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성사> 도 입
세상에서 물만큼 소중하고 귀한 것이 없다. 물은 생명과 직결되기 때문이고 더러움을 깨끗이 하는 까닭이다. 그러기에 동양의 고전인 「道德經」에서 老子는 '上善若水'라고 했다.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만물과 다투지 않고, 모두가 가기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은 만물에 생기를 주고, 더러운 곳을 깨끗이 정화시킨다. 그래서 물은 오래 전부터 생명의 근원이요, 정화의 상징으로 이해되었다. 그런 이유로 해서 동서를 막론하고 종교예식이나 더러움을 씻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인류의 중대한 관습으로 남아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제사를 지내거나 중대한 일에 앞서 목욕재계하는 관습을 통해 물의 의미와 물로 씻는 뜻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세례 역시 물로 씻는 예절을 뜻한다. 그러나 세례는 인류 풍습 속에 담긴 의미에 머물지 않는 독특한 뜻이 있다. 세례 성사는 과거의 잘못과 죄악을 모두 씻는다는 의미와 죽음에서 생명에로 새롭게 탄생한다는 부활의 뜻을 함께 담고 있는 것이다.
전 개
1. 세례를 받는다는 뜻
세례를 통해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뜻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에 속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세례는 자신의 전인격을 그리스도께 투신하는 예식이며, 새로운 생명을 얻는 입문 예식이다. 자기를 위해서, 또는 자녀를 대신해서 세례를 청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다. 또한 세례는 자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공동체의 책임에도 참여한다는 의미이다.
2. 요한의 세례 - 세례는 회개
세례는 회개의 행위이다. 달리 말하자면 세례는 겸손과 진리의 행위이다. 세례를 처음으로 베푼 사람은 예수가 아니라 세례자 요한이었다. 이스라엘의 요르단 강에서 요한이 세례를 베풀 때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왔다. 몰려왔던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잘못과 죄를 인정하고 회개했다. 그들은 자신이 하느님 앞에 보잘 것 없는 존재라고 인정했고, 정직하게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겸손했고 진실했다. 탐욕과 자기 중심주의의 생활 태도에서 더불어 사는 공동체적 삶으로 회개한 것이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다. 요한은 사람들의 철저한 삶의 태도 변화를 내다보았다. 그래서 군중들이 요한에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하고 물어왔을 때, 단순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 "옷과 음식이 없는 이들과 서로 나누어라. 불의하고 부당한 이익을 탐하지 말아라. 서로를 속이지 말고, 착취하지 말며, 폭력을 포기하라"(루가3, 10-14참조).
이런 모습으로 생활한다면 그 사람은 이전의 모습에서 새롭게 탈바꿈한 사람, 곧 새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행하는 세례성사는 그 이상의 뜻이 담겨있다.
3. 세례를 받은 예수
예수는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요한에게 세례를 청했다. 사실 예수는 요한이 베푼 세례의 의미를 받아들였다. 메시아요,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가 사람의 세례를 왜 받았는가 ?
예수가 세례를 받은 뜻은 자신이 참으로 인간이라는 사실을 드러낸 행위요, 비참한 처지에 놓인 우리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예수는 세례를 통해 자신을 겸손하게 고백한 것이다.
예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하느님으로부터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하는 말씀을 듣고 성령을 받았다(루가 3, 21-22). 예수는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아들', '성령께서 기름부은 자(그리스도, 메시아)'로 선포된 것이다. 이때부터 예수는 더 이상 자기 자신, 그리고 자기 가정에 속하지 않고, 인류 전체에 속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의 공생활은 시작되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
예수는 요한의 세례를 넘어섰다.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는 죽음에서 부활로 넘어가는 세례이다. 이는 곧 구약의 빠스카(지나감, 넘어감)의 뜻이고,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되살아 남을 의미하는 세례이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하면서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 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운지 모른다'(루가 12, 50)고 했다.
이 세례는 피의 세례이다. 이 세례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피와 죽음으로서 증거한다는 의미이며, 사람은 혈세로도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에 동참하게 되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게 된다. 또한 이 세례는 열망의 세례, 즉 火洗이다. 예수는 자신의 이러한 세례를 간절히 바랬다. 이 세례는 그리스도의 복음, 즉 하느님 나라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하고자 하는 의미의 세례이다. 세례성사는 이 두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예수의 세례를 통해서 죄와 죽음의 승리자로서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예수는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세례로 초대하고 있다.
5. 성령과 불의 세례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다'(마태 3, 11)라고 말했다. 예수는 성령으로 세례를 준다. 성령을 줌으로써 분열된 세상 안에서 사람들 서로를 일치시켜 주고,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한다. 예수는 불로 세례를 준다. 그 불은 우리 안에 있는 악함과 이기심, 오만을 불태우고, 세상의 죄와 우상들을 불사르며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우리의 마음에 불을 지르기 때문이다. 세례를 통해 예수는 우리를 자신의 죄, 세상의 죄에서 해방시킨다.
6. 믿음의 고백
세례는 믿음을 고백하는 행위이며 그 행위를 보증해 주는 예식이다. 그래서 세례는 사람들의 겸손을 통해 참된 뉘우침(회개)을 드러낸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은 세례를 통해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죄인임을 겸손되게 인정하고, 기쁜 소식인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삶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람들의 이러한 믿음을 통해 다가오시고, 우리를 올바르게 인정해 주신다.
7. 새로운 삶의 태도, 새 사람
우리는 세례로 새 사람으로 태어난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영원한 삶을 살게 되는 까닭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겸손하게 자기 자신에 대해 죽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고,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고 새 생명을 얻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세례는 자기 이기심과 탐욕이라는 죽음의 길에서 서로 나누고, 서로 섬기는 생명의 길로 들어서는 결단이며 삶의 태도의 변화이다.
우리는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며 그리스도인이 된다. 이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 공동체에 들어온다는 뜻이다. 서로 나누고, 섬기는 새로운 삶의 태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느님 백성이 되고, 그리스도 몸의 지체가 되며 살아 계신 성령의 궁전이 되는 것이다. 죄와 악으로 비참했던 「낡은 인간」에서 벗어나, 죄와 악에서 해방된 「새사람」으로 형제들과 더불어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한 몸을 이루게 된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 백성으로써 취소될 수 없는 탁월한 존엄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8. 인호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서 예수가 요르단에서 세례를 받았을 때처럼 하느님으로부터 '너는 내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말씀을 받는다. 예비자는 이 하느님 말씀에 대한 응답, 곧 신앙고백을 통해 하느님과 공동체에 한 몸이 된다. 하느님 말씀은 우리를 조건없이 용서하고, 자녀로 삼으며, 당신 아들을 보내 우리를 구원하고, 성령을 우리에게 주는 하느님의 증언이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지워지지 않는 도장(인호)을 찍어 놓는다. 그리고 하느님은 당신 말씀을 취소하지 않는다. 세례성사의 신앙고백을 통해 우리는 영원히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세례는 두번 받을 수 없다.
9. 신앙고백
세례 때 공동체는 예비자에 앞서 신앙고백을 하고, 예비자는 하느님과 공동체 앞에서 신앙고백을 한다. 이 신앙고백은 자신의 죄와 악, 그리고 사탄의 삶을 버리고 하느님, 곧 생명의 삶을 믿는다고 선포하는 것이며, 이로써 같은 믿음을 걸어온 공동체의 동료와 결합하게 된다는 의미를 지닌다.
10. 세례예식의 기본 요소
세례의 주된 행위는 세 가지 기본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즉 예비자를 물 속에 잠그는 것(아니면 머리에 물을 붓는 것)과,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세례를 줍니다"하는 성사 주례자의 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말을 받아들이는 예비자의 신앙과 공동체의 신앙(특히 어린이의 세례에 참석한 부모들이 표명하는 신앙)이다.
세례는 「재생의 목욕」이라고 불린다. 물에 잠기는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도록 하며, 물에서 나오는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물은 깨끗하게 하는 것이며, 생명을 상징한다. '물'에는 세례를 증명하는 말씀의 의미와 또 믿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말씀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세례는 「신앙의 성사」라고 불린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빠스카이다. 그래서 교회는 어른들의 세례를 부활전야(빠스카의 밤)에 거행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한다.
11. 보충예식 - 성유바름, 흰옷, 촛불
세례성사의 세 가지 보충예식이 엄밀한 의미에서 세례를 분명하게 해준다. 크리스마 성유(주교가 축성한 향유)를 바름은 주교가 주게 될 견진을 예고한다. 왜냐하면 본래 그리스도 입문의 성사(세례성사, 견진성사)를 같은 예식 중에 예비자에게 준 것은 주교였기 때문이다. 영세자에게 흰 옷을 입히는 것은 주님 안에 새로운 생명의 선물을 받은 것을 상징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습니다"(갈라 3, 27)라고 성 바울로가 말했다. 이 옷은 모습을 변화시켰던 그리스도의 옷처럼 흰색이다. 세번째 예식은 빠스카 초에서 불을 켠 초를 받는 것이다. 주님께서 빛을 주신다는 의미이다 : "지금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이제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빛이 되었습니다)(에페 5, 8). 그래서 세례를 「조명」이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세례를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빛 속에서 걸어가야 하고 또 그 빛을 비추어야 한다. 우리는 매년 빠스카 축일 밤에 빠스카 초에서 불을 켠 초를 들고 우리가 이 빛 속에서 살고 있고,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깨어 지키며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상기한다.
12. 세례의 주례자
세례의 주례자는 주교, 신부, 부제이다 (세례자의 생명이 위급한 비상세례의 경우에는, 성실하게 교회의 뜻대로 세례를 주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이 주례자가 된다).
13. 대부와 대모
대부와 대모는 공동체의 증인이다. 그들은 확신을 가진 그리스도인이어야 하고, 그들 자신이 세례와 견진을 받았어야 한다. 그들은 부모와 함께 자신의 모범과 충고로써 평생을 통해 세례자의 신앙을 돌보아 주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
14. 어른들의 세례
성인들의 세례는 예비자 때에 긴 시간을 두고 준비하게 된다. 여기에는 예비자의 세례요청이 성숙하고 또 그의 원의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가르치는 교리로 밝혀질 수 있을 만큼 필요하고도 충분한 모든 시간을 할애한다. 이 교리는 점점 더 밀도 짙게 행해지는 단계적 준비의 절차를 따른 예식을 수반한다. 이 예식은 모든 사람들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회개한다는 것을 명백히 드러내기 위하여 보통 사순절 시작 때 그리고 공동체 전체의 참회예식 중에 거행된다.
15. 어린이들의 세례
어린이의 세례를 위하여 교회는 부모들에게 그에 합당한 준비를 하도록 요구한다. 이것은 부모들에게 이루어진 믿음의 은총이 그들 자녀의 신앙을 교육시키기 위하여서도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 더욱 잘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이다. 왜냐하면 어린이의 의식 안에 잠들어 있는 신앙은 그의 지성과 심성이 태어날 때부터 깨어난다. 어떠한 교리교육도 어린이가 십자성호를 긋는 것을 배우거나 자기 부모에게 옹알거리기 시작할 때부터 하느님 아버지께 말하는 것을 배우는 어린이의 초기 행동에 따른 그 교육을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기 자녀에게 세례를 주도록 하는 것은 그의 신앙 생활에 함께 하겠다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의 뜻을 거스려 어린이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어린아이는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태어난다. 그 어린아이가 교회 공동체에 받아들여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가?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마치 어린이들을 부르시지 않은 것처럼 어른들에게만 유보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제자들이 어린 아기들까지 예수께 데려와 축복해 주시기를 청하는 사람들을 꾸짖었을 때, 예수는 이렇게 말씀했다 :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하느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잘 들어라.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맞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가 18, 15-17).
어린아이들의 세례는 하느님 선물의 無償性을 강조한다. 공동체의 책임, 특히 부모의 책임은 매우 크다. 어린이들이 받은 하느님의 생명은 그 어린아이를 둘러싼 사람들의 증거와 지원 없이는 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종 합
세례는 예수가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온전히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 맡김으로써 부활의 영광에 이른 것과 같이, 우리도 헛된 욕망과 세상의 죄악에 대해 오직 그리스도만을 우리의 가치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은총을 입게 되는 성사이다.
이와 같이 세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몸이 되며 다른 성사를 받게 되는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이다. 세례성사는 한 번만 받을 수 있고, 이 성사로 우리의 영혼에 하느님의 도장이 찍히게 된다.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전생애와 존재의 근거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두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생활 안에서 그분을 증거할 사명을 띠고, 세상에 하느님 나라가 임하도록 봉사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심 화
성 레오 대교황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 "그리스도인이여, 너의 존엄성을 의식하라. 너는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였으니 네 잘못과 과거생활로 되돌아가 타락하지 말라. 네가 어떤 머리에 속해 있고 어떤 몸의 지체인지 기억하라. 너는 네가 하느님 나라와 광명에로 들어 가기 위해 암흑의 세력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상기하라."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서 취소될 수 없는 존엄성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존엄성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의무와 사명을 동시에 부과한다. 즉, 새로운 삶의 태도를 공동체 안에서 구체화시키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세례성사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삶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을 그 기반으로 한다. 이 새로운 삶의 태도란 바로 섬김과 나눔의 생활이다. 섬김과 나눔의 생활은 물질에 대한 태도와 이웃에 대한 태도를 공동체를 향하여 결정하는 기준이다. 즉 탐욕과 자기 욕망을 실현하려는 죄의 삶에서 함께 더불어 사는 공동체 생활로 전향함을 뜻한다.
형제와 자매들인 이웃을 하느님처럼 섬기는 생활,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준 재물과 물질을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에게 능력에 따라 필요한 것을 나누는 생활, 바로 이것이 섬김과 나눔의 새 생활이다. 지나온 삶에 대한 회개와 영원한 삶(참된 해방)에 대한 믿음, 그리고 사랑에 대한 실천은 공동체 안에서 이 나눔과 섬김으로 드러난다. 우리는 이때에야 비로소 '세상의 빛이요, 소금'으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 주 천주여, 그들의 귀를 열어 주시고 마음을 감동시키며 주님의 자비를 베푸시어, 그들로 하여금 재생의 세례로 모든 죄의 사함을 받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살게 하소서.(침묵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천주여, 새로운 자녀들로 성교회를 항상 번성케 하시오니, (우리)예비 교우들의 믿음과 깨달음을 완전케 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성세의 물로 재생하여 주의 자녀들 무리에 들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성체성사
우리 가정에서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은 언제입니까? 아마도 직장이나, 학교 등 흩어졌던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을 먹는 그 시간이 아닐까 합니다. 함께 음식을 먹으며 그 날 하루 중에 있었던 여러 일들을 이야기하고 서로의 일과에 동참하며 서로의 기쁨과 고통에 한 마음이 됩니다. 이 식사시간을 통해 한 가족이 일치와 유대를 유지해 갑니다. 친구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정을 나누고 일체감을 다질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아마도 함께 음식을 나누는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직장이나 여러 단체에서 왜 회식을 자주하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 육신 생명을 지탱해 나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먹고 마셔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육체는 점차로 약해져서 마침내 죽음에 이를 것입니다. 인간은 음식을 먹고 물을 마셔야만 힘을 얻고 육신생명을 지탱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신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적 생명은 오늘 우리가 배우고자 하는 천상양식인 주님의 몸인 성체를 받아먹음으로써 성장하는 것입니다. 좀 섬뜩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사가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의미를 요한복음 6장을 통해 알아봅시다.
1.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사
* 성서 : 요한 6, 22-58 낭독
요한 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이 보리 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 천명을 먹이신 일을 본 많은 사람들이 매료되어 예수님을 찾아 나섰지만, 예수님은 "만일 너희가 네 살을 먹고 네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라는 말씀에, 사람들은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먹으라고 내어줄 수 있단 말인가"하고 수군거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갔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기적만을 보고 매료되어 온 사람들에게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애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쓰라고 하시면서,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다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 온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하시며, 당신 자신을 바로 그 영원히 살게 할 양식인 '생명의 빵'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주변에서 보면 장수나 건강비법 등에 관한 책이나 약 등은 아주 잘 팔린다고 합니다. 또 몸에 좋다는 약초나 청심환 등은 기십만원에 팔린다는 신문보도도 있습니다. 권력의 대명사처럼 전제군주의 상징적인 존재로 불리고 있는 '진시황'도 영원히 죽지 않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3천명의 동남 동녀를 선발하여 불로장생의 약을 구해오도록 명령하여 떠나보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만일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이 있다면 온갖 노력을 다 동원하여 그것을 얻으려고 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영생을 주는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오늘도 미사 중에 주님의 식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받아 모시는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 안에 현존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체는 곧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고 미사 중에 사제는 누룩이 들지 않은 빵을 하느님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되게 하며, 신자들은 이 빵을 먹음으로써 주님의 몸을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성체란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를 받아 먹는 것을 말합니다. 성혈은 '그리스도의 피'를 말합니다. 미사 중에 사제는 포도주를 주님의 피로 변화시키며, 신자들은 이 포도주를 받아 마심으로써 주님의 피를 마십니다.
결국 성체성사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사입니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주님의 식탁에 모여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 육신 생명이 음식을 먹고 지탱해 나가듯이 영적 생명은 천상양식인 주님의 몸을 받아 먹음으로써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2. 구약의 빠스카
유다인들에게는 나름대로의 특별한 의식을 갖춘 식사 예식이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자기들을 에집트로부터 해방시켜 주신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을 기념하고, 구원을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백성이 되기 위하여 해마다 빠스카 축제기간 동안에 특별한 의식을 갖춘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이 식사는 또한 유다인 각 가정에서도 매 안식일마다 간략하게 거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로는 그들의 회당에 모여 빠스카 축제를 거행했고, 이 유다인의 전통은 오늘날까지도 지켜오고 있습니다(출애 11-13장).
성서를 가지고 오신 분은 구약성서를 출애급기 12장 1절부터 14절을 펴보십시오. 구약의 빠스카 기념제는 출애급기 12장 1절부터 14절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출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명령했습니다. 즉 어린 양을 잡아, 피는 문설주와 상인방1)에 바르고 고기는 불에 구워서 누룩 없는 빵과 곁들여 먹도록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피 묻은 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표로 아시고 그냥 지나치시고, 그렇지 않은 집의 장자를 모조리 죽이심으로 이스라엘을 에집트에서 구출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지나치시다'라는 의미가 '빠스카'라고 표현되는 것입니다.
유다인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조상들이 모세에 의해 에집트의 노예상태에서 해방되어 광야를 걸어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된 역사가 신앙의 원점이 됩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선택하셔서 특별히 지켜주셨다는 것을 자손 대대로 전함으로써, 그 추억이 또한 지금의 고통을 견디어 낼 수 있는 힘을 주어 하느님이 반드시 도와주신다는 희망을 가지게 했던 것입니다.
또한 출애급기는 사막 가운데서 모세가 허기진 백성에게 만나라고 부르는 양식을 준 이야기가 출애급기 16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 시대에도 로마가 점령해서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고 일을 열심히 해도 부유해지지 않고 매일의 생활양식이 모자라 허기로 고생하고 있는 유다인들에게는, 저 모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그와 같은 힘 있는 지도자가 나타나서 자신들에게 양식을 주고 생활의 평안을 가져다 줄 것을 바라며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3. 신약의 빠스카 - 성체성사 건립
예수님은 공생활 3년을 마칠 무렵 그 당신의 관습대로 예루살렘에서 빠스카 축제를 지내려고 하셨습니다. 루가 복음 22장 15절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시고 마지막 만찬, 최후의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하기로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만찬 도중에 누룩이 들지 않은 빵을 먹는 예식을 하시다가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받아 먹어라, 이는 네 몸이니라"하고 말씀하십니다(마태 26, 26). 그리고 식사를 마치시고 포도주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올리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네 피를 흘리는 것이다"(루가 22, 20)하시며 제자들에게 "나를 기념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시며 마시도록 권하셨습니다.
자, 그럼 실제로 성서를 읽어 봅시다. 누가 루가복음 22장 14절부터 20절까지 읽어 주십시오. * 루가 22, 14-20 ; 마태 26, 26-30 ; 마르 14, 22-26 ; 1고린 11, 23-25
이렇게 최후 만찬 때 예수님은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새로운 계약을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것입니다. 사도들에게 빠스카 축제를 같이 하기로 한 이유는 마태복음 26장 28절에서 나온대로 "죄를 용서해 주기 위함" 즉 모든 이의 죄 사함을 위한 새로운 계약에 제자들을 참여시키고 그들 제자들로 하여금 '이 예를' 영속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체성사는 영적인 생명을 위한 양식이고 천상의 빠스카 잔치의 전신입니다. 구약의 빠스카와 신약의 빠스카(최후의 만찬)를 비교해 보면 그 뜻이 확실해 집니다.
구약의 빠스카 |
신약의 빠스카 |
어린양의 희생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 |
양고기 (음식) |
그리스도의 몸 (빵, 음식) |
양의 피(해방의 표시) |
그리스도의 피(포도주, 새로운 계약) |
노예생활에서의 해방(육체적) |
죄와 죽음에서의 해방(영생) |
이렇게 비교해 볼 때 예수님이 베푸신 '최후의 만찬'은 유다인들의 빠스카 기념 식사와 같은 형식의 것이지만, 예수님은 이 거룩한 식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십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전통적인 예식을 빌어서 제자들에게 최후의 만찬을 베풀어 주시고, 그것을 신약의 중심예식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은 신약의 준비이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완전한 해방, 즉 죽음과 죄에서 벗어난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신약에서 자신의 몸과 피를 제물로 바쳐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 희생되시고 '모든 사람들의 죄 사함을 위해' 자신의 몸과 피를 제물로 바쳐 영적 양식으로 우리에게 남겨 주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신약에 참여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의 혈제를 피 흐르지 않는 제사 즉 빵과 포도주의 형태 안에 스스로 제물로 바친 것이 바로 미사성체(성체성사) 입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당신의 구원사업을 기념하며 당신의 부활로 가져다 주실 새 생명에 참여하게 하기 위하여 언제까지나 함께 모여 식사를 나누기를 원하신 것이고, 바로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빠스카 잔치이자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제사인 미사입니다.
4. 초대교회 신자들의 생활의 중심인 미사
초기 교회에는 신자들이 이 거룩한 미사를 거행하기 위해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일요일, 주일, 주님의 날)마다 저녁에 함께 모여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신자들은 각기 음식을 장만해 가지고 와서 함께 나누어 먹고, 가난한 이들에게 줄 몫을 따로 떼 놓았습니다. 이 예식에 참여한 신자들은 주님의 몸과 피로 변화된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심으로써 서로 형제적 사랑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충만하게 나누고 일치를 체험했던 것입니다(1 고린 11, 23-26 ; 사도 2, 43-47).
그 한 예를 살펴봅시다.
서기 303년 2월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 영토 전역에 그리스도교의 모든 경신예배 모임을 분쇄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 북 아프리카에서는 이 명령이 유달리 잔인하게 실행되었습니다. 서기 304년 2월 12일 카르타고에서 남자 31명, 여자 18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재판소에 넘겨져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주일에 옥타비우스 펠릭스라는 교우의 집에서 미사성제를 봉헌하려고 모였다가 체포되었던 것입니다.
재판관이 피고 몇 사람에게 "왜 그대들은 황제의 율령을 어겼는가?"하고 물으니 저마다 "나는 그리스도 신자입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재판관이 짜증을 내며 "그건 나도 알고 있다. 왜 한 자리에 모였느냐 말이다"하고 물으니, 피고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님의 성찬을 위해 모이지 않으면 그리스도 신자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미사성제를 금하면 교회생명의 급소를 찔러 치명적인 타격을 준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신도들도 그 혹독한 박해를 당하면서도 미사에 참례하기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밤중에 수십리를 또는 수백리를 산길로 걸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미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핵심적인 것이고, 미사의 공동참여에 무관심해지면 신앙생활도 부실해지게 마련이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미사가 초대교회 때부터 그리스도 신자 공동체의 중심이었습니다. "이 예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가톨릭 교회는 오늘날까지 세상 어디서든지 사랑과 신뢰와 신앙으로 미사를 거행해 왔습니다.
5. 기념제사인 미사
유다인 가정에서 빠스카 만찬을 들기 위해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 앉으면 제일 나이 어린 막내동이가 "왜 이 밤은 다른 날 밤과는 다른가요?"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가장인 아버지는 이렇게 설명해 주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만찬을 들면서 하느님을 찬양하며 감사를 드린단다. 그 까닭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에집트에서 해방시키고, 시나이 산에서 우리와 계약을 맺으시어 당신 백성으로 삼으시고, 이 땅을 우리 백성에게 주셨으니, 장차 언젠가는 온 세상을 당신 친히 다스리시겠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념 만찬례를 엄숙히 지낸단다."
이처럼 어린이가 "주일에 사람들은 성당에서 무엇을 하나요?"하고 물으면, 어머니는 우선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최후만찬 때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예식을 올린단다."그리고 예수께서 유다의 배반으로 붙잡히시기 전에, 마지막 이별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축복하여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당신이 죽으신 다음 같은 예식을 끊임없이 올리며 당신을 기념하라고 명하신 경위를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미사에서 무엇을 기념합니까? 일반적으로 '기념'이란 말은 지난 일을 회상하거나 기억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사로써 최후만찬을 기억하는 것만이 아니고 그 만찬이 현재에 재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기념이란 바로 '과거의 사건을 현존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이 '과거의 사건'이란 바로 주님의 만찬과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신자들은 세례를 받아 신앙인 공동체에 받아들여진 즉시 성체를 받아 모셨습니다. 이처럼 세례를 받고 처음으로 성체를 모시는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생명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가장 강력하게 상징합니다. 성체는 세례로 다시 태어나 하느님의 왕국에 들어가기까지 계속해서 재현되는 주님의 부활이요 그분의 임하심입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예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시면서 하시던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라는 말씀을 듣고 나서 즉시 이렇게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는 주의 죽으심을 전하며 주의 부활하심을 굳세게 믿나이다."
교회는 미사에서 주님이 행하신 바를 그대로 행하고, 그럼으로써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기념합니다. 이 기념제는 다양한 의미를 가진 신비의 보물창고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제단을 중심으로 모여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그 가운데 예수께서 현존하시어 당신 자신을 영적음식으로 내어주시는 회식이요, 또 한편으로는 예수께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인류를 하느님께 새로 결합시키는 새로운 계약의 제사인 것입니다. 원래 십자가의 희생은 그리스도가 인류구원을 위해 스스로를 제물로 봉헌했기 때문에 봉헌자도 제물도 그리스도 이십니다. 따라서 남을 위해, 남의 속죄를 위해 바치는 희생제물이 참다운 봉헌이고 참다운 제사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제물을 참례자들에게 도로 내려주시어 함께 '받아 먹게'함으로써 제사와 식사가 연계되어, 참례자들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또 서로간에 하나가 되게 하는 일치의 성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자, 그럼 이 일치의 성사인 성체성사가 이루어지는 미사의 구조를 살펴보겠습니다.
6. 미사의 구조
앞서 나누어 준 유인물을 참조하시면서 설명을 들어 주십시오. 미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한 예식이므로 이를 세분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는 미사를 크게 '말씀의 전례' 부분과 '성찬의 전례'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습니다. 유인물은 그것을 좀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설명을 한 것입니다.
1) 말씀의 전례
말씀의 전례부분은 미사의 개회인사로부터 신자들의 기도를 바치는 데까지 입니다. 이 부분을 말씀의 전례라고 하는 이유는 '말씀'이 이 예식의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란, 하느님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들려 주시는 말씀과 우리가 드리는 말씀, 우리끼리 서로 나누는 말씀 등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어야만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신자들의 일치도 이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동안에 노래를 부르며 앉거나 서거나 하는 것은 그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경건하게 들으려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모름지기 말씀을 들음으로써 이루어지는 내외적 성숙을 인식해서 미사의 시작부터 경건한 마음으로 참석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2) 성찬의 전례
성찬의 전례라 해서 말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부분의 주된 의미가 주님의 마지막 만찬을 재현하고 공동식사를 하는 일이기에 그렇게 부를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강조해야 될 점은 '거룩한 변화'와 '영성체'입니다.
사제는 빵과 포도주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과 피가 되게 합니다. 사제가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려주는 순간, 즉 빵을 들고 "이는 네 몸이다"하고, 포도주를 들고 "이는 네 피이다"하는 순간은 바로 그리스도의 현존의 깊이가 체험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한, 빵과 포도주는 겉으로는 여전히 빵과 포도주로 보이더라도 그 실체는 이미 주님의 몸과 피인 것입니다.
또한 미사에 참여한 세례받은 신자들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잔치집에 온 사람이 거기 모인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지 않는다면 그는 어디서 그 공동체와의 일체감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자들은 미사에 참여한 세례받은 신자들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먹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잔치집에 온 사람이 거기 모인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지 않는다면 그는 어디서 그 공동체와의 일체감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자들은 미사에 참여할 때마다 몸과 마음을 합당하게 준비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먹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준비란 성체를 받아 모시기 전에 자신을 반성하고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마음으로 감사하게 받아 모셔야 합니다. 그리고 대죄가 있을 경우, 고백성사로 깨끗이 죄를 용서받고 성체를 모셔야 하며 성체를 모시기 한 시간 전부터 공복제를 지켜야 합니다. 이 공복재란 성체를 모시기 한 시간 전부터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인데, 영신의 음식인 성체를 마음 안에 모시기 위해 육신의 배를 비워 둠으로써 주님을 모시고자 하는 열망과 흠숭의 예를 갖추는 것입니다. 단, 약이나 물은 허락되어 있습니다.
7. 기도 생활의 중심인 성체성사
사실 우리 신자들의 기도생활의 절정은 성체성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신자들은 성체성사가 거행되는 내용 자체에 포함된 모든 점들, 즉 함께 모임, 말씀을 들음, 기념함,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 자신을 바침을, 받아 먹음을 철저히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최고 형태는 분명히 공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곧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가 모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로서의 전례를 통해 드리는 기도입니다. 성체성사는 하나의 집회입니다. 그러기에 성체성사가 제정된 것은 우리가 이웃을 떠날 수 없으며, 이웃을 떠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이웃과의 유대를 되살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최고의 기도인 동시에 또한 이웃과의 사랑의 재일치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기도는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지만 그 어떤 기도보다도 튼튼하게 우리들을 그리스도와 결합시켜 주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결합되게 하는 것은 성체성사 곧 미사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체성사는 인종이나 문화나 사고방식의 차이를 넘어서 모든 신분, 계급, 교양이라는 차별을 철폐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주님의 한 식탁에서 나누는 친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함으로써 단순히 기억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현실적으로 참여하는 우리의 희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가 드리는 최고인 기도는 미사, 곧 성체성사이며, 성체성사는 기도생활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종 합
우리는 이제까지 성체성사의 의미를 배웠습니다. 성체성사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심으로써 사랑이신 그분과 일치하며 영적 생명을 성장케 하는 성사를 말합니다.
심 화
우리가 배운 이론뿐만 아니고 우리의 삶 속에서 성체성사가 제시해 주는 깊은 의미를 찾아 볼 수 있겠습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다 보면 밥술이나 먹게 되고 집칸이나 마련하게 되면 지난 날의 허기졌던 삶의 기억이나, 남의 집에서 셋방살이의 서러웠던 기억, 천대와 멸시를 받으며 얇은 임금봉투에 종살이 하던 기억을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마치 자신은 과거가 없이 살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또 그것도 남의 도움이나 형제의 희생없이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한 사람의 삶이 제 모습을 갖추는 데는 어미의 산고와 아비의 피 땀이, 그리고 형제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데 오늘 우리의, 비극이 분노와 절망이, 다툼과 불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분노와 절망 속에, 다툼과 불화 속에 방황하며 삶의 허기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이 미사 중에 밥상을 차려 놓으시고,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 주심으로 당신의 지극한 사랑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례성사를 받고 성체를 영하면서도 유다인들처럼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내어 줄 수 있단 말이가?"하며 그 의미를 알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는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린 지브란이라는 유명한 작가는 먹고 마심에 대한 글에서 한 가정의 밥상에 기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부모의 사랑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그 밥상을 통해 자식에게 부모의 피와 땀과 좌절을 기억하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에 자식은 매일 먹는 밥이 단순한 밥이 아니라 부모의 살과 피의 제물로 이루어진 것임을 깨닫고 부모의 사랑이 무엇인지,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매일을 감사하며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정말 잘 들어 주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내 피는 참된 음료이기 때문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요한 복음 6장에 나오는 이 말씀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분이 계시면 오늘 집에 가서 밥상에서 이 복음 말씀을 식구들에게 읽어 주십시오. 그러면 성체성사의 의미가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삶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응용 및 실천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제 우리가 배운 것들을 실천할 수 있는 사항에 대해 알아 봅시다.
(1) 성체성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현존은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그러기에 우선 신자들은 자주 영성체를 해야 합니다. 영적 성장에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신자들이 적어도 일 년에 한번 부활 축일을 전후로 하여 영성체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우리는 성체를 자주 영하여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깊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2) 성체는 미사가 끝난 후에는 보통 성당 내의 제단 위에 있는 감실 안에 모셔둡니다. 그래서 성체가 감실 안에 모셔져 있다는 것은 붉은 등, 즉 성체등이 켜져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자유롭게 성당에 나가 감실 안에 계신 주님을 방문하여,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개인적인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3) 교회는 성체성사 이외에도 성체 안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흠숭하고 성체께 대한 신심을 깊게 하기 위해 성체강복, 성시간, 성체거동, 크게는 성체대회 등의 행사도 거행하는데 신자들은 거기에서도 풍요로운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4) 성체를 영하기 전에는 영적, 육적인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고해성사와 공복제를 지키는 것뿐 아니라 경건한 마음을 지니기 위해 외적으로 단정한 자세와 옷차림에도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5) 무엇보다도 지극한 사랑으로 빵이 되어 오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생활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한 희생의 음식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체성사에서 드러나는 나눔과 친교와 일치의 성격을 생활 속에서 실천합시다. 그리하여 우리는 미사가 끝난 후에도, 미사에서 길러낸 힘으로 매일을 살아가면서 평범한 우리의 일상생활을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생활로 성화되는 것입니다.
마침기도
주여, 우리가 당신의 어지심과 인자하심에 의지하여 당신께로 나아가나이다. 병자가 구세주한테로, 배고프고 목마른 자가 생명의 샘으로, 가난한 자가 천국의 왕한테로, 종이 주인에게로, 조물이 조물주에게로, 위로가 없는 자가 진실한 위로자에게 나아가나이다.
우주 만물의 하느님이여, 당신은 아무 부족한 것이 없으면서도 성체성사로 우리와 더불어 사시고자 하셨나이다. 우리 마음과 몸을 조촐히 보존케 해주시어 특히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또 영원한 기념을 위하여 결정하시고 세우신 성사를, 즐겁게 깨끗한 양심으로 자주 영하고 또 영원한 구원을 위하여 영하게 하소서.
우리 구세주 하느님이여, 당신께 우리와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오니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소서. 당신은 성체와 성혈을 우리를 위하여 양식으로 준비해 주셨으니, 당신의 거룩한 이름의 영광과 찬미를 위하여 우리를 받아 주소서.
우리 구원이신 하느님이여, 당신의 성체를 자주 영함으로써 우리의 신심의 열정이 더욱 자라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