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화가의 화폭과 같은 삶/조광호신부

주혜1 2026. 1. 2. 16:44

화가의 회폭과 같은 삶
― 피그먼트와 바인더의 섭리

어수선한 작업실 선반 위에 물감 튜브들을 바라본다.

코발트 블루, 카드뮴 옐로, 버밀리온 레드. 물감은 저마다 고유한 이름과 빛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종류의 물감이든 홀로 물감이 될 수는 없다.
아무리 찬란한 색이라도 피그먼트만으로는 화면 위에 머물 수 없다.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흩어지고, 바람이 불면 날아가고, 빗물이 스치면 사라진다.

색은 그 자체로는 너무 약하다. 서로를 붙들 힘이 없다.
색이 머물기 위해서는 바인더가 필요하다. 색을 붙들어 주고, 흩어지지 않게 묶어주는 바인더(용매제·풀)가 필요하다.

시간 속에 머물게 하는 힘. 피그먼트가 정체라면, 바인더는 관계이다.

그 색이 '그림'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를 내어주는 어떤 결합이 필요하다.

아마유가 섞이면 유화가 되어 깊은 윤기를 머금고, 아크릴 미디움은 선명함을 부여하는 아크릴 물감을 만들며, 달걀노른자가 들어가면 수백 년을 견디는 에그 템페라가 되어 시간을 이긴다.

같은 색의 피그먼트가 어떤 결합을 만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성질의 물감이 된다.

팔레트 위에 물감의 중요한 색소에는 반드시 중요한 바인더가 필요하다. 값싼 색에 값싼 접착제를 쓰면 그럭저럭 그림이 되지만 울트라마린 블루 같은 귀한 색에 허술한 바인더를 쓰면, 그 색은 오히려 더 빨리 무너진다.

색이 귀할수록 바인더는 더 투명하고, 더 순수하며, 더 강해야 한다."

이 단순한 원리를 인간 존재에 비추어 보면 참으로 놀라운 사유의 파장이 생긴다.

인간 또한 하나의 색이다. 누군가는 코발트 블루처럼 깊고 차분하며, 누군가는 카드뮴 레드처럼 뜨겁고 강렬하고, 누군가는 티타늄 화이트처럼 고요하고 순수하다.

우리는 저마다 빛과 온도, 상처와 가능성을 지닌 채 살아간다.

각자의 기질, 상처, 기억, 재능, 욕망이 서로 다른 빛으로 존재한다.

인간은 홀로 머물 수 없다. 사람은 관계라는 바인더가 없으면 존재는 쉽게 흩어지고 소멸한다.

사랑 없는 재능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허공에 흩어지고, 신뢰 없는 진실은 광야의 외침으로 끝나며, 연결 없는 정의는 모래 위의 문자로 남는다.

인간은 결코 혼자 빛나도록, 홀로 완성되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서로를 붙들고, 견디고, 책임지는 관계 안에서, 서로를 묶어 주는 사랑, 서로를 견디게 하는 신뢰, 서로를 머물게 하는 책임 속에서 비로소 삶은 하나의 형상이 된다.

어머니가 아이의 손을 잡을 때, 그 친구가 친구의 눈물을 닦아줄 때, 낯선 이가 쓰러진 사람을 일으킬 때, 그것도 인성의 바인더이다.

보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붙들고, 드러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지탱하며, 이름 없지만 모든 것에 의미를 주는 힘이다.

평범한 일상에는 습관과 인연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출근길에 나누는 인사,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미소, 편의점 계산대 앞에서의 짧은 감사. 그것들도 물론 소중하다. 그러나 깊은 사랑 앞에서, 큰 책임 앞에서, 역사적 소명 앞에서, 가벼운 관계, 이기적 연대, 편의적 결속은 견디지 못한다.

지도자에게는 정의라는 바인더가 필요하고, 공동체에게는 신뢰라는 바인더가 필요하며, 예술가에게는 진실이라는 바인더가 필요하다.

부모에게는 헌신이라는 바인더가, 교사에게는 인내라는 바인더가, 의사에게는 긍휼이라는 바인더가 필요하다.

평화라는 색소에는 용서라는 바인더가, 민주주의라는 색소에는 책임이라는 바인더가, 자유라는 색소에는 연대라는 바인더가 필요하다.

그러나 관계는 언제나 선하지 않다.

바인더가 모든 색채를 살리는 매체이지만 이기적 욕망의 오욕이 스며들면 인간은 이 관계를 끝없이
왜곡시킬 수 있다.

바인더는 생명을 위해 주어졌지만, 탐욕의 손에 쥐어지면 독이 된다.

관계가 사랑을 잃을 때, 그것은 곧 은폐가 되고 결탁이 되며 폭력이 된다.

사랑이어야 할 관계가 이익으로 변질되고, 신뢰여야 할 연대가 공모로 타락하며, 책임이어야 할 결속이 카르텔로 굳어진다.

정의가 충성으로 왜곡되고, 연대가 카르텔로 굳어질 때, 관계는 생명을 살리지 못한다.

같은 색끼리만 뭉쳐 다른 색을 밀어내고, 투명해야 할 바인더가 불투명한 거래가 되어 그림 전체를 탁하게 만든다.

권력이라는 귀한 색소에 사익이라는 썩은 바인더를 쓴 사회가 얼마나 빨리 균열되는지,
정의라는 고귀한 색소에 충성이라는 불순한 바인더를 쓴 법이 얼마나 쉽게 도구가 되는지. 부정부패의 온상은 관계 그 자체가 아니라 관계의 오용이다. 서로를 살리기 위한 결합이 서로를 덮기 위한 은폐로 바뀔 때, 공동체는 조직이 되고, 연대는 담합이 되며, 충성은 복종이 된다.

그래서 문명의 방향은 무엇을 그리느냐가 아니라 무엇으로 묶느냐에 달려 있다.
오늘 우리 한국사회는 좋은 색소
피그맨트가 있지만 바인더가 문제다 썩은 바인드, 이물질이가득한 바인드로 그림은 엉망이 될수있다

권력이 바인더가 될 때 사회는 굳어지고, 사랑이 바인더가 될 때 사회는 살아 움직인다. 배제와 특권으로 묶인 관계는 아무리 견고해도 부패하며, 개방과 정의로 엮인 관계는 느슨해 보여도 오래 간다.

하느님은 색을 주신 분일 뿐 아니라 그 색이 서로를 해치지 않고 조화를 이루도록 결합의 질서를 함께 주셨다. 하느님은 세상을 완성된 구조로, 완성된 그림으로 창조하지 않으셨다.

인간의 역사 속에 하느님은 그 역사를 선의 역사로 이끌고 게시지만
인간에게 그역사를 맡겨주셨다

하느님은 인간을
서로를 필요로 하며 완성되어 가는 존재로 부르셨다.

섭리는 지배가 아니라 동행이며, 강제가 아니라 인내이다. 섭리란 통제가 아니라 동행이며, 운명이 아니라 신뢰이다.

섭리란 미리 정해진 각본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느린 창조이다.

성육신은 그 극치이다.
성육신은 하느님이 인간의 바인더가 되신 사건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바인더가 되어 흩어진 삶을 당신의 사랑으로 묶으셨다. 흩어지는 인간의 삶을 당신의 사랑으로 묶어 역사라는 캔버스 위에 다시 붙들어 두신 사건이다.

하느님은 세상을 강제로지배하지 않으신다. 함께 견디신다. 무너지는 자리에서 떠나지 않으시고, 인간이 인간답게 남아 있을 수 있도록 끝까지 곁에 머무르신다.

그리고 하느님은 가장 중요한 바인더를 주셨다. 인간이라는 가장 귀한 색소에 사랑이라는 가장 순수한 바인더를, 십자가라는 가장 강한 결합을 주셨다.

십자가는 그 결합이 얼마나 깊은지를, 얼마나 깊고 아픈지를 보여 주며, 못이 박힌 자리, 창에 찔린 옆구리, 가시관이 눌린 이마는 사랑이 얼마나 철저히 자기를 내어주는지를 증언한다.

부활은 그 결합이 결코 끊어지지 않음을 선포한다. 죽음도, 무덤도, 절망도 그 사랑을 끊을 수 없어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다.

역사는 늘 흔들린다. 때로는 정의가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고, 악이 승리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라 과정이다.
역사는 흔들리면서도 결코무너지지 않는다.

저 설원의 겨울 강을 보라.

표면은 단단히 얼어붙어 있다. 사람들은 그 위를 걸으며 말한다. "강이 멈췄다"고. 하지만 귀를 대고 들으면 알 수 있다.

얼음 밑 깊은 곳에서 물은 여전히 흐르고 있다. 강물은 얼어붙어도 멈추지 않고, 깊은 곳에서 여전히 흐른다.

우리
인간의 삶 또한 그렇다. 상처와 실패 속에서도, 우리는 저마다 상처 입고 흔들리며, 때로는 길을 잃고 방향을 잊는다. 우리는 때때로 관계를 오용하고, 사랑을 계산으로 바꾸며, 서로를 소모한다. 관계를 잘못 사용하여 다른 이를 해치기도 하고, 스스로 그 관계에 갇히기도 한다.
그러나 관계가 남아 있는 한, 관계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사랑이 완전히 식지 않는 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삶은 다시 형태를 얻는다. 우리의 상처와 기쁨, 실패와 희망은 각각의 색일 뿐이지만, 그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을 때 비로소 한 생의 그림이 완성된다.
그 손길은 억지로 붙이지 않는다. 부드럽게 스며들어 시간 속에서 천천히 굳어진다. 마치 아침 이슬이 풀잎에 스며들듯, 마치 빛이 수면에 스며들듯, 마치 어머니의 손이 아이의 이마에 스며들듯.


겨울 벌판 눈 사이로 피어난 노란 복수초처럼.

사람들은 신기해하며 묻는다. "어떻게 겨울에 꽃이 필 수 있지?" 하지만 그 꽃은 계절을 거스른 것이 아니다. 이미 그 안에 봄을 품고 있었던 것처럼, 이미 봄이 그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도 이미 회복의 가능성이 숨 쉬고 있다.

그 꽃은 세상에 조용히 묻는다. "당신은 무엇으로 서로를 묶고 있는가.

우리는 믿는다. 하느님은 결코 우리의 희망을 어긋나게 하지 않으신다는것을.
하느님은 결코 우리의 삶을 흩어진 색으로 남겨 두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색을 지우지 않으시고, 사랑이라는 바인더로 서로를 묶어 삶을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하신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 종말의신학이다

반드시 하느님은 우리서로를 묶어 의미가 되게 하신다. 서로를 붙들어 주는 바인더가 되어 삶을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하실것이다.

생명에 깃든 사랑이
사랑에 깃든 생명이 되어 마침내 한 폭의 그림이 된다는 것을.

그 그림의 이름은 정의이며, 그 완성은 은총이며, 그 근원은 하느님이심을 믿는다.

그리고 그분은 가장 중요한 색소인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바인더인 사랑을 주셨다. 그리하여 세상은 오늘도, 그 그림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사랑이라는 이름의 빛으로 세상을 다시 빛으로 물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