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든 성인의 통공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서 교회에 대하여 공부하겠습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교회의 현세적인 모습으로서 가시적인 교계제도와 역사 안에서 활동하여 온 교회가 공의회를 통하여 발전하여 온 여정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칠판에 써 있는대로 "天上敎會와 地上敎會의 通交"에 대하여 공부하기로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에 입문하기 위하여 그 준비로서 교리교육을 일정한 기간 받고 있습니다. 그 기간은 교회에서 6개월 이상이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그 규정에 따라 짜여진 교육과정을 여러분은 받고 있으며 여러분을 교회에서는 신앙을 예비하는 사람이라고 하여 예비자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잘 알고 있겠지요? 그런데 예전에는 이런 식의 교리교육을 받은 것이 아니라 『천주교 요리 문답』이라는 문답식의 교리서를 가지고 암기 위주로 교리를 배웠으며 교리에 대한 이해와는 상관없이 교리서에 나온 문답을 암송해야만 세례를 주었습니다. 즉,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났느뇨?"라는 질문에 "사람이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에 났느니라"라고 답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삼 백여 가지나 되는 이러한 문답을 외우고 세례 전에 "찰고"라고 하는 신부님과의 면담 중에 구두로 시험을 보아 통과하여야만 세례를 주었었습니다.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하는 "천상교회와 지상교회의 통교"에 대하여 과연 교회가 지녀온 전통적인 교리가 무엇인지를 문답식 교리에서 보기 위해서 입니다. 천주교 요리의 90번째 문답은 우리가 시작기도로서 바친 사도신경에 나오는 '모든 성인들의 통공을 믿으며'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그대로 읽어보면
(문 : 모든 성인의 통공이란 무엇이뇨?
답 : 모든 성인의 통공이란, 세상과 연옥과 천당에 있는 모든 회우(會友)들이 가장 신비하게 서로 결합하고, 또한 그리스도와 결합함으로 공을 통함이니, 이는 마치 산 몸의 지체가 머리와 서로 결합함과 같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모든 聖人'이라고 할 때 성인은 교회의 모든 회우, 즉 우리가 일상적으로 교우들이라고 부르는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고 신앙을 지닌 사람들을 통틀어 말하는 것으로 영세한 사람으로서 대죄의 상태에 있지 않는 사람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와 같은 큰 의미에서 볼 때 성인이 되려고 준비하는 예비자 입니다. 좁은 의미로 성인이라고 할 때에는 흔히 우리는 몇몇 위대한 성현이나 세상에 빛이 되었던 사람들을 생각하지만 이렇게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구성원이 된다는 자체가 성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영세를 받은 사람이 모두 그 사실만으로 성인의 지위가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답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 때 그 품위는 유지되는 것입니다. 전통교리에서는 이 세상에 있는 신자들은 비록 소죄가 있을 지라도 교회의 교우요, 은총을 누리고 있으며, 거룩한 도리를 믿고 따르므로 성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서의 편지에서 베드로 사도는 초대교회의 신자들을 "거룩한 민족"(1 베드 2, 9)이라고 하였고, 로마서와 에페소서에서 바오로 사도도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로마 8, 28)이므로 "이제 여러분은 외국인도 아니고 나그네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같은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에페 2, 19)라고 하였습니다.
2. 세 가지 교회
전통교리에서는 현세적 교회 안의 신자들뿐 아니라 세상을 떠난, 죽은 신자들도 교회의 일원으로서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형성한다고 보아왔습니다. 즉 교회를 셋으로 구분하여서 이 세상에 살면서 죽을 때까지 세속과 육신과 악의 세력에 대적하여 싸워 나가야 하는 세상에 있는 교회를 神戰之會 - 전투하는 교회라 하였고 죽어서 이 세상을 떠날 때 소죄만 있거나 보속을 해야 할 잠벌(자신이 살아서 지은 죄에 대한 속죄로서 치루어야 하는 일정한 한도의 벌)이 남아 있어 천국에 갈 때까지 연옥에서 단련을 받아야 하는 영혼들의 모임을 *- 단련받는 교회라고 하였으며, 죽을 때 죄도 없고 잠벌도 없거나 또는 연옥에서 단련(잠벌을 치루어 냄)을 다 받아서 천국에 들어가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영혼들의 집단을 * - 승리한 교회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 교회들은 각기 다른 차원의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분이신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서로 일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거룩한 교회의 신자가 이 세상을 살다가 죽어 연옥을 지나 하느님의 영원한 복락에 들어갔다고 할 때, 그 영혼은 세상에서 살았던 그 사람의 영혼과 다른 영혼이 아닙니다. 이렇듯 전투하는 세상의 교회와 단련을 받는 교회, 승리하여 하느님의 복락을 누리는 교회는 본질적으로 다른 교회가 아니라 언제나 동일한 교회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단지 그 교회의 상황이 싸움(戰)과 단련과 승리로 다를 뿐이라 하겠습니다. 이 세 교회는 어느 것이나 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 합치된 것으로 군대에 비교하면 삼 개 사단으로 구성된 한 군단과 같이 한 사단은 적을 무찌르고 나서 휴식을 취하고 있고, 한 사단은 전투 후에 정비 중이고, 한 사단은 아직 전투 중인 상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 사단은 다같이 한 군단을 형성하고 한 군단장 밑에서 그의 명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교회의 세 가지 상태에서 우리는 세상에서 살면서 죽을 때까지 세속과 육신의 악한 세력과 싸우는 전투하는 교회를 지상교회라고 하며, 이미 세상에서의 싸움을 끝내고 그에 대한 평가로서 단련을 받거나 영원한 복락을 누리고 있는 교회를 천상교회라고 하겠습니다.
전 개
그리스도의 신비체
신약성서 골로사이서를 보면 "그리스도는 또한 당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의 시작이시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최초의 분이시며 만물의 으뜸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본질을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하늘과 땅의 만물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셨습니다. 곧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로써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골로 1, 18-20)라고 되어 있으며 에페소서에서는 "때가 차면 이 계획이 이루어져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가 될 것입니다"(에페 1, 10)라고 합니다. 즉 어떠한 상태의 교회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결합된 한 몸을 이룸으로서 여러 지체가 한 개체에 연결되어 한 생명으로 살고 있는 최고의 결합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거룩한 교회의 교우들의 결합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며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나를 떠난 사람은 잘려 나간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말라 버린다..."(요한 15, 5-6). 포도나무 가지와 잎새들이 줄기와 연결되어 한 생명으로 사는 것처럼, 여러 교우들의 영혼들은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오는 한 생명, 즉 하느님의 초자연적 은총 (恩寵)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 생명체가 수천 수억의 세포들이 결합되어 한 생명으로 사는 것처럼 세상, 연옥, 천국의 수많은 신자들의 교회는 한 그리스도의 생명, 은총을 중심으로 결합되어 있고, 그래서 이런 교회의 모습을 "그리스도의 신비체(Corpus Mysticum Christi)"라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신비체에 대하여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몸은 하나이지만 그 몸에는 여러가지 지체가 있고 ... "(로마 12, 4),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 유다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같은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1 고린 12, 12-14). "도리어 우리는 사랑 가운데서 진리대로 살면서 여러 면에서 자라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각 부분이 자기 구실을 다함으로써 각 마디로 서로 연결되고 얽혀서 영양분을 받아 자라납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는 이와 같이 하여 사랑으로 자체를 완성해 나가는 것입니다"(에페 4, 15-16).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까 몸에 딸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해서 귀가 몸의 한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온 몸이 다 눈이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또 온 몸이 다 귀라면 어떻게 냄새를 맏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각각 다른 기능을 가진 여러 지체를 우리의 몸에 두셨습니다. 모든 지체가 다 같은 것이라면 어떻게 몸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는 것입니다. 눈이 손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없다'고 말할 수도 없고 머리가 발더러 '너는 나에게 소용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1 고린 12, 15-21). 이렇게 각 지체는 자기 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체를 위해서 있고 전체를 위해서 있듯이, 우리가 전 시간에 배운 교회 안의 교황, 주교, 사제, 수도자, 평신도 등 여러 직책은 각각 다른 지체를 위하여 있으며 온 신비체를 위하여 있는 것이며, 또한 지상교회와 천상교회도 서로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결합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각 지체가 다른 지체와 온 몸을 봉사하듯이 교회 안의 지체들도 서로 서로 결합되어서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상교회와 지상교회의 통교의 의미이며, 각 지체로서 한 신비체에 결합되어 교회의 은총으로 나타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서로 나누는 것을 전통교리에서는 "모든 성인들의 통공" 이라고 가르쳐 온 것입니다.
종 합
1. 통공의 의미
우리가 "통교"라고 말하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서로 나누는 관계를 전통교리에서는 더욱 구체화하여서 "통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통공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공을 통한다는 것으로서 여기서 말하는 공이란 하느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선한 행위라고 할 수 있으며 교회 공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고 교회는 가르쳐 왔습니다.
1) 거룩하고 공번된 교회와 신앙에 충실한 모든 이를 위하여 제물을 봉헌하는 기도를 바치고 죽은 모든 이들과 살아있는 모든 믿는 이를 생각하며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릴 수 있는 은혜를 청하는 미사성제.
2) 성직자들이 교회를 대표해서 날마다 드리는 공식기도인 성무일도.
3) 신자들이 받게 되는 일곱 가지 성사.
4) 교회에서 제정한 준성사들과 교회 전례.
5) 거룩한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바른 대로 믿고 바른 대로 행하는 것.
2. 기도와 선행
그 외에도 교회는 신자들이 행하는 기도와 고신극기, 자선, 고행, 봉사, 희생과 같은 모든 착한 행위를 의미하는 선행이 이에 해당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모두 온전해 질 것입니다. 올바른 사람의 간구는 큰 효과를 나타냅니다"(야고 5, 16). "옳지 못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는 것보다는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고 올바른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는 것이 더 좋습니다. 황금을 쌓아두는 것보다는 자선을 행하는 것이 더 좋은 일입니다. 자선은 사람을 죽음에서 건져내고 모든 죄를 깨끗이 없애 버립니다. 자선을 행하는 사람은 장수하게 될 것입니다"(토비 12, 8-9).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러한 선행에는 다음과 같은 공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1) 하늘나라 영복을 누릴 공(永福之功).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마태 5, 12).
2) 육신과 영혼에 필요한 은혜를 얻는 공(求得之功). "나는 말한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루가 11, 9-10).
3) 죄를 사하여 주심을 얻는 공(下恤之功). "여러분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실 것이며 여러분은 주께서 마련하신 위로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사도 3, 19-20).
4) 죄로 인하여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면하게 하는 공(補贖之功). 소죄라도 그에 해당하는 벌이 있는데 이것을 세상에서 받지 않으면 연옥에 가서 받아야 한다. 대죄의 사함을 받으면 지옥의 영벌은 면제되지만 거기에 해당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 이런 벌은 한도가 있으므로 잠벌(暫罰)이라고 부르는데 기도와 선행, 고행 등으로 죄의 잠벌을 보상하는 것을 "보속"이라고 한다. "누가 너를 고소하여 그와 함께 법정으로 갈 때에는 도중에 얼른 화해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는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형리에게 내주어 감옥에 가둘 것이다. 분명히 말해 둔다. 네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풀려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 5, 25-26 ; 루가 12, 59).
이상에서 말한 네 가지 공로는 선행을 통하여 받게 되는 것인데 선행을 한 신자가 그 공을 교회 내의 다른 교우들에게 사양 - 양도하는 것을 통공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구성원들끼리는 기도와 선행을 통하여 통공(통교)을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잡혀 옥에 갇혔을 때에도 모든 교우들이 그를 위하여 기도하였다고 사도행전(12, 5)에 기록되어 있으며, 바오로 사도도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형제 여러분, 나는 성령이 베푸시는 사랑을 믿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여러분도 나를 위하여 하느님께 간곡히 기도하여 주십시오"(로마 15, 31)라고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또한 모니까 성녀는 방탕한 아들 아우구스띠누스의 회개를 위하여 끊임없는 눈물의 기도와 고행을 계속하여서 교회의 역사 안에 위대한 성인으로 아들 아우구스띠누스를 이끌었습니다.
3. 선행의 효과
19세기 말 프랑스의 어떤 신학생이 방학을 맞아서 고향에 돌아와 보니 절친하던 친구가 중병에 들어 오늘 내일 하면서도 하느님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신학생은 영혼의 구원이라는 중대사에 대하여 여러 번 말로 깨우쳐 주려 하였으나 효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친구를 위해서 기도를 시작함과 동시에 밭갈기와 김매기 등 힘든 육체노동을 통하여 그 친구의 회개를 간절히 구하였으며 목마를 때 물도 마시지 않고 식사 때에도 절식을 하는 등 일주일 간의 고행을 계속한 뒤 다시 그 친구를 찾아가 회개를 권고하자 그렇게 완강히 거부하던 친구의 마음이 열려 성사받기를 청하였고 곧 모셔온 신부님께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고백성사를 본 후 평안한 모습으로 임종하였습니다. 그후 그 신학생은 열심한 신부가 되어 한국에서 50여년 동안이나 성직을 수행하다가 6.25때 납북되어서 모든 고통을 감수하면서 선종하셨습니다. 이분이 바로 안토니오 공(孔安國, P.A. Gombert)신부님이셨습니다.
이처럼 선행은 그것이 지향하는 일에 효력을 나타낼 뿐 아니라, 그 선행의 근원이 되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결합된 다른 신자들에게도, 자기의 손실을 당하지 않은 채,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성서에서도 하느님께서 몇 사람의 공로를 보시고 여러 사람을 축복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아 시대의 대홍수 후에 노아의 번제를 받으시고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창세 8, 21)라고 하셨고, 음란한 도성 소돔을 유황불로 벌하실 때에도 아브라함에게 "그 열 사람을 보아서라도 멸하지 않겠다"(창세 18, 32)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永福之功, 求得之功, 下恤之功, 補贖之功, 이 선행의 네 가지 효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의 공로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통공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세운 공로로는 육신과 영혼에 필요한 은혜를 청하는 구득지공과 이미 사함을 받은 죄의 잠벌을 면하게 하는 보속지공만이 다른 신자들에게 통공될 수 있습니다. 영복지공과 하휼지공이 당사자에게만 유효한 것은 의로우신 하느님께서 당사자가 직접 행한 바에 따라 그 사람에게 보답하여 주시며(묵시 22, 12),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각자가 회개 등의 필요조건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회개없이 다른 사람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누구의 죄사함을 받도록 기도하는 것은 그로 하여금 회개하는 은총을 얻도록 하여 죄사함의 은혜를 받도록 기도한다는 의미이며 이것은 구득지공에 속한다고 하겠습니다.
이상에서 살펴 본 통공이 지상교회와 천상교회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 지는지를 교회의 전통교리에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전투를 하는 교회인 지상교회는 교회의 전례와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얻게 되는 교우들의 공로를 앞에서 예를 든 바와 같이 기도와 선행을 통하여 나누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를 위하여 미사지향을 드리며 자신의 희생을 특정한 지향으로서 수행함으로써 선행으로 받게 되는 공로를 그 지향에 양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 안의 생활은 바로 교회가 살아가야 하는 나눔과 희생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 하겠으며 모든 신자들이 따라야 하는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또한 지상의 교회는 승리한 천상교회에 있는 성인 성녀들을 공경하고 그들의 전달(대신 우리를 위하여 기도함)을 청하고, 그들은 무수한 죄의 유혹과 불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악의 세력과 싸우고 있는 우리를 위하여 은총을 빌어주고 자시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수 많은 악의 세력과 싸우다가 하느님의 영원한 복락을 차지한 성인 성녀들이 어찌 그분들의 모범을 따르려는 우리에 대하여 무관심하겠습니까? 또한 세상에서 보속을 다하지 못해 잠벌의 단련을 받는 천상교회의 교우들은 자신들이 공을 세울만한 자유 기간을 이미 다 넘겼기에 자신들의 단련 기간을 덜거나 단축시키기 위한 무슨 선행이나 기도를 할 수 없기에 한 신비체의 지체를 이루는 지상교회의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기도와 선행을 바침으로서 그들과 통공을 합니다. 사실 이들은 우리와 아무 인연이 없는 이들이 아니라 우리의 부모, 형제, 친척, 친구들이며 우리와 함께 지상교회의 교우였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도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또 한 지체가 영광스럽게 되면 다른 모든 지체도 함께 기뻐하지 않겠읍니까?"(1 고린 12, 26)라는 말씀을 통하여 교회 안의 모든 교우들이 결합되어 있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교회는 공적으로 11월 2일을 모든 위령의 날로 정했으며 11월 한 달을 위령의 날로 삼아 죽은 모든 위령들을 위하여 특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2세기의 떼르뚤리아누스도 "기일이 되면 우리는 죽은 이들을 위하여 봉헌한다"고 증언하였고 사도 시대로부터 전해 내려 오는 모든 미사 경본에도 연옥 영혼을 위한 기도문이 항상 있어 왔습니다. 예전부터 신자들은 죽은 영혼이 으례 연옥에 있으려니 하고 미사를 드렸습니다. 또한 금세기 초 파티마에 발현하신 성모께서도 "연옥 영혼을 돌보시며 가장 버림받은 영혼을 돌보소서"라고 기도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교회는 예로부터 자신의 모든 선행의 보속공로를 전부 연옥 영혼을 위하여 사양하는 것을 "영웅적 행동"이라고 칭송해 왔던 것입니다.
심 화
지금까지 우리는 천상교회의 지상교회의 통교라는 주제하에 지상교회와 천상교회가 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신비체의 지체로서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나누는 모습을 "성인들의 통공"이라는 전통교리로서 살펴 보았습니다. 이 성인들의 통공에 대한 과거의 전통교리는 믿을 교리로서 오랜 세월 동안 교회 안에 전해 왔습니다. 그러나 현대를 사는 우리는 이 교리를 새롭게 이해하여야 합니다. 이 교리가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시대적인 상황하에 이루어진 이 교리에 대한 이해로 인하여 개인주의적이고 내세구원에 치중한 그릇된 신심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살아있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현세 안에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고 그 가르침에 따라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이룩하여 가는 역동적인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과거 통공에 대한 그릇된 이해는 하느님의 은총이 현실 경제에서 통용되는 물질 - 자본처럼 포착가능하고 교환가능한 것으로 잘못 파악하여 온 경향이 있습니다. 죽음 이후까지 통공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견해는 정당한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통공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자비는 사람들의 선행이나 기도로서 계산되어 교환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통공에 대한 그릇된 이해는 지금 여기서 마땅히 이루어져야 하는 통공에 해하여 소홀하게 만들며 지금 여기서 이루어야 할 공동체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기도와 선행으로 자기 영혼의 구원을 얻는 일에만 관심을 두게 하여 결국 다른 이들을 자기자신이 구원받기 위한 도구로 삼는 듯한 신앙생활을 초래하였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의 전통은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이루시는 나눔의 행위가 모든 성인들의 통공이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 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 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 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 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 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 갔다... 그 많은 신도들이 다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은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며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신도들은 모두 하느님의 크신 축복을 받았다.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 앞에 가져다 놓고 저마다 쓸 만큼 나누어 받았기 때문이다"(사도 2, 42, 44-47 ; 4, 32-35).
응용 실천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보여주는 이 통공의 모습은 바로 나눔과 용서입니다. 나눔은 자선과는 다른 것입니다. 자선은 베푸는 자와 베품을 받는 자가 정해져 있고 자선으로 말미암아 베품을 받는 가난한 사람이 물질적으로는 다소 풍요해진다 하더라도 인격적으로 소외된 채 남아 있으나, 나눔은 베푸는 자와 베품을 받는 자의 인격적인 일치를 추구합니다. 즉 자선과 나눔의 차이는 가난한 이들과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과의 공동체를 추구하는 나눔이 자선으로 그치지 않으려면 용서로 이끌려야 합니다. 용서는 어떠한 행위이든지 사람들을 갈라놓지 않고 공동체의 형제로 받아들임으로써 일치시켜 통공을 이루는 선행을 의미하며, 서로가 서로를 조건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주는 용서야말로 실질적인 사랑이요, 적극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없이는 교회의 통공은 있을 수 없으며, 이 사랑은 하느님께서 무조건적으로 베푸시는 사랑의 체험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즉 여러분도 세례를 받음으로서 하느님께 받아들여졌다는 체험을 간직하게 되고 그 체험에서부터 자발적인 나눔과 용서를 베품으로서 교회의 통공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여 나눔과 용서로 공동체를 이루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자발적인 나눔과 용서는 절대적인 신앙인의 삶인 것입니다. 세례만 받았다고 해서 모두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고 하느님의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맞갖은 삶을 살아야 구원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내 주위의 이웃들에 대한 이러한 나눔과 용서는 죽은 이들의 영혼에 대하여서도 이루어져 왔던 것이 교회의 전통이었습니다. 죽은 이들을 위한 교회의 청원기도는 우리가 이웃을 망각하고 자신만을 구원하려 하지 않으며, 우리는 이웃을 그리고 이웃은 우리를 서로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통공의 한 모습이며 사랑의 선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하여 그들이 사랑이신 하느님께 받아들여졌음을 믿고 그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죽은 이와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나눔과 용서의 삶이 이어지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로서 통공을 이루는 우리는 기도할 때 현세 기복적인 자세로서가 아니라 이웃을 위하여, 그가 지향하는 바를 나 자신의 나눔과 용서의 삶으로 보태겠다는 나 자신의 노력이 병행되어야 하겠습니다.
마 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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