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례, 「고향우물」
피를 모으느라 여자들은 몸이 들쑤신다
흙은 온몸으로 지하수를 돌게 하고
길을 내며 모여든 피의 열기로
늘 자궁은 뜨겁다
한 달에 한번 물을 바꿔 넣으려고
여자들은 우물가로 모이고
집중되는 시선이 두려운
고향마을 천수답 한가운데
하늘 향해 뻥 뚫린
내 어릴 적 우물
여자들은 달구어진 몸이 뜨거워
물을 퍼내고 있다
누구나 하나쯤은 감추어둔 죄
속절없이 솟구치던 뜨거움
한여름에도 뼈 속까지 차가운 물
바가지로 푹푹 퍼서 끼얹던 고향우물
그 우물가로
전생에 죄진 생들이
스믈스믈 모여들고
실뱀으로 구렁이로 꽃뱀으로
매달리거나 물구나무 서 있다
생전에 열기 식힌 우물가
물기 있는 몸이라 어쩔 수도 없던
황홀한 죄 따라 돌아오고
문둥병 걸려 소록도 떠난 남편 자리
시동생으로 대신하다 태어난 아이
우물에 던져 넣은 여자
청상과부로
젊어서 혼자된 시아버지
물기 적신 여자, 여자들
내 기억의 우물가에는
꿈에서조차 소문이 범람하고 있다
◆ 시_ 한성례 - 1986년『시와 의식』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 시작. 한국어 시집으로 『실험실의 미인』, 일본어 시집 『감색치마폭의 하늘은』『빛의 드라마』 등을 펴냄. 번역서로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토파즈』『사랑에 관한 짧은 기억』『또 하나의 로마인 이야기』 등이 있음. 허난설헌 문학상, ‘시토소조(시와 창조)상 등을 수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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