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나는 세상에 칼을. ..!

주혜1 2025. 1. 23. 23:08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10,34) ?
예수님이 어찌하여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예수님은 어느날
"나는 이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복음 10장 34절)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복음선포이 가져오는 분열과 갈등을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칼"은 문자적인 폭력이 아니라, 진리와 복음이 세상에서 가져올 충격적인 분리와 결단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진리를 세상에 가져오셨고, 그 진리는 기존의 죄와 불의한 체계, 인간적 욕망과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를 따르는 삶은 필연적으로 세상의 가치관과 대립하며, 이로 인해 갈등과 분열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복음이 중립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분을 따르려면 분명한 "예"와 "아니오"의 결단이 필요하며, 이는 가족, 친구, 사회적 관계에서도 갈등을 일으킬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실제로 더 충격적인 말씀은 마태복음 10장 35-36절에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가 될 것이다"라고 하셨으니 진리를 따르는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평화를 반대하거나 갈등을 의도적으로 조장하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말씀하신 "칼"은 잘못된 평화, 즉 불의와 타협된 겉모습의 평화를 깨뜨리는 도구로 이해됩니다.
예수님은 죄와 거짓된 화해를 무너뜨리고, 참된 하나님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먼저 분열과 갈등의 과정을 겪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우리가 진리를 따르기 위해 대가를 치러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복음은 종종 우리의 안락함과 충돌하며, 삶에서 불편한 결단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이는 가족, 사회, 또는 개인적 가치관에서도 도전이 될 수 있지만,
진리를 따르는 길이 결국 참된 평화로 이끄는 과정임을 믿으라는 메시지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진리를 따라 살기 위한 신앙의 길이 결코 쉽지 않음을 경고하면서도,
진리를 향한 결단과 희생이 참된 하느님의 평화를 이루는 시련과 갈등을 거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시간의 개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
전자는 흐르는 시간, 즉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물리적 시간을 뜻하고
후자는 특별한 의미와 결정을 요구하는 시간을 뜻합니다.

"때가 찼다"라는 선언으로 시작 되는 예수님의 복음선포 시점은
언제나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삶의 결정적 순간이 왔다는
카이로스(Kairos)입니다.

이는 곧 크로노스 속에서 카이로스를 발견하라는 초대입니다.
시대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라는 절대적 권고입니다.

예수님은 진리 앞에서 항상 명확하고 단호하셨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에게도 진리를 따를 때 "예는 예, 아니오는 아니오"로 분명히 말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복음 5:37). 이는 진리를 향한 결단과 일관된 신앙의 자세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진리와 거짓의 경계에서 모호함을 허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삶과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데 있어
타협이나 중립이 없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특히 바리사이파와 서기관들의 위선적 행위를 꾸짖으실 때,
또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실 때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진리 앞에서 보여주신 "예"와 "아니오"는 단순한 언어적 선택을 넘어,
하나님 나라의 길로 나아가는 분명한 결단과 순종을 상징합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태도로 진리와 신앙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복음을 통해 받고 있습니다.

양비론에 머물며 간을 보는 비겁한 기회주의자가 되지 말고
진리와 정의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단으로 진리의 하느님과 동행하며,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이 바른 믿음이고
참된 의미와 가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와 아니오’의 선택은 단순히 인간적 결정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삶을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카이로스를 놓치지 않고, 순간마다 진리를 선택할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 안에서 성숙되어 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할 믿음의 길이며,
신앙의 핵심이 되는 삶의 태도가 될 것입니다.


‘예와 아니오’의 기로에서 ‘예니오’라는 양비론으로
야(Ja) 혹은 나인(Nein)dl 아니라 야인(Jein)으로 얼버무리며
어려운 시절이니 이것도 저것도 다 이해 할 수 있으니
예와 아니오라는 기로에 서는 불편을 감수하지말고
“그저 열심히 기도하라”는 권고는 에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복음적 불평화란, 진리와 거짓, 정의와 불의가 충돌하는 상황 속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갈등을 말합니다. 이는 단순히 인간적 관점에서의 혼란이나 불편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진리와 인간의 현실이 부딪히는 자리에서 나타나는 영적 현상입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불평화는 중요한 전환점과 연결되었으며, 이러한 순간에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하는 결단이 요구되었습니다.
이 신학적 불평화는 진리가 명확히 드러날 때,
그 진리에 따라 살기 위해 필요한 갈등과 희생을 포함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복음 10:34)는 선언은,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불의한 구조나 잘못된 가치관과 충돌할 때 발생하는 불평화를 예고합니다.

이는 타협할 수 없는 진리가 요구하는 불가피한 갈등이며,
이는 단순한 불화가 아니라 복음적 평화로 가기 위한 과정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순간은 신학적으로 카이로스(Kairos),
즉 하나님의 특별한 시간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순간에는 진리와 정의를 선택하기 위해
개인과 공동체가 분명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예를 들어, 교회 역사는 이러한 결단의 순간들로 가득합니다.
초대 교회의 순교자들은 진리 앞에서 "예"를 외쳤고,
종교개혁이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같은 사건에서도 교회는
"아니오"를 통해 잘못된 관행을 거부하며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다.

이러한 결단은 불평화를 초래했지만,
궁극적으로는 더 깊은 평화를 이루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신학적으로 "예"와 "아니오"는 단순한 선택을 넘어,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는 결단과 순종을 상징합니다.
"예"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긍정적 응답이며,
이는 믿음의 표현이자 하느님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리고  "아니오"는 불의와 거짓에 대한 거부이며,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용기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과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예"와 "아니오"를 동시에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뜻에 "예"라고 응답하며,
동시에 죄와 거짓된 권력에 "아니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도 이 불평화는 여전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우리거 막딱뜨린 이상한 정치상황은 물론
기후 위기, 사회적 불평등, 인종 차별, 전쟁과 같은 문제들은
교회와 신앙인들에게 역사적 순간에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해야 할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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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어려운 말은
“예와 아니오”입니다

지독한 독버섯은
지독히 순수한 땅에서
더 맹열히 기생하며 자라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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