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 두 통의 메시지를 받았다
한 사람은 지금 경기 지역에서 교장으로 있는 친구의 부군이고,또 한 사람은 까마득한 대학 후배 시인이다
믿겨지지 않은 소식을 접하고 망연자실하여 한동안 멍하게 서있었다
내가 가슴을 친 것은 성시인의 부고 소식이다.
참으로 건강하였고 50을 갓넘긴 나이에 부부교사로 두 딸과 함께 잘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건만 갑작스런 부고소식은 내 가슴을 치고 또 치게 했다.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아온 걸까 돌아보니 내 자신이 싫어졌다 후회가 폭풍처럼 밀려왔다.
소식이 뜸하면 먼저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오히려 소식이 없다고 뿌루퉁해 있었으니....
내 손톱 밑의 아픔만 볼 줄 알았지 다른 사람 가슴에 박힌 가시는 보려고도 하지 않았으니 이 무슨 이기적인 삶.
좀더 너그럽지 못하고 좀더 이해하지 못하고 틀에 박힌 고정관념 속에 나 자신을스스로 고독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후회해 봐도 소용 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또다시 이런 황당한 일을 겪고 있구나 하는 자괴감으로 잠을 설쳤다.
전화 한 통이라도 먼저 걸어봤었더라면 병중에 있는 그녀의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었지 않았나 하는 후회스러움에 그녀가 내게 보낸 메일을 찾았다.
다행히 처음에 보낸 메일이 아직 들어있었다. 헌데 이게 웬일인가. 첨부문서가 있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제서야 열어보고 또 후회가 밀려온다. 왜 한 번이라도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어보지 않았나? 내가 먼저 연락을 하였으면 이런 후회는 하지 않을 거 아닌가?
축복 받은 옥돌
성민희 (시인)
나는 유난히 눈물이 많은 아이였다. 너무 외롭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늘 출장으로 바깥으로 돌아다니셨고, 어머니는 시집살이와 집안일로 늘 고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일찍 과부가 되신 할머니는 인정이 없고 매몰찬 분이셨다. 할머니의 사랑은 언니와 남동생에게 편중될 때가 많아, 난 혼자 집에 외롭게 남겨지곤 했다. 보릿고개로 나의 생일은 자주 잊혀졌고, 가을 언니의 생일상은 항상 푸짐했다. 누군가 나더러 “넌 다리에서 주워온 아이래”라고 말했을 때, 난 정말 ‘우리 부모님은 진짜 부모님이 아닌 모양이야’ 하고 생각했다. 형제들에게 치이고 소외되면서 나는 '덤'으로 자라나게 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무서웠고 어머니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자녀들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유달리 쓸쓸하고 고독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유달리 예민한 마음과 섬세한 감수성을 주셨던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선 국어시간에 ‘나의 소원’이란 제목으로 시를 써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몇 자 끄적여 썼을 때 선생님을 내가 쓴 시를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시며 나를 아이들 앞에 세우셨다. 난 그때 처음으로 나도 잘 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걸 알았고, 존재감을 맛보게 되었다. 선생님의 따뜻한 사랑과 함께, 나의 문학에 대한 동경은 시작되었고 문학작품 속에 빠져들게 되었다. 고독하고 외로운 나의 마음을 달래 줄 유일한 친구는 바로 책이었다. 어느 날 나는 에밀리 디킨슨이 쓴 시를 읽게 되었다.
내가 만일 애타는 한 가슴을 달랠 수 있다면
내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내가 만일 한 생명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거나
한 사람의 괴로움을 달랠 수 있거나
가여운 지빠귀 한 마리를 도와서
보금자리로 돌아가게 해 줄 수 있다면
나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이 한 편의 시구는 내 마음에 깊이 새겨졌고, 나도 이런 영혼의 울림을 주는 시를 쓰고 싶었다. 누군가의 아픔을 치유하고 위로해줄 수 있는 그런 작품, 단 한 편이라도 그런 시를 쓸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셔서 반신불수가 되어 1년간 누워 지내셨고 어머니가 똥오줌을 다 받아내야 했다. 집안에는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다. 1년 후 아버지는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어 일을 하셨지만 정신만은 온전치 못하셔서 자주 어머니와 다투며 고함을 치셨고, 나는 이런 불화한 가정에서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20세가 되면 가출하리라 다짐했다. 삶이 우울한 나에게 문학작품과 친구들이 낙이 되어 주었다.
원하던 국문과에 들어갔건만 대학생활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형제들에게 치이며 자라 열등감이 많던 나에게 자유분방하고 자신감 있는 친구들과의 인간관계는 처음부터 쉽지가 않았고, 삶이 주는 허무감과 무의미함으로 슬럼프에 빠져 대학1년을 힘들게 보내게 되었다. 삶의 무게에 눌리고 나 자신에게 절망하여 거의 삶을 포기하고 싶었을 때, 하나님께서 친구를 통해 교회 예배에 인도하셨고, 난 주님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하찮게 여겨지던 내가 소중한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니, 하나님께서 나를 그토록 사랑하셨다니, 정말 생각할수록 가슴이 미어져 왔다. 그리고 말씀 안에서 내면의 열등감과 사랑콤플렉스 등의 상처가 치유되며 놀라운 평강을 누리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면서 곧바로 교사임용고시에 붙어 교사의 길을 걷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인생을 놀랍게 축복해 주셨다.
나는 10남매나 되는 막강 패밀리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방 한 칸 얻을 돈이 없어 빚을 얻어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결혼생활을 지탱하기 위해선 주고 또 주는 생활을 해야 했다. 10년간 시동생들 학비를 대느라 생활비는 바닥나고 허리가 휘청거렸다. 14평 좁은 셋집을 전전하다가, 결혼 15년째 지금의 아파트를 장만할 수 있었다. 그래도 건강과 물질을 주셨고, 물질을 사람에게 투자했고, 사람을 얻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내가 신앙을 가지면서 생긴 변화는 어떤 상황에도 감사하고 기쁨과 평안함을 누린다는 사실이다. 전에는 항상 불안, 초조하고 불평불만이 많았는데.....
어느 해 겨울, 다이어트로 살을 빼자 갑자기 엄청난 양의 시를 쓰게 되었는데, 이때 뜻하지 않게 시인으로 등단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난 지리산을 처음으로 종주하게 되었고, 지리산의 장엄함과 웅대한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그 후 나의 지리산 종주는 계속되었고....누군가 나에게 ‘왜 대한민국에 사느냐’고 묻는다면 지리산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난 그 이후 요리에 심취하게 되어 선생님들과 팀을 만들어 일식, 한식, 양식, 손님초대요리를 배우러 다니게 되었으며, 지금도 배우고 있다. 그리고 때마다 사람들을 초대하여 음식을 만들어서 먹으며 재미있게 지내고 있다.
그리고 내가 남다르게 하는 일이 한 가지 있다면 바로 토요일 밤에 1시간 교회 중보기도실에서 기도하는 일이다. 몸이 아픈 사람, 수험생, 나라와 민족 등, 주로 남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있다. 나는 이 일은 1년 5개월 동안 해왔고 앞으로도 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할 생각이다.
어릴 땐 ‘덤’과 같이 있으나마나한 존재, 하찮은 돌맹이에 불과한 나, 그런데 이런 내가 이제 ‘하나님이 축복해 주신 소중하고 아름다운 옥돌’이 되어 있지 않은가?(성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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