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력 수준이 낮았던 옛날,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하늘'을 정확히 인식할 수 없었으며, 하늘과 사람의 관계를 제대로 알기 어려웠다. 과학이 생기기 전에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천명과 귀신 사상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하늘'에 대해서 경외의 심정을 품고 있었으며, 천명과 귀신의 존재에 대하여 조금의 회의도 감히 품지 못했다. 그러나 일부 박식한 인사들은 하늘과 귀신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하늘'에 대해 회의와 의문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대시인 굴원(屈原)은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사람이었다.
굴원(기원전 약 340∼278년)은 귀족 세가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근면하고 공부를 열심히 했으며, 청년 시절에 이미 발군의 재능을 드러냈다. 그는 지식이 풍부하고 학문이 심오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 역사 현상을 투철하게 분석하는 데 능하였다. 게다가 언변과 문장이 탁월하여 순식간에 초나라 통치자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그가 스물두 살 되던 해 초회왕(楚懷王)에 의해 좌도(左徒)로 임명되었으며 오래지 않아 다시 삼려대부(三閭大夫)가 되었다. 이러한 직책은 모두 궁정에서 찬란한 지위를 보장받는 요직이다.
정직하고 고상한 인품을 지닌 굴원은 초나라 백성을 매우 사랑한 반면 정권을 독점한 채 자신의 이익만을 돌보고 국가와 민족의 이익에 해가 되는 짓을 서슴지 않은 인물들을 증오했다. 이 때문에 그는 상류 사회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다. 나중에 그는 또 정사(政事)에 직간을 함으로써 차례로 초회왕과 경양왕(頃襄王)의 노여움을 사서 궁정에서 쫓겨나 강남 일대를 유랑하였다. 험난한 유랑 생활을 하면서 그는 울분을 머금고 수많은 빛나는 시편을 써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소(離騷)] [구가(九歌)] [구장(九章)] [천문] 등이 대표적인 시편이다. 기원전 278년 여름 어느 날, 굴원은 초나라의 최후가 도래한 것을 보고 가슴 가득 슬픔과 원망을 품은 채 멱라강(汨羅江)으로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굴원은 걸출한 시인이자 정치가일 뿐만 아니라 풍부한 탐구 정신의 사상가이기도 하다. 그는 일찍이 '길은 아득히 멀기만 하네, 내 위에서 아래까지 탐구해보겠노라(路漫漫其修遠兮,吾將上下而求索)'라는 영원한 명구를 써서, 진리를 추구하는 굳센 의지와 품격을 잘 표현한 바 있다. 그는 평생을 불우하게 보냈지만, 곤경 속에서도 자연와 인류 사회의 각종 문제에 대한 사고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 후대까지 훌륭한 명성을 지켜온 시편들 가운데 그의 탐구 정신을 가장 잘 체현한 것은 세상 사람들에 의해 기이한 작품이라고 불린 {천문}이다.
{천문}은 아름다운 시의(詩意)와 심오한 철리를 아우른 장편시로서, 그것은 고대 문학사의 걸작일 뿐더러 철학의 뜰에 핀 한 송이 진귀한 꽃이기도 하다.
이 기묘한 장편시는 4자구를 사용하고 있으며, '왈(曰)'자를 필두로 하여 유창하게 이어지는데, 화려하고 분방하며 단숨에 172개의 문제를 다뤘다. 그것은 아득한 옛날의 상황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천문 지리 자연 사회 신화 전설 역사 사건 인생 도덕 들을 포괄하며, 많은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당연하게 여기는 사물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여 대담한 과학 정신을 표현했다.
굴원은 묻는다. 아득한 옛날에는 하늘과 땅이 하나로 뒤엉켜 있었는데, 누가 지세를 분명하게 할 수 있었는가? 그것이 어차피 분명하지 않다면, 반고(盤古)가 천지를 개벽하고 여와(女 )가 돌로 하늘을 메운 정형은 또 누가 묘사해 냈는가? 굴원은 다시 묻는다. 신화 속에서 구중천(九重天)은 누가 만들어 냈는가? 또 누가 하늘의 변화 무쌍한 운동 상태를 조성했는가? 만약 당시 유행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설에 따르면 해와 달과 별은 누가 거기에 놓아뒀는가? 또 누가 땅 위에 구주(九洲)를 어수선하게 흩어 놓았는가? 산천 하류는 또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굴원은 다시 묻는다. 만약 여와가 인간을 만들었다고 한다면, 여와 자신은 또 누가 만들었는가? 이런 날카로운 질문은 중국 신화 속의 인류 기원설에 대한 최대의 도전이다.
당시 일부 사상가들은 노예를 거느린 귀족의 통치를 옹호하기 위해 '삶과 죽음은 운명이며,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고취하여 백성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기만했다. 굴원은 {천문}에서 이에 대하여 극대의 멸시를 표시했다. 그는 묻는다. "천명이 뒤바뀐다면 누구를 벌하고 누구를 돕겠는가?" 다시 말해 왕공 귀족의 부귀 영화를 하늘이 도운 결과라고 말한다면, 이 사람들의 쇠락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만 하겠는가?
{천문}의 특징으로는 풍부한 상상력과 진리에 대한 집요한 추구를 들 수 있다. 굴원은 이렇게 격정으로 충만해 있으면서도 사물에 대해 이성적인 사고를 진행시킨 시인이자 철학가이었다. 이러한 정신 상태에 있었기에 비로소 {천문}과 같은 특이하고 아름다우며 철리로 가득 찬 시편을 창작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유랑 생활을 하던 어느 날, 한 어부는 굴원이 무슨 이유로 파직됐는지를 물었다. 굴원이 대답했다. "세상이 모두 혼탁한데 나 홀로 맑았으며, 사람들이 모두 취해 있는데 오직 나 홀로 깨어 있었소. 그래서 나는 궁정에서 내쫓겼소."
어부가 한숨을 내쉬고는 그를 위로했다. "늙은이가 보기에 당신은 비록 성인이지만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남들이 술을 마시면 당신도 마셔서 취하는 것이 오히려 낫습니다. 어째서 높은 재능과 훌륭한 덕성을 품은 채 몸을 고생시킵니까? 참을 수 있으면 참고 물결치는 대로 표류하십시오."
"아니오!" 굴원이 격해져서 말했다. "내 차라리 강물에 빠져 고기 뱃속에서 장사를 치를지언정, 일생의 청백함을 더럽히고 싶지 않소. 그리고 살아가기 위해서 권세에 아부하는 소인배들과 야합하기는 더욱 싫소."
며칠 뒤 가슴 가득 울분에 찬 굴원은 스스로 멱라강으로 뛰어 들어 자신의 평범치 않은 일생을 마감했다. 그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초나라에 전해졌을 때, 백성들은 비통해 하고 놀라지 않은 자가 없었다.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멱라강 강가에 몰려와 배를 저어 굴원의 시체를 찾아서 건져냈다. 아녀자들은 댓잎과 갈잎에 싸서 쪄 익힌 찹쌀떡을 강물에 던져 물고기들을 배불리 먹임으로써, 물고기가 굴원의 시체를 훼손하는 것을 막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이 두 가지 행동이 중국인의 전통 풍속으로 자리잡았으며, 해마다 오월 초닷새가 되면, 사람들은 용선(龍船)을 타고 종자( 子: 찹쌀떡)을 먹으며 굴원을 추모한다.
'스토리1'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 두드리는 예수님 (0) | 2010.07.04 |
---|---|
[스크랩] 모든 벽(壁)은 또 하나의 문(門)이다 /이수철 신부 (0) | 2010.07.04 |
[스크랩] 생혼과 혼 그리고 영 (0) | 2010.06.12 |
상담심리학 / 관계 (0) | 2010.06.07 |
영혼의 기원(펌) (0) | 2010.06.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