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수상소감문

주혜1 2021. 6. 11. 19:56

심사평]
시인들이 많다는 말을 가끔 듣는다.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 모두가  시인이 되면 어떠랴.
시대적 삶을 시대적 언어로 구어내놓은 저마다의 익은 솜씨만 갖추어 준다면.
 이번에 새롭게 만난  김주혜시인은 서로 다른 감성과 공감으로 빛과 소리를 만들어낸 분이다. 아주 깊은 땅 속에서 햇빛을 만나기를 주저하던 옥돌을 캐는 기쁨으로 새 신인을 시단에 밀어낸다
김주혜의 [스트레스]외 4편은 우리네의 일상적 삶을 아주 잘게 썰어내고 있는 세기細技에 먼저 눈이 번쩍 띈다. 시를 가지고 사회라는 커다란 덩어리와 끙끙대며 싸우는 것이 아니라 모세혈관의 실핏줄 같이 가느다란 실로 우리가 미처 뚫어보지 못하는 세계를 바느질 하고 있다이처럼 꼼꼼하게 시를 쓰기까지의 감성의 피흘림은 어떠했겠는가. 
                심사위원: 신경림申庚林, 이근배李根培

[당선소감]
아차, 싶은 생각이다.
무언가 바스락거리고 싶은 마음에 잠깐 골목길에라도 나가보자던 것이 그만 되돌릴 수 없는 발길이 된 기분이다 평소 곤충들의 생활에 관심을 가졌었다. 매미의 참을성, 육각형의 마술사 꿀벌, 지극한 모성 속에 죽어가는 거미의 일생, 놀라운 지능과 재능을 가진 개미사회의 질서 등... 작고 하잘 것 없는 곤충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불가사의한 지혜가 어쩌면 우리 인간보다 더 효과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경외로움을 느껴 나름대로 나와 연결지어 생각해보곤 했다. 그것들이 하나 둘 재목이 되어 보잘 것 없는 둥지를 틀곤 했다.
이제, 그 둥지에 새로운 문패를 달아주신 [민족과 문학]사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늦은 출발이지만 넘어져도 돌멩이 하나라도 주워올리겠다는 정신으로 시를 쓰겠다. 이제껏 걸어온 길보다 앞으로 나아갈 길이 더 멀고 험한 길임을 익히 알기에 겸허한 자세로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한 내달음을 하겠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겠다
뽑아주신 두 분 심사위원 선생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리며, 자신감을 갖도록 격려해주신 박선생님께 고마움을 전한다. 아울러 나으 ㅣ사랑하는 가족들과 내 곁에 정말로 좋은 친구들께 이 영광을 돌리며 좋은 시를 쓰겠다는 다짐으로 기도에 대신한다.

[시인들이 뽑은 시인상 소감]
  돌아보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삶의 조건들이 나를 대신하여 선택을 내리곤 하였다. 좋아하지 않는 일, 황당한 일, 지겨운 일들이 주기적으로 일어났다.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이 심해지며 깊이 잠수하듯 지내던 어느날 박선생님의 위독하시다는 메시지를 받고는 그 놀라움에  또다시 후회하는 시간이 닥쳐올까 두려워져 제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
시를 쓰면 쓸수록  내 무력함 때문에 괴로워 차라리 내 단점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한결 쉬운 일이 아닐까 생각하며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시 속으로 도피하기로 했다, 누군가에 보이기 위한 시쓰기가 아니라 훨씬 자유로워 좋았다. 단어 하나하나가 의미를 갖는 곳으로의 도피는 어느 것 하나 일상적이지 않아도 망설이고 흔들릴 때마다 구름이 바람이 꽃들이 말을 걸어오고 대답을 들려주며 위로해 주었다. 
그거면 됐다. 시지프스가 바위를 굴리면서 그것을 무의미하게 여기지 않고 자신의 할 일이라는 걸 자각할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살아나는 것처럼 내가 시를 쓰는 동안 내 삶은 존재하고 있다는 자각이 일어나기에 나는 충분했다. 의미를 부여하는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일이 시쓰기였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일이었다. 무생물이든 생물이든 보이든 보이지 않든 사물에 숨을 불어넣는 아름다운 반항이 곧 시를 쓰는 힘이 되었다.
'많은 시 또한 티끌이다' 라는 말이 생각난다. 우리처럼 시인이 많은 나라도 없는데  일부 시인들이 쓰는 시가 어려워서 읽을 수가 없을 때도 많다. 내 머리의 용량이 부족한 것일지 시대가 차원을 달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서도 엘리엇은 25세가 넘어서도 시인이고자 하는 사람에겐 역사적 감각이 필요하다고 했으니 곧 역사적 감각이란 전통이 아닐까 한다.  시의 전통을 자기 것으로 터득하며, 자기만의 생각과 경험을 쓰되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을 써야겠다.. 헌데 왜들 그리 어렵게들 시를 쓰는지. 
[ 시인들이 뽑는 시인 상]이 주는 무게를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마 이 무거운 상의 무게를 내가 잘 견뎌낼지 겁이나기도 한다. 좀더 젊었을 때 받았더라면 혹 설레고 재밌고 감동적이었을 터인데 지금이야 내 인생에 있어 이 자리가 다시 도약할 수 있는 그런 시기는 아니지 않나 싶다. 박선생님께서 축하한다면서 늦었지만 상을 주신다고 하는데 고마운 마음에 더 이상 고사할 면목이 없어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누가 있어 이만큼이나 나를 인정해 주랴 싶어 가슴 한가운데 물이 가득 고이는 것을 느끼며 시인의 길로 들어서서 세 권의 시집을 내고 더 못 오를 순간일 수도 있을 것 같아 상을 받기로 욕심을 냈다.
90년 가을, 대가이신 신경림 이근배 시인으로부터 제 1회 신인상을 받고는 곧 날아오를 것만 같았던 등단의 기쁨도 잠시 [민족과 문학]母誌가 금세 사라지고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었다. 그때 의지할 곳 없는 나는 아카데미 식구들에게서 위로를 받고 기쁨도 아픔도 함께 했으나 늘 불운의 아이콘처럼 도약할 시기마다 위기가 왔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라 하겠는지. 
내가 종교에 의지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고 그 핑계로 시는 자연스레 멀리하게 되었다 내 운명을 쥐고 있는 신이 있다면 이렇게 정직하게 살고 있는 내가 원하시는 길로 곧게 가고 있으면 언젠가는 억울함에서 구해주시지 않겠는가 라는 도전적인 오기로 종교활동에 열심히 임하고 있다
상을 받는것이 별거냐고 했는데 이제 보니 기분 좋은 인정의 지표는 되지 않나 싶다. (미완)

달맞이꽃
                                                                              김주혜  
             
보름달이 뜨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작 보름달이 떠오르면 서성이다 놓쳐버린 사람, 
보름달이 스러질 때 지구 반대편으로 사라진 사람. 자작나무 숲보다 깊은 가슴을 가진 사람. 
해바라기 긴 그림자보다 더 외로운 사람. 어둠 속에 갇힌 나에게 심보르스카의 시를 읽어주며 
달빛 천지로 만든 사람. 가끔 꿈속에 빙하가 되어 벌겋게 벗어진 상처를 달래주며 흘러흘러 
서쪽으로 사라진 그 사람을 위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부르며 밤마다 바다를 
건너갑니다. 


취醉 
                                                                            김주혜
 
 와인을 따라보면 안다. 만남이 얼마나 설레는지. 물방울 같은 잔에 
은밀한 색으로 떨어지는 매혹을 보면 안다.입맞춤이 얼마나 달콤한지. 
글라스에 찰랑이며 하늘거리는 주평선酒平線을 보면 안다. 주고받는 
눈길이 얼마나 아득한지. 쟁그랑 부딪쳐 보면 안다.  이름을 불러주는 
너의 음성이 얼마나 교교皎皎한지.온몸이 흠뻑 젖어 보면 안다.너와의
사랑이 결코 맨정신이 아니었음을. 

숲속의 헌책방

                          김주혜

단양군 적성면 골짜기
숲속의 헌책방에 들어서자
흙과 자갈 바닥에 뒹구는 헌책들
그 사이로 계곡물소리, 바람소리와 함께 
책 곰팡이 냄새가 왠지 정겹다

청계천변을 누비며 찾아다닌 기억들
밤새워 도란거리던 시간들
모두, 여기서 
짓눌리고 멍들고 남루한 채 풍장風葬당하고 있구나

양주동의 여요전주麗謠箋注 
유창돈의 이조어사전李朝語辭典
백철의 문학개론文學槪論
90년 내 초기 동인지까지 
새록새록 묻어나는 반가운 사람들
함성을 지르며 가슴에 꼭 끌어안는다.

놓쳐버린 내 시간은 어디쯤 묶여 있을까.
숱한 비틀림으로 굽은 내 애잔한 추억처럼 
숲속 나무들 사이로 들어오는 비좁은 햇살, 
그래도 저 책엔 방금 새싹이 돋아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