 때문이다.

  사적인 편지는 일인에게 보내는 것이고, 일회성이고 거기 어떤 사심도 끼어들 수 없는 일종의 순수지향의 정신이자 마음이다. 그러므로 편지는 받는 이나 쓰는 이가 동시에 행복하고, 반갑게 접고 펴는 글이다. 내 등단 나이가 어느새 30년, 특이하달 것도 없이 걸어온 30 년!

  그 30년 만에 천만 뜻밖의 소식이 전해져왔다. <시인의 애장품>으로 내 편지가 출품되었다는 것이다. 편지를 액자에 넣어 내놓으신 분은 김주혜 시인이고, 10년 전 출간한 시집『연꽃마을 별똥별』을 받고-읽고 쓴 답장이라고. (2017. 8. 1.~9. 9. 문학의집. 서울 전시실) 

  10년 전! 내가 쓴 편지를 보기 위해 전시장에 들렀다. 정말이지 꾀죄죄한 내 육필이 한곳에서 빛을 받고 있었다. 왈칵 눈물이 솟구침은 막을 수 없는 감동이었다. 뜨르르한 이름자 추수하는 이 시대에 아직도 이러한 사무사의 인품이 우리 곁에 있었구나 싶은 뭉클함이었다.

 

 

  보름달이 뜨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작 보름달이 떠

오르면 서성이다 놓쳐버린 사람, 보름달이 스러질 때 지구 반

대편으로 사라진 사람, 자작나무 숲보다 깊은 가슴을 가진 사

람. 어둠 속에 갇힌 나에게 심보르스카의 시를 읽어 주며 달빛

빛 천지로 만든 사람. 가끔 꿈속에 빙하가 되어 벌겋게 벗어진

상처를 달래주며 흘러흘러 서쪽으로 사라진 그 사람을 위해 나

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부르며 밤마다 바다를 건너

다.

 -「달맞이꽃」전문, 시집『연꽃마을 별똥별』, 2008, 문학아카데미

 

 

  “ 선생님의 이번 시집『연꽃마을 별똥별』은 매우 차분하고 슬픈, 진실과 진솔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위에 베낀 「달맞이꽃」만 보더라도 시가 감정으로 떨어지지 않고 마지막까지 탄력을 유지하고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 이게 바로 그 편지에 담긴 소회였다.

  「달맞이꽃」이 슬픈 줄이야 그때도 알았지만 전시장에서 다시 읽는 내 심정은 10년 전 그때의 느낌을 상회했다. 이 시는 미망인이 된 지 오래잖은 여인의 마음을 그린 것인데, 십 년이라는 세월의 중간쯤에 나 역시 그 모습이 되어 있었기에 동병상련의 회한이 겹쳐졌던 것.

  김주혜 시인과 나는 따로 전화하거나 만난 일도 없다. 서로 활동범위가 달라 모임에서 두어 번 인사를 나누었을 뿐. 그런 게 바로 순백의 우정이라는 것일까? 단테는 다리 위를 지나가는 베아트리체를 단 한번 본 후『신곡』을 썼다지 않는가. 담담하되 단단히 살아 숨쉬는!

  물론, 시는 뛰어나야 좋지만 시인은 소박할수록 고매하다. 우뚝 솟은 봉우리가 되지 않아도, 군계일학이 되지 않아도 된다. 외로이 읽고 쓰며 정진한 나머지 그에게서 문향이 배어나올 정도면 족하리라. 가끔 김주혜 시인의 순수함을 되짚으며 그 깊고 먼 우정에 감사드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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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문학』2018-3월호 <목동살롱 27>에서

출처 : 맑고 따뜻하게
글쓴이 : 검지 정숙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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