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그 불길은 타오르고/ 조광호신부

주혜1 2025. 6. 6. 17:12

그 불길은 끝없이 타오르고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 -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절*

주 예수님, 당신께서는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하셨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 첫 숨을 내쉬던 그 순간, 당신께서는 제 영혼 깊은 곳에 한 줌의 불씨를 심어주셨습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내면의 은밀한 골짜기, 영원한 생명이신 당신의 숨결로 살며시 그러나 분명하게, 내 작은 심장과 팔닥이는 숨에 당신의 거룩한 그 불을 지피셨습니다.

그 불은 뜨거웠고, 그 불은 거룩했으며,
그 불은 제 영혼 가장 깊은 곳 불변의 제 양심에 살아 있는 불씨로 은밀히 숨어 계신

당신의 신비로운 현존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현란한 세상의 유혹에 눈길이 가고 마침내 번뇌의 사특한 욕망의 불길로,

교만과 무지와 나태와 성급함으로
영혼의 눈이 멀어버린 가련한 저는 어둠의 늪으로 빠져들기가 일쑤였습니다.

일생을 두고 당신이 심어주신 그 신령한 사랑의 불길에 불치의 화상을 입은 제 어린 영혼은
오히려
당신을 피하여,

바로 당신 곁에서도
애써 당신을 외면하며 살아왔습니다.

제 일생은 의심의 손이
제 믿음을 흔들고,

시도때도 없이 절망의 손이 제 숨을 옥죄며,

탐욕과 분열과 미움의 손이 당신을 망각하게 만드는 모든 순간에,

솔직히 저는 제 안에
언제나 당신이 살아
계심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제 일생은
천박한 호기와 어리석은 열정과

무지한 분노로 범벅이 된 초라한 패잔병처럼,

남루한 제 영혼은 온몸에 상흔이 가득한 가련한 피멍덩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당신 문 앞에 홀로 서 서
한없이 설레는 마음으로
마지막 이자
처음으로 각인 된
제 심장 깊숙히 숨은
경외의  당신 성채의 마지막
초인종을 누르려 하고 있습니다.

주님, 이제 당신의 문 앞에서
제가 당신께 무례함을 불사하고 삼가 이 질문을 드립니다.

자비로우신 주님, 비천한 제가 제 내면을 끝없는 악마의 운동장으로 내어주는 모든 순간에도,

당신은 제 영혼의 가장 어두운 마지막 양심의 심연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씨로 어찌하여
제 곁에 끝까지
남아 계셨습니까?

출렁이는 물 같이
흔들리는 바람같은
제 믿음으로
얼토당토 않은 저의 이 부끄러운  독백은

사실상 당신 앞에 비천한 저의 마지막 눈물겨운
사랑의 고백입니다.

주님,

당신 앞에 제가 그러하였듯이 세상은 이 불을 두려워합니다.

진리가 비치면 거짓이 드러나기에, 사랑이 타오르면 증오가 물러나기에,

이 불을 꺼뜨리려 합니다. 조용히 다가와 제 기도를 흐리게 하고,

제 고요를 깨뜨리며, 하느님보다 세상의 유혹을 더 크게 들리게 만듭니다.

"너무 뜨거우면 지쳐. 좀 식어도 괜찮아."

지극한 성급함에 지극한 나태로, 지독한 나태에 지독한 성급함으로

그 속삭임들이 제 일생동안

영혼의 불 위에 재를 얹고, 제 심장을 점점 무디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
이제 때가 찾습니다
주님
제가 이 마지막 남은 불을
잃어버리지 않게
끝까지  타오르며
소진하게 하읍소서.

주님
이 불은 당신께서 저에게 주신 생명이며,
저를 다시 살아가게 하신 거룩한 숨결입니다.

그러니 오늘, 애타는 마음으로 간구드립니다.

주님, 이 불을 제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꺼지지 않도록 끝까지 지켜가게 하소서.

기도로, 침묵으로, 용서와 진실한 사랑으로, 끝까지 이 불을 제 안에서 품어 살게 하소서.

그 어떠한 역경이 닥쳐와도, 세상이 그 어떤 비웃음과 조롱을 일삼아도,

달콤한 악이 속삭여도,

제가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그 마지막까지 제 안에 타오르는 불을 안고 살게 하소서.

낡은 초가집같이 초라하고 비천한 제 영혼이 그 불을 온몸과 마음으로 안고 가게 하소서.

아니, 안고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지펴주신 그 불길 속에서 남김없이 타오르다가, 당신과 함께 한 줌의 재가 되어 흔적도 없이 이 세상을 떠나, 영원한 생명의 불길이신 당신 사랑 속에,

첫날 당신이 제게 오셨던 그 모습 그대로 당신 품에 들게 하옵소서.

그리고 이 세상에서 제가 사랑했던 모든 이에게도,

이 불은 바로 주님 당신이시니, "내 불을 끄지 마라" 하신 그 음성을 그들 영혼 깊이 날마다 조용히 새길 수 있도록, 그들 영혼의 변방에 언제나 사랑의 불길이 타오르게 하소서.

끝까지, 충실히,
사랑으로.
그 사랑의 불길이
그들에게도
영원히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ㅡㅡㅡㅡㅡㅡㅡ
유월의 아침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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