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 몇 시간의 교리 공부를 통해서 성서가 어떻게 쓰여졌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게 되었는 지를 그 역사적 발전에 따라서 살펴 보았습니다. 오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구원하셨는가 하는 점을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나 한번쯤 전철을 타고 있을 때나 길을 갈 때, 혹은 다른 어떤 기회에 손에 성서를 들고 큰 소리로 '주 예수를 믿으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하고 외치며 다니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특히나 요즈음엔 사회가 불안하기 때문인지 이런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날 때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갖게 되는지 모르지만 저의 경우 구원을 받는다는 말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한번 곰곰히 생각하게 됩니다.
이미 오랜 옛날부터 약속되어 왔던 구원, 하느님께서 원조 아담에게 약속하셨었고, 그 후에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끊임없이 약속되었으며,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구원은 실현되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많은 사람에 의해서 오늘날도 구원의 약속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면서 구원이란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들이 갈망하는 진정 중대한 문제임을 재인식하게 되고 또한 이 구원이 지금 이 순간까지도 완전히 실현되지 못했다는 점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 계신 예비자 여러분들께서도 어쩌면 구원의 보장이 가톨릭 교회에 있다고 생각하시고 그것을 얻어 누리기 위해서 이 교리반에 나오게 되고 세례를 받을 결심을 하게 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께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이미 태고적부터 약속되어 왔고, 예수에 의해서 성취되었다고 가르침받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 구원의 실현을 살고 있지 못하다니 성서가 말하는 구원이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누가 한번 대답해 보세요(사이).
성서를 매우 열심히 읽으시는 것 같던데 어디 성서가 말하는 구원에 대해서 알고 있는 바를 말씀해 보세요
성서는 구원의 본질이 어떤 것이라든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란 어떤 것이라는 따위를 밝히는 데에는 관심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을 획득할 수 있는 어떤 신비적, 또는 윤리적인 방법을 소개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성서는 다만 구원의 사실을 선포할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체적인 역사의 사건을 통해 그의 백성을 멸망으로부터 실재로 구원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획득되어진 구원은 장차 도래할 구원의 예시, 유형이 된다고 선포하고 있을 뿐입니다. 즉, 성서가 말하는 구원은 이미 하느님께서 과거에 베풀어 주신 역사적인 현실로서의 구원인 동시에 미래에 일어날 종말론적인 현실인 구원이기도 합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공부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 언제였다고 하였었지요?( ) 출애급 사건이라고 했지요. 출애굽기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에집트 땅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고 종살이에서 구해내셔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해 주시고, 이스라엘을 하느님 백성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 에집트의 속박에서 풀려난 사실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인 경험으로, 이 경험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시다'라는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 제 2의 출애급이라고 불리는 사건이 무엇이라고 했었지요?(응답) 네! 바빌론의 유배 생활로부터 해방되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된 일이지요. 이 두 가지 역사적 사건들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이나 정치, 외교적인 노력, 곧 물리적인 힘의 사용에 의한 구원의 체험이 아니라 전적으로 섭리적인 힘, 하느님의 개입에 의해 주어진 구원의 체험이었고 이러한 역사적인 체험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실 성서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는 바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하셨는가 하는 점을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역사적으로 드러난 구원을 성서는 미래에 있을 구원의 전조, 예표라고 말합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미카야, 호세아 등 크고 작은 모든 예언자들은 과거에 역사적으로 일어난 구원은 종말에 있을 구원에 대한 보증, 약속을 뜻한다고 선포합니다. 예언자들은 앞으로 올 구원을 역사의 종말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고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으로 이스라엘을 택하시리라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예언자들이 선포한 이 미래(종말)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교회의 형성과 함께 첫 단계로서 이미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아직은 신앙의 눈으로만 볼 수 있지만 새로운 창조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신약성서는 선포합니다. 이미 구원은 시작되었고, 마지막 완성을 기다리고 있는 도상에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임을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어원적으로 구원이란 말은 라틴어 Salvatio란 말의 번역인데 이 말은 '도와서 건져준다'란 뜻으로 '누군가가 남을 재앙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처음보다 더 나은 상태로 회복시켜 준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건져주는 이와 건져진 이가 불가결한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살다보면 누구나 인생에 대하여 불안감이나 부족함을 느끼면서 행복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신이 자기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인간의 노력으로만 해탈에 이르려 하는 불교에서조차 중생을 제도한다는 보살의 역할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이 구원받기를 갈망하는 불안에 찬 존재라는 점 자체가 인간을 돕는 상대자로서의 신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구원이란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서 이 세상의 역사에 개입하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개입은 인간을 하느님의 상대자, 즉 인격자로 만들게 되어 인간의 개성을 확정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하느님의 개입으로 인해서 하느님 앞에 서있는 존재로서의 인격성을 부여받게 되고 존엄성을 획득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구원이란 하느님께서 인간 삶 안에 들어오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개입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의로움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의로우심 때문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과의 약속에 충실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시며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을 감싸주시고 정화시켜서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백성으로 살 수 있게 할 방법을 끊임없이 찾으시는 자비로운 분이시라고 성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종 합 : 구원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
지금까지 구원에 대해 살펴본 바를 종합해 보도록 합시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고통을 보시고 구원해 주심으로써 당신을 '구원의 하느님'으로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이러한 구원은 인간의 의로움 때문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의로움, 성실성에 의해서 주어지는 하느님의 자유로운 개입입니다. 그리고 역사 속에 드러난 하느님의 구원은 예표적인 것으로 미래에 실현될 구원의 보증, 약속이 됩니다.
이러한 약속을 힘입어 우리는 이미 시작된 구원의 현실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 마지막에 이루어질 구원의 날을 기다리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오직 구원의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갖고 있을 때에만 생겨나는 것입니다. 성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체험 속에서 하느님은 구원자이심을 명백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심 화 : 우리의 삶 안에서 구원하시는 하느님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보았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도 끊임없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과 만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구원의 역사가 되는 것은 그것이 다른 나라들, 영국이든지 미국, 혹은 우리나라의 역사보다 더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인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구세사인 이유는 하느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의도를 성취시키기 위해 이스라엘의 역사에 개입하여 이루신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일상 생활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과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즉 우리의 일상 생활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어 행동하실 수 있도록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우리나라의 역사가 겉으로 드러난 역사적 측면에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활동하실 공간을 갖고 있느냐 하는 점에서 구분되는 것이라면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가 하는 여부에 따라 구원을 얻게 되느냐가 결정된다고 하겠습니다.
응용실천 : 하느님의 음성을 듣도록 깨어있는 일
우리는 앞으로 하느님과 함께 살기 위해서 실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도록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관심없는 사람의 말은 귀에 잘 들리지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말은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귀에 들어오기 마련이듯이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에 대한 관심으로 돌릴 때 우리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그분이 내 안에서 활동하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내 안에 활동케 할 수 있는 아주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려는 방법이 여러분 모두 적합한 것은 아니겠지만 여러분께서 한번 이 방법대로 실행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방법이란 우리가 어떤 느낌이나 생각을 할 때 그 앞에 '하느님'이란 말을 붙여서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불안한 마음이 일어날 때 '하느님 몹시 불안합니다.'라고 해 보세요. 배가 고플 때 그냥 '아이고 배고파'하지말고 '하느님 배가 고프군요'해 보세요. 그러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가까이 느끼게 되고 내 안에서 그분과 만남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예비자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과의 만남을 이루어 구원을 누리시기를 바라면서 오늘 교리는 이것으로 끝마치겠습니다.
함께 끝 기도를 바치겠습니다.
+ 성호경
주 하느님! 저희는 오늘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공부를 하였습니다. 저희가 어려움에 처하여 당신께 부르짖을 때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듯이 저희를 도와 주소서. 저희는 수많은 고통들로 인해 상처받고 있는 데도 그것을 극복할 힘이 없습니다. 저희의 노력에 대해 주님께서 언제나 구원의 은총을 주소서. 저희가 언제나 주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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