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밀한 묘사와 분위기 연출/김주혜
한 편의 시와 만날 때 나는 그것이 ‘정서의 자발적인 흘러넘침’만이 아닌 비유와 암시성, 그리고 다의성이 투명하게 전달되어 올 때 즐겁다.
더욱이 내가 쓴 시가 다른 이에게 그렇게 전달된다고 생각하면 그 행복감은 어디에 비할 건가!
시작과정에 들어서면 언어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그러나 처음 마음먹은 대로 시가 흘러 주는 것은 아니다.
내 의도와 시의 흐름과의 괴리가 생기면 생길수록 시는 관념적, 추상적으로 불투명해지고 그 전달력은 점점 잃고 만다.
마음에 드는 한 편의 시가 어디 그리 쉽게 얻어지랴. 연유로 퇴고라는 그 고통의 과정을 거쳐야 하지 않겠는가.
벼랑 끝에 선 기분! 두들겨 맞아 이미 녹초가 된 시를 앞에 놓은 채 어떻게 일으켜 세울까 고심하며 들여다보고 있을 때의 내 심경이 바로 그렇다. 시와 내가 한몸이 되지 않았을 때의 그 막막함이라니, 차라리 귀찮은 몸, 벼랑 아래로 던져 버리듯 시를 던져 버리고 자유롭고 싶다.
그만큼 퇴고가 어려운 일이며, 숫제 다시 쓰는 게 훨씬 쉬운 일이라는 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러기에 난 아예 시의 소재를 발견하면, 펜을 잡기 전에 얼마 동안 머리 속에서 굴리는 습관이 있다.
이러한 내 습관을, 한 친구는 과작이라고 좋게 말해 주지만 실은, 퇴고하기 싫어서 손쉽게 씌어질 것만을 골라 쓰는 나쁜 습관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 시의 대부분은 한두 번의 부분적인 손질로 끝나기 일쑤이다. 그러나 때로는 피를 말리는 듯한 안타까움 속에 전면전을 치루고 마는 작품도 있어, 고통과 성취의 갈림길에 선 채 혼신의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생활 속에 갇혀 나를 잊고 사는 날이 허다한 어느 날 우연히 과학 실험 실습책을 뒤지다가 현미경으로 양달개비 속의 염색체 수며 세포의 모양까지 샅샅이 들여다보는 눈을 보고 시로 만들어 보고 싶은 유혹을 받았다.
프레파라트 안에 갇힌 양달개비가 마치 일상의 방에 틀어박혀 있는 나로 보인 것이다. 그래서 ‘양달개비의 어린 꽃봉오리를 핀셋으로 헤치고’를 첫줄로 하여 어렵지 않게 한 편의 시를 얻었다.
양달개비를 위해
양달개비의 어린 꽃봉오리를
핀셋으로 헤치고
그 안의 꽃밥을 조심스레 따냈어①
슬라이드 글라스 위에
작은 꽃밥의 이마며 입술이며
목에 와 닿는 바람의 감촉까지
조용히 애무하듯 몸을 뉘었지.②
그 때부터 나는 작아지기 시작했어
이미 진드기, 톡토기, 털진디들에게③
내 살과 피, 그리고 뿌리까지
모두 내주었었지
그것도 모자란지 지난 늦봄
날카로운 해부침으로 터뜨려
프레파라트 안에 가두어 놓고는
그 속의 작은 염색체 수까지
헤아리는 거였어④
처음, 마이크로미터를 소중히
다루는 손동작에 감동해
한생애를 맡긴 내 믿음에
문제가 있었던 거였지
드디어 노랗고 불투명한 내 이성이
폭발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한 번도 퇴고하지 않은 채 급하게 동인지에 실었다. 그러나 득의 만만하던 나는 후에 활자화되어 나온 시를 보고 구성상의 미흡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거렸다. 부분 부분 언어화하는 과정에 많은 결함을 발견하였고 뒤늦게 성형수술의 메스를 들었다.
첫째, ①행과 ②행에 주체의 혼돈을 들 수 있겠다. 두 행은 서로 다른 주체인데도 구별이 애매하여 마치 두 행이 다 동일한 시적 화자인 것처럼 읽히고 있다. 보이지 않는 일상이라는 존재가 내 정신의 복제인 양달개비속으로 조금씩 파고 들어오는 것을 좀더 명확하게 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드러나 있지 않은 ‘그’를 밖으로 끌어내고 양달개비를 속으로 감추고 놓고 첫머리에 시작하니, 시의 상징성이 더욱 두드러지는 것 같았다.
내 어린 꽃봉오리를
핀셋으로 헤치고 그는
봉오리 안의 꽃밥을 조심스레 따냈어.
내친 김에 감정이 너무 노출된 흥분상태도 완만하게 하고, 함축적이지 못한 점도 보완하는 의미를 고려하여 리듬을 타기로 하였다. 연을 가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임은 부연할 필요가 없겠다. 하여, 위 3행을 첫연으로 하였다.
그리고 둘째 연 시적 화자의 능동상태(몸을 뉘었지)를 피동상태(뉘여지며)로 바꾸었다. 그런데 이것 봐라, 묘하게도 야한 냄새가 풍기는 게 아닌가. 이왕지사 분위기까지 연출해 보리라 마음먹고 ‘애무’란 낱말을 세밀하게 풀어 쓰기로 했다.
슬라이드 글라스 위에 뉘여진
내 이마며 입술
목에 와 닿는 바람의 감촉
부드러운 손놀림에
나는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지
내 살과 피, 그리고 뿌리까지
샅샅이 더듬어대고 쓰다듬는 손길에
몸을 맡기지 않을 수 없었어
둘째, 쓸데없는 전문 용어 ‘해부침, 프레파라트, 마이크로미터’의 남발이다. 유식(?)을 과시하려다 오히려 시의 이미지를 저하시키므로 모두 삭제하였다.
이대로 시가 진행되면 역시 싱거워지고 말겠지? 이쯤해서 전환의 장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시키는 대로 가만히 순응하고 있던 시적 화자가 시니칼하게 등장하고, 급기야 그는 ‘갇힌 걸 깨우치고’ 반항하는 것으로 시의 절정을 이루어 놓았다. 반항할 때 수다스러우면 역효과! 지나치게 설명적이며 쓸데없는 구절들도 버리기로 한다.
급기야
나는 내가 갇힌 걸 깨우쳤어
내 안의 작은 염색체 수까지 헤아리는
눈빛에 나는 질리고 말았어
셋째, 설명적이며 감정의 무절제로 깔끔하지 않은 부분(진드기 톡토기, 모두 내주었었지, 그것도 모자란지 등)도 모두 삭제하였다. ③행과 ④행 사이였다. 아까워 끌어안고 있던 행들을 과감히 빼버리니 절제된 미인을 본 것 같아 개운했다.
넷째, 마지막 서술 부분 ‘노랗고 불투명한 내 이성’의 부정확성이다. 내 딴에는 꽃밥이나 꽃가루의 날림 등등을 나타내려고 했으나 그것은 나만의 생각에 그치는 무리한 의미 전달이었으므로, 무엇인가 보완이 되어야만 했다. 그래서 뒤늦게 철이 든 양달개비가 ‘나는 내가 아니야’라고 외치며 무미건조한 일상을 각성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하였다. 마지막으로 제목 바꾸는 것은 당연한 일. 「갇힘에 관하여」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내 어린 꽃봉오리를
핀셋으로 헤치고 그는
봉오리 안의 꽃밥을 조심스레 따냈어
슬라이드 글라스 위에 뉘여진
내 이마며 입술
목에 와 닿는 바람의 감촉
부드러운 손놀림에
나는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지
내 살과 피, 그리고 뿌리까지
샅샅이 더듬어대고 쓰다듬는 손길에
몸을 맡기지 않을 수 없었어
급기야 나는
내가 갇힌 걸 깨우쳤어
내 안의 작은 염색체 수까지 헤아리는
눈빛에 나는 질리고 말았어.
처음, 너무도 소중히 다루는 데 감동해
한생애를 맡긴 내 믿음에 문제가 있었던 거지.
나는 더이상 양달개비꽃이 아니야
늦봄 깊은 잠에 빠져든 내가 아니야
노랗고 불투명한 내 이성이
폭발하기 시작했어.
나는 내가 아니야
이렇게 한바탕 피비린내 나는 수술을 끝내고 위와 같이 정리해 보고 나니 와!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게 아닌가.
자신의 느낌을 짧고 함축적인 언어로 어떻게 구체화하느냐, 그 구조적 결합을 어떻게 연관시키며, 수사의 한계는
또 어떻게 정하느냐 하는 일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이 작품처럼 써나가면서 새로운 의미가 덧붙여 질 때는 갈등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그 갈등을 이기고 마침내 작품을 완성시킨 뒤의 성취감 역시 그만큼 뿌듯한 것이었다.
내가 쓴 시임에도 어떻게 씌어졌으며 왜, 어떻게 고쳤는지 분석하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마치 수학문제 답을 거꾸로 검산하는 느낌이다. 왜 답을 얻게 되었는지 알아내지 못하면 커닝한 것밖에 되지 않겠는가?
역시 글쓰기란 확실한 것까지 의심해 보는 작업의 하나임에 틀림없는 일이었다. (김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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