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 무릎꿇음 : 외모는 사람을 달리 보이도록 한다. 겸손의 정수는 자신을 낮춤으로써 이루어진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스스로를 낮추는 자세이다. 무릎을 꿇을 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하느님 앞에서 나는 미소한 존재이지만 그 분은 나를 낮추시지 않는다. 하느님 앞에 꿇음은 자신의 나약함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며 위로 받을 자격이 있음을 뜻한다. 이 자세는 하느님을 공경하는 고요의 자세이다.
◇ 기립자세 : 서서 걷는 것은 인간의 특성 중의 하나이다. 선다는 것은 자세를 가다듬는 것이며 준비되어 있음을 말한다. 하느님 앞에 서 있음은 하느님이 나를 일으키시고 똑바로 서게 하시며 나를 믿도록 도와 주신다는 것을 믿음이다. 서는 자세는 깨어 활동하는 자세이다.
◇ 앉음 : 바른 자세로 앉는 것은 바른 몸가짐을 나타내며 정성이 담긴 기대와 주의력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준다. 겉으로 나타나는 몸의 자세는 내면의 집중 정도를 드러낸다.
이러한 자세들은 전례 중에서 그 고유한 중요성이나 필요성들에 따라 여러 예식 속에서 각각 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자세를 취할 때 마다 그 자세가 갖고 있는 고유한 의미를 생각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행동해야 할 것이다.
세속화 현상
무신론이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거나 그와 비슷한 생활 태도를 갖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무신론은 인간 역사와 더불어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무신사상은 대부분이 '신성'이나 '신적인 것'에 대한 거부라기 보다는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관심이나 무지에서 비롯되는 '실천적 무신론', 과학주의 사고방식과 인간중심의 사상에서 출발된 '체계적 무신론', 그리고 가장 대표적인 무신론으로 볼 수 있는 '인간의 실존주의적 무신론'(이것은 무죄한 사람들의 고통과 세상의 부조리함을 보고 실망과 충격을 받고 신을 거부하는 형태다)과 교회의 현 상태에서 실망하고 강한 거부감으로 신의 존재까지도 거부하는 형태인 '휴머니즘적 무신론'등으로 나누어서 살펴 보았습니다.
무신론은 대부분이 인간 자신의 과시나 혹은 무관심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과학만능의 시대가 퐁요를 가져다 주었지만 참된 행복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이것은 선진국일수록 자살의 빈도가 높다는 것에서도 드러납니다. 오히려 과학이 발달할수록 정신적인 빈곤, 소외현상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인간의 자기과시, 무신론적 상황의 배경에는 인간중심의 사고방식이 만연되어 있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근세 이후 세계는 인간 중심의 사고가 주류를 이루면서 일대 전환을 맞이했습니다. 우리나라를 보면 해방 이후 물밀듯이 밀려드는 서구사상과 유행에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흔들리면서 무비판적인 수용으로 오늘날 각 분야에서 특히 윤리도덕의 측면에서 큰 위기를 느끼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매우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현대를 흔히 세속화된 시대, 과학만능주의, 배금주의, 물질문명의 만연시대 등 많은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무신론자들의 입장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았는데 그것이 꼭 그들만의 생각은 아닙니다. 우리 마음 속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무신론적인 요소들이 있습니다. 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현대의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이 그 비중을 크게 하여 신앙이라는 것에 많은 어려움과 곤란함을 느끼는 것도 사실입니다. 중세 이전만 해도 하느님 중심의 사고방식으로 인간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던 것도 오늘날은 과학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많은 부분을 인간이 대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극단적으로 치달아 하느님은 전혀 힘도 없는, 무기력하기만 한 그런 존재라고 혹은 신은 죽었다고 무력한 하느님의 죽음을 선포하기에 이르렀고 기실 오늘의 과학시대에 사는 우리에게는 '어떻게 하느님을 믿고 고백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고도 어려운 과제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려고 모인 우리들이지만.......
그러면 과연 어떻게 하느님을 알고 참된 신앙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교 신앙의 고백
신문을 보면 거의 매일 엄청난 충격을 주는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도 인신매매라는 엄청난 죄악이 자행되고 있고 정부도 거의 무력한 것처럼만 보입니다. 지구 한쪽에서는 대단한 부와 향락에 젖어 흥청대고 있는데 그 순간 지구 한 구석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기아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가공할 만한 핵무기와 강대국들의 이권 다툼 속에 정말이지 숨돌릴 틈조차 없는 위기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풀 수 없는 문제들 속에서 하느님의 존재가 불확실해지는 뼈아픈 체험을 하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올바르고 성숙한 신앙관을 가질 것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과학은 대단히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과학이 우리에게 유익한 많은 발전을 가져온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 과학이 과거에 우리가 하느님의 영역으로 인정했던 인간의 생명마저도 도구화시켰고, 꼭 2차대전을 말하지 않더라도 지금도 비공식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인체실험, 인간의 감정까지도 조절할 수 있다는 과학의 위력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인간중심으로 세상이 바뀐 이래 인간을 위한 과학이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을 손상시키고 인간을 도구화시켰으며 그래서 비인간화 현상이 점차로 확산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학시대에서 인간은 하느님마저도 지식의 대상으로 파악하려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하느님은 과연 어떤 분입니까? (각자 3분정도 생각)
저는 이 문제를 생각할 때면 한가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느 임금님이 태생 맹인 거지들을 불러 모으고 말하기를 "당신들 중에서 코끼리의 형태를 가장 잘 묘사하는 사람에게 상금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첫번째의 맹인거지는 코끼리의 다리를 만져보고는 "코끼리는 나무기둥과 같은 동물이다"라고 하였고, 두번째 맹인거지는 코끼리의 꼬리를 만져보고는 "코끼리는 밧줄과 같은 동물"이라고 했고, 세 번째 맹인거지는 코끼리의 귀를 만져보고서 "코끼리는 야자나무 잎과 같은 동물이다"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맹인거지들도 이와 비슷한 말들을 하면서 모두가 자기 주장이 옳다고 우겼고 임금은 미소를 지으며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역시 스스로 유한한 존재이고, 인식능력도 완전하지 못함을 시인하면서도 내가 생각하고 있는 하느님만이 진짜라고 생각하며 사는 때가 허다합니다. 십인십색이라는 말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하느님 역시 천차만별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하느님은 한 분 뿐이십니다. 마치 코끼리 발톱을 만지고 이것이 코끼리라고 우기는 맹인과 같은 것이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은 단순히 우리의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여전히 신앙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과학이 입증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격적인 행위입니다. 깊은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에게 있어서 그들을 맺어주는 것은 인격적인 크나큰 신뢰입니다. 신뢰없이 진정한 사랑이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과의 관계도 이처럼 깊은 신뢰 속에서 인격적인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은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에서 이룩되는 진리입니다. 이것은 체험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체험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체험하는 우리 자신을 사로잡는 진리입니다. 사랑은 학문으로 정의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느껴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 그 사람은 상대에게 고백하고 싶어하고 또 그 사랑이 자신을 완전히 사로잡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우리에게 그 사랑을 고백하게 하고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이 사랑을 느끼기 위해 우리는 체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무엇이든지 증명되지 않는 것은 믿지 않으려는 풍조가 있고 우리 자신 속에도 이런 풍조가 많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살아 있는 생명들이 사랑을 교환할 때 '발생'하는 분이기에 우리는 하느님께 고백은 할 수 있지만 절대로 하느님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의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고 풀을 수 없는 많은 문제에 부딪히고 있으며 인간 스스로의 무력함을 솔직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하느님을 찾게 됩니다. 세속화는 신앙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로운 인간의 태도로 인해서 신앙을 보완해 주는 것입니다. 결국 세속화는 우리에게 성숙한 신앙고백을 위한 자극제가 되어 준 셈입니다.
참 사랑이 요구되는 오늘날의 세상
지금까지 현대의 세속화된 사회, 과학기술의 발달과 물질 만능주의 속에서 인간중심의 사고방식이 결국 인간을 도구화시켰고 또 인간 스스로 한계를 느끼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고백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알아 보았습니다. 앞으로 긴 시간 동안 하느님에 관한 교리를 배우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바로 알고 그 분을 사랑하며 철저한 믿음 속에서 그 사랑을 고백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을 까? 모든 것은 인간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매일 매일 부딪치는 이웃 안에서, 나의 가정 안에서 우리는 작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을 시작하기 이전에 읽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에 나오는 그 사람처럼 진정한 이웃이 되어 사랑을 베풀 때 참사랑의 기쁨을 맛볼 수 있고, 조건 없는 사랑 속에서 메말라가는 세상의 활력소가 되고 또 진정한 신앙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때 비로소 우리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신앙을 고백할 수 있고, 하느님을 굳게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서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하고 반문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고하였습니다". 이 대답에 예수께서는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율법교사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둘겨서 반쯤 죽여 놓고 갔다.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을 내려 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가다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다음 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 오는 길에 갚아 드리겠소'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시작기도): 성호경, 주의 기도, 가톨릭 성가 1번
(평화의 인사): 양 옆에 있는 사람들과 인사하고 악수하도록 한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알 수 없지만 모두 같은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자 이곳에 모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한 배를 탄 인생의 동반자이며, 동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하느님의 초대에 모두 응답한 초대받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친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의 주요점 요약)
지난 시간에 우리는 종교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공부하였습니다. 인간에게는 종교는 어떤 의미를 지니며, 그런 종교란 과연 무엇이고, 어떠한 종교가 있는지, 또 추구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의 답이 되었으리라고 믿습니다(지난 시간의 핵심적인 내용을 간추려 상기시켜 준다).
이번 시간에 공부할 내용은 무신론자가 종교에 대하여 취하는 입장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곳에 모이기 이전에는 어떠한 형태로든지 무신론자였다고 할 수 있고 또 어떠한 형태로든지 종교에 대한 생각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과거에 지녔던 생각들을 나누어 보면 자연스럽게 오늘 우리가 공부해야 할 주제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럼 자연스럽게 과거에 자신들이 종교에 대한 입장이나 생각들을 이야기 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자신들이 과거에 지녔던 생각들을 이야기하도록 유도한다).
(1) 과학주의적 사고 방식과 신앙과의 상치
과학의 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하자 과거에 인간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자연현상이나 병에 대한 신비도 과학의 힘으로 하나하나 벗겨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신비가 신이 직접 인간에게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자연의 현상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무엇이든 과학의 힘으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을 믿을 필요도 없고 종교를 가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신앙은 반과학적이고 신화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2) 철학적인 사고와 신앙과의 상치
이는 인간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고 역사의 주인이며 창조자라는 사고방식에서 출발하여 종교는 현재의 곤경을 외면하여 성취하지도 않는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며, 소외당한 노동자들이 자신의 고통에 대한 위안을 받는 안식처로 신을 찾는다고 규정하고 이를 이용하여 지배계급의 사람들은 경제적 이익을 취하려는 농간이며 노동자를 현혹시키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태의 무신론은 인간의 구원을 경제적 내지는 사회적 해방에서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종교는 이런 인간해방에서 장애거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학설을 신봉하는 국가의 집권자들은 종교를 맹렬히 공격하고 청소년 교육에서도 무신론을 공공연히 신봉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실존주의적 무신론
가장 대표적인 무신론이라고 할 수 있는 데 이는 무죄한 사람들의 고통과 세상의 부조리함을 보고 실망과 충격을 받고 신을 거부하는 형태입니다. 예를 들면 세상을 착하게 살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불의한 사고와 죽음을 보고, 또는 악인이 오히려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보다도 현세에서 행복과 권력을 누리는 모습을 보고 신이 없거나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4). 휴머니즘적 무신론
이 형태는 교회의 현실을 보고 실망을 느끼고 교회에 대한 강한 거부감으로 신의 존재에 대한 거부까지 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즉 사회의 구조적인 악, 부조리 등에 대해 교회가 무관심하거나, 침묵을 하고 있거나, 현실의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는 모습, 더욱 나아가 경제적으로 부유하거나 권력을 지닌 자와 결탁하여 오히려 이들을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고 강한 실망을 느끼고 분노를 느낀 나머지 하느님까지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간단하게 무신론의 몇 가지 형태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만나게 되는 무신론적인 모습은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한 무신론의 형태보다는 하느님에 대하여 알 기회가 없거나 긴급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거나, 또는 안다 하여도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하여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쉽게 알 수 있는 이야기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막연하게 신이나, 죽음 이후에 어떤 세계가 있다고 믿어온 민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 또는 '천벌을 받지' 하는 말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으며, 초상집에 가서는 그 가족들에게 위로의 말로 '아마 그분은 생전에 착하게 살으셨으니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예요'라고 말하기도 하고 예로부터 조상님을 위하여 묘자리를 잘 써야 한다고 하며 양지 바르고 흙이 습하지 않은 좋은 땅을 찾아 모셨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생활 양식 속에는 자연스럽게 어떤 신이나, 죽음 이후에 어떤 삶들이 또 있으리라는 막연한 생각들이 깔려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엄밀하게 신의 존재를, 신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자들은 없는 것 같습니다.
흔히 종교를 갖지 않은 친구들에게 이러한 투박한 질문을 받습니다. "하느님을 봤소? 우주선이 달나라를 왔다갔다 하는 세상에 무슨 소리냐?" 하고 물을 때는 참으로 난감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보지 않고 만져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기는 보고 만져보고, 보증서까지 받고서도 속고 속이는 세상이니 한편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옛날에 평생을 돈과 재산을 위하여 살다가 결혼도 하지 않은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귀한 물건을 가지는 것이 오직 유일한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귀한 것을 알고 있다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 나그네는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귀한 것은 '사랑'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부자는 도대체 사랑이라는 어떻게 생겼고, 어디에다 쓰는 것인데 그리도 귀한 것이오? 하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 생겨도 사랑만 있으면 언제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듣고 보니 과연 그 부자는 사랑이 아주 귀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더니 금화를 한웅큼 내놓으면서 '그처럼 귀한 것이니 값도 많이 나가겠지요. 하면서 되도록 좋은 것으로 그 사랑을 많이 좀 구해다 주시오.'하더랍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이야기이죠. 왜냐하면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사랑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것이며 더구나 돈으로는 살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무엇보다도 값진 것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양식으로든지 한번쯤은 사랑을 체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부모님께 대한 사랑, 자식에 대한 사랑, 남녀간의 사랑, 친구에 대한 사랑 등등을 말입니다. 분명히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사랑이지만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아니 사랑이라는 것이 없다면 살 수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장님에게 빨간색을 아무리 설명하여도 결코 빨강색을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랑도 깊이 체험해 보지 않고서는 아무리 설명을 하여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도대체 무엇이오? 아... 그것은 말이오 바로 사랑하는 것이랍니다' 라고 밖에 특별히 설명을 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설명을 한다 해도 그것은 사랑의 아주 일부분이나 한 측면만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체험하지 않고서야 알 수 없는 것이며, 이 보이지도 않는 사랑은 때때로 자기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마저도 던져버릴 수 있는 힘을 발휘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위대한 사랑의 이야기 속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이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있는 것이듯이 하느님도 보이지는 않으나 분명히 계신 분입니다. 사랑이 설명될 수 없는 것이듯이 하느님도 결코 이론적인 설명으로 알 수 없는 분이십니다. 아무리 설명을 한다 해도 결코 하느님의 한부분만을 설명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랑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듯이 하느님도 신앙으로 체험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분이십니다. 사랑의 힘이 가끔 위대한 힘을 발휘하듯이 신앙의 힘도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되지 않는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신앙 안으로 들어와 보지 않고서 이론이나 논리적으로 하느님을 부정하거나 또는 단정지어 말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라고 판단되어 집니다. 또는 하느님을 마치 복잡한 컴퓨터를 제작하듯이 마음대로 구상하고 편의에 따라 만들어 내는 것도 위험한 속단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또 조급하게 하느님을 알아내려는 판단으로 지나치게 서둘러 답을 얻어내려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더 크신 분이시고 신비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 안에서 서두르지 않고 인내롭게 하느님을 찾으려는 자세로 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어떠한 형태의 무신론도 단호히 배격하는 입장이지만 어떠한 무신론이라도 결코 소홀하게 보지 않고 중요하게 의식하며 진지하게, 검토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그 발생 원인도 매우 신중하게 연구하고 교회자체에서도 반성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습니다.
4. 종합 심화 : 무신론자들도 추구하는 영원한 삶
지금까지 우리는 현대 세계에서 신앙의 어려움인 무신론의 체계와 형태를 살펴보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부분의 무신론이 인간 자신의 극대화나 무관심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에게도 참으로 거부하고 싶은 한가지의 사실과 현실은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어느 누구도 결코 피할 수 없는 두려운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구할 수만 있다면 영원한 생명을 구하고 싶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하를 통일하고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린 진시황도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온 세상을 다 찾아 다녔지만 결코 영원한 생명을 구하지는 못하였던 것입니다.
현대의 과학문명이 인간에게 풍요를 가져다 주었지만 정신적인 참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못하였다는 것은 첨단의 문명 속에 살고 있는 선진국일수록 오히려 삶에 대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자살의 빈도수가 높다는 사실로도 입증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현대에 올수록 정신적인 빈곤을 느끼고 또 깊은 소외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이러한 어려움을 신앙 안에서 하느님 안에서 찾고자 합니다. 신앙 안에는 인간의 지혜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가 있음을 우리는 순교자들이나 성인들의 삶 속에서 발견할 수 있고, 그러한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5. 실 천 : 삶의 올바른 봉헌과 실천
우리의 현실 앞에 다가서는 무신론을 시정하는 길은 오로지 올바로 해석된 교리와 그 지체들이라고 할 수 있는 신자들의 완전한 생활뿐입니다. 바로 이웃과의 형제적인 사랑과 봉사 헌신을 통하여 하느님의 현존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바로 사랑 속에서 확인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나에게서 가장 가까운 부모 형제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였고 이웃을 사랑하였는지 반성해 보고 그렇지 않았다면 작은 사랑일지라도 실천에 옮겨보도록 해 봅시다.
6. 끝 기도
주변에서 그렇게들 말합니다. 하느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행복을 찾을 수도 없다고 말입니다. 오직 부유함과 평안함에만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저는 진정한 평화나 행복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때때로 산다는 것이 무의미하고 고통스러울 때도 많았습니다. 주님! 이제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당신에게서 찾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당신 안에 평화와 행복이 있을 것을 확신합니다. 밝은 빛으로 저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
주여 당신 장막에 묵을 이 누구오리까 / 거룩한 당신 산에 살을 이 누구오리까
허물 없이 살아가며 의를 하는 이 / 마음 속에 진리를 품은 사람이외다.
제 혀로 하리질 아니 하는 이 / 벗에게 해로운 일 아니 하는 이
이웃을 비방하지 않는 사람이외다. / 악한 자를 눈 아래 얕이 보아도
주를 섬기는 이면 존경하는 그 사람이외다.
해 돌아올 맹서라도 어김 없이 지키는 이
길미를 받으려고 돈을 놓지 않는 이
무죄한 이 다칠세라 뇌물 받지 않는 이오니
이같이 하는 그 사람은 쓰러질리 없으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