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딧불이와의 만남
오후에 지시인에게 전화가 왔다. 아침에 통화를 한 후 내내, 내 젖은 목소리가 귀에 걸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면서 퇴근 후에 만나자고 한다. 숨쉬기조차 귀찮은 내가 어디를 간다는 게 내키지 않아 망설망설하자 그가 내 코앞으로 와 납치하듯이 서종면에 위치하고 있는 그의 별장으로 데리고 갔다.
산을 등지고, 작은 시냇물이 흐르는 조용한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고즈넉한 별장, 더구나 뒤뜰에는 맑은 우물이며 야생화가 피어있고, 온갖 새소리가 지천으로 들려오는 곳, 시인의 별장으로는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을 정도로 아기자기했다. 이것저것 맛있는 반찬을 준비해 놓기까지 한 그녀와 실로 오랜만에 아무 일도 겪지 않은 옛날의 나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깔깔거리며, 얼굴을 맞대고 앉거나 누워서 사랑하는 이와 시 이야기를 슬카장 나누다보니 어느새 별장은 어둠에 싸였다. 나는 긴장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를 잃고 난 후 부쩍 어둠이 싫어진 나. 어둠 속에 가둬놓은 그가 생각나기도 했지만, 밤이 되면 여지없이 빈방에 홀로 남게 되기에 어둠이 몸서리치게 싫었다. 그러나 사위가 깜깜해지고 있는데도 지시인은 왠지 불 켤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참다못해 내가 전등불을 켜려고 일어나자 지시인이 데크로 나가자고 했다. 달빛이 어슴푸레 비치는 데크에 나가 분위기를 즐기려나보다 생각은 했으나, 어둠 속으로 들어가자고 하는 것 같아 흠칫 놀랐다. 내색을 하지 못하는 내 속내를 아는 듯 지시인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제 반딧불이가 나타날 거야.“
아! 그렇구나. 그제야 그녀의 의도를 짐작하고는 반가움이 솟아 어둠속으로 눈을 박았다. 아, 드디어 반딧불이를 보게 되는구나! 서울 도심에서만 자라온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반딧불이의 생생한 불빛을 보지 못했기에 지시인의 그 사려 깊은 마음이 그지없이 고마웠다. 나는 그녀가 갑자기 더 좋아져버렸다. 어느새 어둠의 공포감마저 잊고는, 반딧불이를 찾아 어둠 속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눈앞을 알짱이는 물체를 발견하는 순간, 갑자기 가슴을 치밀고 올라오는 슬픔의 물결을 감출 수가 없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어둠 속에서 너무도 힘없이 반짝이는 빛, 불빛이라고 보기조차 안쓰러운 빛. 마지막 숨을 쉬고 있는 이의 숨소리 같이 흔들거리는 빛, 간신히 눈을 씻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자칫 놓치고 마는 환영처럼 희미한 빛, 빛들..... 훨훨 날아다니는 것도 같고, 정지하고 있는 것도 같고, 꺼질 듯이 흘러 다니는 것도 같은 그 조그만 방울방울들.... 내 눈엔 그들이 생을 다하지 못하고 떠난 영혼들인 것만 같았다. 육신을 잃어버린 영혼들...저 빛의 방울들 그 무리 속에 그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없이 한순간도 살 수 없을 것 같아 그의 집을 짓는 인부들의 손에서 삽자루를 뺏어 던지며 나도 따라간다고 울부짖더니만 달을 넘기고 해를 넘기면서 아직도 따라가지 않고 있는 내가 얼마나 미울까.
기다림에 지친 그가 어둠을 틈타 나온 것만 같았다. 그러자 이상하게 어둠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어둠 속에 파묻혀 있을 그가 불쌍해서 밤마다 뒤채였는데 신기하게도 어둠 속이 이렇게도 평화롭다니. 아니, 오히려 포근히 안아주는 것처럼 아늑하기까지 하다.
“어둠이 나쁘지만은 않네. 우리 남자 답답할 줄 알았는데......”
가슴을 닫고 어쩔 수 없이 아침을 맞아야만 하는 기막힌 날이 벌써 햇수로 세 해. 늑골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일어나 얼굴을 만지면 손바닥 가득 눈물이 묻어나는 날들. 세월이 가면 잊혀진다는 그 거짓말을 믿고 싶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잊혀지는 게 아니라 가슴 한구석으로 밀려가며 두꺼운 두께로 더욱 짙게 자리를 잡고 있다. 건드리기만 해도 그곳에선 뜨겁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콸콸콸 흘러 걷잡을 수 없이 온몸을 적시고 있다.
인생을 다른 무엇과 조금씩 바꾸어 나갈 때 인생의 참 의미를 갖는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나는 이 커다란 상실을 무엇과 바꾸었을까. 어둠에 가려진 세상, 그와 바꾼 하루하루가 이제는 내 것이 아니니 내 인생은 이미 의미가 없어진 것이 아닌가. 요즘은 무뇌아가 된 기분이다. 가도가도 끝을 기대할 수 없는 시간들이 아무런 희망도 없이 다가오고, 절망의 밤이 오면 그리움으로 가슴이 무너지는데, 그는 가고, 나 혼자 남아 있는 이 공간의 의미를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그만 기억 속의 그를 지우라고 위로한다. 그러나 그런 위로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기억에 입력된, 내가 혼자됐다는 파일을 지우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싶다. 내 가슴에는 이미 지울 수 없는 파일로 그를 간직하고 있으니 나를 바라보는 이들이여, 내가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는 내 가슴에 살면서 그의 느낌, 그와 지낸 시간들의 힘으로 남은 시간을 충분히 살아가겠노라고 당당히 외치고 싶다. 그러나 이러한 자존심은 열등감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
어둠 속에 있는 그가 이제 내 걱정일랑 그만 하고 편안한 휴식을 취하길 빈다. 그에게 못 다한 사랑의 말을 고이고이 간직하고 그를 만난 날 해일처럼 달려들어 쏟아 부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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