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시 속의 예술작품>
‘김점선의 화백의 ’화려한 신부‘와 흰옷의 고독한 시인 에밀리 디킨슨
김주혜
나는 모든 예술가들을 존경한다. 시인과 소설가는 물론이고 화가, 음악가, 무용가 등. 그들의 작품 속 다른 세상과의 만남 그리고 작가와 주인공과의 교감으로 나만의 날개를 펼치는 그 순간순간들이 즐겁기 때문이다. 클래식한 것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열정적으로 노래하는 K-POP 가수들의 무대에도 열광한다,
아주 오래전, 나는 미국여행에서 돌아온 친구로부터 인형을 하나 선물로 받았다. 흰 드레스에 목에는 검은 리본을 달고 있는, 검은 눈망울이 유난히 큰 인형을 받으며 속으로 어린애처럼 무슨 인형을 선물한담? 하다가 소매 끝에 달려있는 레테르를 눈여겨보니 바로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모형인형이었다. 에밀리 디킨슨이 살았던 집을 관람하고 나오는 길에 기념품 가게에서 예술가들의 모형인형 중에 나를 닮은 그 인형이 눈에 띄어 샀다고 했다. 그제야 환하게 웃으며 그 고마움에 답하기 위해 에밀리 디킨슨에 대해 자세히 찾아볼 기회도 가졌고, 감사한 마음을 졸시로 화답한 적이 있다.
그 후, 어느 날 우연히 남양주 어느 갤러리를 지나다 그곳에서 화가 김점선의 그림을 접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매스컴을 통해 조금은 알고 있었으나 가꾸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 색다른 느낌을 갖고 있다가 그녀의 그림을 가까이에서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솔직히 첫인상은 충격이었다. 몇 점 안 되는 그림은 푸른 초원 위에 하얀 말들이 네모난 머리, 네모난 다리, 네모난 몸뚱이를 하고 실실거리며 웃는 듯 아주 단순한 색채로 그려져 있고, 한 귀퉁이에 역시 유아적인 필체로 서툴게 끄적거린 어설픈 화가의 서명을 보고 그 촌스러움에 어처구니가 없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만만하게만 보던 김점선 화백의 삶과 그림을 인터넷에서 찾아보고는 그녀의 기인 같은 삶과 자유로운 영혼에 호감을 갖고 점점 애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말과 오리, 꽃 등 자연을 소재로 한 단순한 그녀의 그림에서 나는 뭔지 모를 위안과 평화를 얻었으며 처음 홀대했던 나의 무지에 죄스런 마음마저 들었다
‘화려한 신부’라는 제목의, 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커다란 새를 꼭 끌어안고 고개 숙이고 있는, 이 그림은 인사동 어느 화랑에서 판화로 만났다. 구입하고 싶었으나 일행들과 함께였으므로 놓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 그림을 본 순간 나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 ‘희망의 새’가 떠올랐다. 비록 제목은 ‘화려한 신부’였으나 내 눈엔 눈 감고 커다란 새를 꼭 끌어안은 그림 속의 신부는 결코 화려하지 않았고 마치 고통을 안고 있는 듯이 보였다.
-희망은 한 마리 새/영혼 위에 걸터앉아/가사 없는 곡조를 노래하며/그칠 줄을 모른다.
나는 그 소리를 아주 추운 땅에서도/아주 낯선 바다에서도 들었다./하나 아무리 절박한 때에도 내게/ 빵 한 조각 청하지 않았다. -희망은 한 마리 새 /에밀리 디킨슨
에밀리 디킨슨의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는 그녀의 칩거생활과 흰색 옷이다. 선교사를 양성하는 여자전문대에 다니다가 1년도 못되어 돌아온 이후 그녀는 일생동안 자기 집 문지방을 한 번도 넘지 않고 30대 후반부터 죽는 날까지 철저하게 흰색 옷만을 고수하였다고 한다. 그녀가 흰옷을 고집하고 칩거한 이유에 대해서 분분하지만 사랑에 실패한 이유라고 한다. 그토록 절실하게 사랑한 대상이 누구였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유부남인 목사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실제로 목사의 사진까지도 있으니 맞는 성 싶다.
“내 생명이 끝나기 전에 나는 두 번 죽었습니다.”라는 시에서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두 번 겪고 나서 끝내 세상과의 단절을 선언한 것이다. 그녀의 흰옷은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수의와 사랑하는 이와의 영적 결합을 의미하는 순결한 웨딩드레스의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는 설도 있다.
-내가 만약에 누군가의 마음의 상처를 막을 수 있다면/ 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내가 만약에 한 생명의 고통을 덜고/ 기진맥진해서 떨어지는 울새 한 마리를 다시 둥지에 올려놓을 수 있다면/ 내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내가 만약에.. /디킨슨-
디킨슨은 특히 작은 새와 어린이에게 애정을 쏟았다. 그녀는 둥지에서 떨어진 작은 새를 둥지에 올려주며 울새에게 칩거하는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여 누군가 둥지에서 떨어진 자신을 구해줄 손길을 호소하듯 노래하고 있다. 생의 마지막 25년간 그녀는 아버지의 노란 집 이층에서 낯선 사람을 두려워하며 칩거하며 살았으나 어린이들은 좋아하여 종종 어린이들이 집 앞에 몰려오면 광주리에 생강빵을 담아 내려주곤 했다고 한다. 그녀가 작은 새, 어린이에게 집착하는 것은 어쩌면 고통을 모르던 어린시절이 그리워 아버지집에서 평생을 살았을 것이라 짐작해 본다.
그즈음 내 삶의 방향도 180도 급변하여 거의 칩거하다시피 살고 있던 시기였기에 친구도 그런 나를 위로하려고 인형을 선물로 주었을 것이다. 이 그림의 신부가 단순히 흰옷을 입어서 디킨슨을 떠올린 것만은 아니다. 신부가 끌어안고 있는 커다란 새가 어쩌면 디킨슨이 걱정한 작은 새일 것만 같았다. 시에 등장하는 작은 새의 고통을 화가 김점선의 시각으로 크게 확대하여 그려냈을 거라고 나름대로 감상하니 더욱 재미있고 애정이 갔다. 물론 확인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러나 지금 다시 봐도 그림 ‘화려한 신부’의 주인공은 시인 에밀리 디킨슨을 그린 것이라고 우겨본다.
김점선 화백, 그녀의 삶 역시 평범하지가 않았다. 1946년 개성에서 태어난 그녀는 이화여대와 홍익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대학원 입학 첫해이던 72년 제1회 앙데팡당전에서 파리 비엔날레 출품 후보로 선정되면서 본격 활동을 시작했다. 간결한 선과 색으로 말과 오리, 맨드라미, 들풀 등 자연을 그린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하며 회화뿐 아니라 문학, 방송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드는 ‘종합예술인’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 친구들과 단체로 죽기로 했다가 퍼뜩 ‘한 번 하고 싶은 걸 하다가 죽자’며 생각한 게 그림이었고, 선배 화실에서 노래 부르는 남자에게 반해 즉석 청혼하고 떼를 쓰듯 결혼하고, 퍼포먼스를 한다고 한강 백사장에서 발가벗는 해프닝도 벌이고, 방에는 돌아간 남편이 평생 번 돈 20만원을 액자에 끼워둔 채 남편의 흔적 하나도 치우지 않고 김점선식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다가 훨훨 떠난 기인. 김점선은 죽음도 즐겁게 맞이한 듯 했다. 마지막 붓을 잡지 못할 정도로 병이 악화되자 그녀는 컴퓨터로 작업을 하며 손자를 위한 동화까지 펴내는 열의까지 보이며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내 죽음 때문에 멈출 수 없기에
친절하게도 죽음이 날 위해 멈추었네
수레는 실었네, 우리들 자신은 물론
또 영원을.
-내 죽음 때문에 멈출 수 없기에/ 에밀리 디킨슨
이렇듯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김점선 화백과 달리 에밀리 디킨슨은 고독했다. 현실의 문을 완전히 차단하며 죽음의 꽃마차가 자기의 영혼을 실어주기를 꿈꾸었다. 고독을 죽음에의 제물로 바쳤다. 그 고독함이 곧 그녀의 절망을 합리화 하고 순화를 통해 마침내 세상과 화해하고 시로서 부활할 수 있었다. 2000편의 시를 써놓고도 살아있는 동안엔 단 7편만 발표한 그녀의 시와 철저한 칩거는 화가 김점선의 수많은 작품 속 실실거리는 말과 오리, 들풀 그것들의 자유로움에서 동질의 외로움과 화려한 신부로 부활했음을 발견한 것은 나만의 지나친 억지라고 해도 좋다.
이제 내 나이도 돌아가신 아버지의 나이 가까이 되오니 두 분 부모님의 정이 그리워 눈물짓는 날이 많아진다. 그동안 내 아이들을 키우고 출가시키느라 낳아주신 부모님께 불효했던 죄스러움과 부모슬하에서 철모르는 공주처럼 부모님의 사랑만 파먹고 살았던 아버지집이 그리워 행복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함께 몰려온다. 내 삶도 마치 둥지에서 떨어져 버린 것 같아서 나야말로 내 생명이 끝나기 전에 두 번의 죽음을 맞이한 듯 하루하루 견디며 살고 있으니 에밀리 디킨슨 인형을 선물로 받을 이유가 충분하지 않았나 웃어본다.
시인과 화가의 극과 극의 시각, 그 안에서의 동질감을 디테일하게 끌어낸 작품에서 나는 희열을 느낀다. 생전에 책 펴내는 허영까지도 허락하지 않았던 에밀리 디킨슨의 2000편 가까운 시들은 그녀의 사후 69년이 되는 해에 비로소 시집으로 출간되어 세인들을 위한 새로운 둥지를 틀고 행복한 울새가 되어 있다. 시편들 모두 제목 없이 쓴 것도 그녀만의 자유로움이 아닐까. 누구의 아내와 누구의 엄마에게 부여된 책임감도 굴레도 무거운 나이도 그리고 세상의 시선도 모두 외면할 수 있었던 그녀의 칩거의 삶이 오히려 자유롭게 보여 마냥 부럽기만 하다. 그리하여 나는 에밀리 디킨슨이 이제 그만 그 검은 리본과 흰 드레스를 벗어버렸으면 하는 마음에 그녀에게 편지를 전한다.
에밀리 디킨슨에게
김주혜
그 옷을 벗어버리세요
당신이 흰옷을 즐겨입는 이유를 알아요
당신처럼 사랑하는 방법에 익숙하지 않은 나도
하루하루 죽음과 벗하며 살고 있어요
당신이 검은 리본으로
세상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평생 흰옷으로 굳게 닫힌 마음을 보이자
나는 머리가 하얗게 세어버렸어요
흰빛의 인형으로 온 당신으로 하여
내겐 작은 세상이 열렸고
푸르른 초원에 클로버를 키웠어요
당신은 내 어깨에 작은 새를 얹어주며
당신처럼 무명이냐고 물었죠
그러나 이미 당신은 유명해졌어요
그러니 제발,
그 흰옷과 검은 리본은 벗어버리세요. (2012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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