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그때,하느님은 어디 ?/조광호신부

주혜1 2026. 1. 4. 20:13

그때, 하느님은 어디 계셨는가
— 공현대축일에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로 대표되는 이른바 ‘연민의 신학’에는 오래된 영적 설화가 전해진다.

한 수도자가 평생 죄 없이 살았으나, 천국의 문 앞에서 멈추어 선다.
천사가 묻는다.
“당신은 누구와 함께 울어보았는가?”
수도자는 끝내 대답하지 못한다.

그때 세상의 고통을 함께 울어주던 이름 없는 여인이 문을 연다.

러시아의 전설은 말한다.

하느님은 완전한 자 곁이 아니라, 함께 우는 자 곁에 계신다고.

1970년대 초, 나는 수도회에 들어가 수련기를 보내고 있었다.
밤중에 잠에서 깨어 차가운 독방 바닥에 앉아 있던 시간이 잦았다.
과연 나의 선택은 옳은 것인가.
하느님은 정말로 계신가.
“참혹한 인간의 고통 속에서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느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믿음으로 자신을 단련해야 할 시기였지만, 마음은 끝없는 회의에 흔들렸다.
나의 수련기는 온통 질문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 무렵, 도서관 책 정리 소임을 하다 우연히 세 권의 책을 만났다.

엔도 슈사꾸의 침묵,
재미교포 김은국의 순교자,
그리고 아주 짧은 러시아 설화,
네째 왕의 전설이었다.

첫 번째 책, 『침묵』.

일본 박해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바닷가의 기둥에 묶여 있었다.
차갑고 규칙적인 파도가 다가와 발목을 적시고, 허리를 넘고, 마침내 가슴까지 차올랐다.
숨은 거칠어졌고, 기도는 더 이상 소리로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하느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예수는 말한다.
“밟아도 좋다. 나는 밟히기 위해 이 땅에 왔다.”
하느님은 박해를 멈추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 고통의 가장 밑바닥에서, 인간과 함께 눌려 계셨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하느님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분이 아니라, 함께 짓눌리는 분이라는 것을.
책을 덮고, 그분의 얼굴 앞에서 나는 흔들리던 믿음을 끌어안고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두 번째 책, 『순교자』.
한국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사람들은 갈라졌다.
누군가는 신앙의 영웅이 되었고, 누군가는 배신자가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두려웠고, 모두 살고 싶어 했다.
이 소설은 그 비겁함과 연약함을 숨기지 않는다.
하느님의 침묵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하느님은 영웅들 사이에 계시지 않았다.
오히려 총 앞에서 떨고 있는 인간의 심장 안에 계셨다.
말해야 할 순간 말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그 자리에서,
하느님은 떠나지 않으셨다.

세 번째 이야기, ‘네째 왕의 전설’.
예수 탄생의 해, 세 임금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들고 베들레헴을 향해 떠났다.

그와 함께 또 한 왕이 출발했으나, 그는 끝내 도착하지 못했다.

여정 중에 그는 병든 자 곁에 머물렀고, 굶주린 자를 도왔으며, 쇠사슬에 묶인 아이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는 너무늦었다.

그는 아기 예수겅배가 아니라
골고타 십자가 밑에서 예수를 만난다
그러나 그 늦음 속에서, 하느님은 이미 거기에 계셨다.
그 시절, 하느님께서 내게 일러주신 이 작은 깨달음은
눈먼 내 생애의 어두운 길목마다 빛이 되었다.

임마누엘의 하느님은
‘옳은 자’가 아니라
‘함께 아파한 자’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신다.

성실하게 믿음으로 살았으나 세상에서는 실패한 듯 보이는 사람들,

조용히 무너진 사람들,
누구도 그들을 영웅이라 부르지 않았지만
그들 가운데 하느님이 계셨다.

그분은 승리의 깃발 아래 계시지 않았고,
설명되는 믿음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우리의 마음은 둔하고, 우리의 눈은 너무도 길들여져
예상과 다른 방식으로 오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

하느님은 언제나
침묵으로 거기 계셨다.

이 세상에서 침묵보다 더 큰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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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나는 이 **‘네째 왕의 전설’**을 희곡으로 옮겨
분도출판사에서 출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