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가 언제 올 지……
귀뚜라미가 우는 계절이다. 호젓한 마음마저 달래주는 귀뚜라미 소리를 미국의 소로우라는 시인은 “신의 영광을 찬양하며 그것을 즐기는 소리“ 라고 하였고, 중국의 시인 양연수는 ”슬픈 듯이 원망하듯이, 분한 듯이, 탄식하듯이 울어 예는 소리“ 라고 했다. 한편, 우리나라 시인 박효관은 “임 그린 상사몽이 실솔(=귀뚜라미)의 넋이 되어 추야장 깊은 밤에…날 잊고 깊이 잠든 임의 잠을 깨워볼까 하노라” 라고 떠나간 임에 대해 원망과 비통한 마음을 참고 기다리는 사랑으로 노래했다. 우리 선조들은 이렇듯 이별의 심정을 원망보다는 기다림으로, 한숨보다는 가슴을 도닥이며 다스렸다.
11월은 우리 교회에서 위령성월로 정하여 연도를 바치고 있다. 불쌍한 영혼, 잊혀진 영혼, 연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달이다. 또한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도 된다. 낙엽이 쌓인 길을 걸으며 발밑에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면 앞서간 사람의 음성이 들리는 것만 같다. 잘 살아라, 잘 살아라 타이르는 것만 같다.
공동묘지에 가면 “껄,껄,껄” 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좀 더 열심히 살 껄’, ‘좀 참을 껄’, ‘공부 열심히 할 껄’, ‘부모님께 효도할 껄’, 껄,껄,껄…….
죽음은 생의 끝에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생의 한가운데 매순간 이루어지는 걸 모르는 듯 우리는 살고 있다.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길, 불로초를 구하면서까지 벗어나려 한 길.
그러나, 신앙인의 자세는 달라야 한다. 인간의 운명인 죽음을 몸소 겪으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공포를 축복의 계기로 변화시키시어 마침내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이르신 것처럼.
한 성인이 7살 된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여인을 지옥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여인은 고통 속에 있는 자신의 아들을 발견하고 울부짖는다. 그때 성인이 말한다. “슬퍼하지 말아라. 저 모습은 수명을 다하다가 죽었을 때의 네 아들 모습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여인을 천당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여인의 7살 난 아들이 하느님 곁에서 행복한 모습으로 놀고 있는 게 아닌가. 여인이 슬픔을 거두자 성인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가장 아름다울 때’, ‘가장 여물었을 때’ 당신 곁으로 데려간다.” 고.
이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이 받아들이는 죽음은 희망이요, 시작임을 말해 주고 있다. 육체적인 몸은 죽어서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는 것이니, 죽음이라는 관문을 지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로서 모든 욕망의 충족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1월이다. 이 위령성월에 죽은 모든 이들이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기도하자. 조상의 묘지, 성인들의 묘지 그리고 이름 모를 그 누구의 묘지를 찾아 연도를 바치고 외로운 영혼을 위로해 주자. 그리하여 죽은 이들이 영생을 얻도록 빌어 주자.
“ 그때가 언제 올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어라. (마르1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